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 : 마태오 복음을 중심으로
종말에 관한 설교(마태 24-25장) 마태오 복음서의 다섯 설교 중에서 종말에 관한 설교(24-25장)는 산상 설교(5-7장), 파견 설교(10장),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 설교(13장), 교회 공동체 설교(18장)에 이은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종말 설교는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 도래에 관한 단락입니다. 마태오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유행했던 유다 묵시 문학의 배경 속에서 발전된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 마르코복음 13장의 구조를 따르면서 마태오복음 24장을 저술하는데, 여기에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고(24,1-3), 세상 종말의 전조들(24,4-28), 사람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재림(24,29-31), 그리고 깨어 있음(24,32-44)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24,36)라고 하시면서, 오직 아버지만 아시는 종말의 시기는 도둑처럼 생각지도 않은 때에 갑자기 찾아을 것이니 늘 깨어 있기를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24,42) 이어지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탈렌트의 비유(25,14-30)에서는 이같은 종말을 대비하는 충실하고 준비된 삶을 강조합니다. 또한 종말 설교와 다섯 설교 전체를 마무리하는 최후의 심판(25,31-46)은 오늘날 현세에서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줍니다. 저는 이십 년 전에 군생활을 경비교도대라는 보직을 받고 일반 교도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살인죄로 십여 년을 복역 중이던 장기수 한 명이 교도소에서 탈옥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는 모범수로서 외부에서 열린 기능대회에 참가했다가 성적이 예상보다 좋지 않자 충동적으로 도망을 쳐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긴급 속보로 지역 뉴스에 보도되었고, 밤새 그를 붙잡기 위해서 수천 명의 경찰과 교도관들이 애를 써 마침내 다음날 아침, 인근 주택의 보일러실에 숨어있는 그를 검거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는 세례명을 가진 교우였습니다. 당시 교정 사목을 담당하시던 수녀님께서는 평소에 그가 기능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가석방되기를 바라며 성실히 생활했으며 심성이 착하고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했기에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제가 그를 만나면 수녀님께서 기도하고 있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그는 죄인이었지만 작은 희망마저 사라져 버려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날 오전, 저는 좌우로 두 명의 교도관에게 결박당한 채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끌려 나오는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용기 있게 다가가서 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안나 수녀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말씀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신학생인데 저도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절망에 빠져 바닥만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들어 잠시 저를 보았고, 저는 절망 속에서 솟아나는 한 줄기 희망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제 가슴은 몹시도 두근거렸고 마음 한 켠에서는 뜨거운 전율이 일었습니다. ‘내 말 한마디가, 내 작은 기도가 생이 꺼져가는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불씨가 될 수도 있겠구나...’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을 차별없이 사랑하시고, 예수님은 가장 작고 가난한 형제들 속에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오에게 있어 종말과 최후 심판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사람의 아들을 만나는 일상에서부터 매 순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입니다. 마지막 날을 항상 깨어 준비하는 우리는 주님 앞에 과연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오늘 여기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돌보는 애덕의 실천만이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25,34), 의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25,46)으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월간빛, 2022년 12월호,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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