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뿔 나팔 이스라엘에서는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숫양 뿔로 만든 나팔을 붑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가운데 하나인 뿔 나팔은 하느님을 예배할 때 사용되었고(시편 98,5-6; 150,3) 지금도 유다교 회당에서 쓰입니다. 뿔 나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쇼파르]인데, ‘야생 양’이나 ‘염소’를 뜻하는 아카드어 [샤파루]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팔의 재료를 제공하는 뿔 동물의 명칭이 어원이 된 셈이지요. 예부터 숫양과 숫염소의 뿔처럼 구부러진 쇼파르가 일반적으로 쓰인 건, 그 휜 형태가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려는 마음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로쉬 하샤나 26ㄴ). 곧 죄를 짓더라도 회개해서 주님께 ‘돌아가리라’는, 또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입니다. 숫양 뿔이 가장 대중적으로 쓰인 건,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바치려 한 이사악 대신 숫양이 마련된 “야훼 이레”(창세 22,14)를 떠올리게 하는 까닭입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로쉬 하샤나 16ㄱ). 그러나 소뿔로는 만들지 않는데요, 그것이 탈출 32장의 금송아지 배교 사건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미쉬나』 로쉬 하샤나 3,2). 뿔 나팔 소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신호였습니다. 이는 탈출 19,16-20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집트에서 갓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 아래 집결해 있을 때 주님께서 쇼파르 소리와 함께 불 속에서 현현하셨지요(탈출 20,18-21). 모세가 아뢰는 말에 주님께서 우렛소리로 답하셨는데, 여기 나오는 쇼파르(“뿔 나팔 소리”)는 천둥 같은 주님의 음성(욥 26,14; 에제 1,24 등)을 상징합니다(묵시 4,1).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예리코를 정복할 때는, 사제들의 뿔 나팔 소리에 따라 백성이 함성을 지르자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여호 6장). 쇼파르의 소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한다는 건 민수 29,1에서도 암시됩니다. 바로 신년의 초하루를 “나팔을 부는 날”로 규정한 것인데요, 나팔을 불어 새해의 시작을 온 백성에게 알리려는 목적이었습니다(레위 23,24). 성경에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새해 첫날 나팔을 분 데에는 ‘하느님이 온 세상의 임금이심’을 다시금 천명하려는 의미가 있었던 듯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의 현존을 신호한 뿔 나팔의 의미는 신약 성경에서도 이어집니다. 그리스어로 숫양 뿔 나팔은 [살핑크스]인데, 마태 24,29-31 등에서 살핑크스는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날,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리라.’고 예고한 이사 27,13과 일치합니다. 1테살 4,16에서는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라고 하지요. 신·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 온 세상의 임금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한 뿔 나팔은 오늘날 우리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뿔 나팔 미사’라는 명칭에도 반영되어 그 의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구약학과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수도자 신학원 등에서 구약학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에제키엘서>와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이 있다. [2023년 1월 8일(가해) 주님 공현 대축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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