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 고통의 문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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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7-09-27 | 조회수3,139 | 추천수0 | 신고 |
저에게 도움이 되었던 글이라서 혹시 도움이 되실까 싶어서 올려드립니다.
악의 기원과 실낙원 이야기(에덴 동산) / 정태현 신부님의 답변
안녕하세요? 그리고 일반인들이 많이 하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은 왜 악을 일삼는 못된 이 들에게는 늘 번창하고 잘 살게 하시고 반면에 주로 착하고 죄없는 이들에게, 심지어 하느님을 착실히 믿고 따르는 이 들에게도 꼭 피하고 싶은 재앙 (예 : 세월호 사건, 후쿠시마 지진 피해, 유대인 학살, 각종 전쟁의 희생자 들, 순진한 아프리카인들의 굶주림과 사망, 각종 진실한 하느님 공동체들에 대한 잔인한 박해 등등...) 날 수 있을까? 계신다면 왜 저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과연 이승에서 행하는 선행이나 악행에 대해 서는 행하는 본인에게 아무런 결과의 차이가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읍니까만, 그래서 그냥 맡기고 순종하며 살아 가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운명적인 길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런 질문을 대했을 때 믿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대답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쭙는 것이오니 정리를 좀 해 주시면 앞으로 말씀 선포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익하겠습니다. 출처: 한님성서 연구소
1. 창세기가 말하는 고통의 기원: 세상의 악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기원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문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입니다. 고금의 모든 철학과 신학, 신화와 민담 등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주제이지요. 창세기 저자도 이 문제 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창세기 저자의 결론은 세상의 악과 고통, 그리고 인간의 죽음은 죄 때문이고 죄는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망각하고 하느님과 경쟁하며 그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그분과 대등한 존재가 되려 하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를 짓도록 부추긴 제3의 존재를 상정합니다. 이상의 생각을 창세기 저자는 고대 근동인들에게 익숙한 신화와 설화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에 담아 전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 2장과 3장의 이른바 '실낙원'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실낙원 이야기는 인간 실존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전달하기 위해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에덴이라는 낙원은 어디에 있었는가? 말하는 뱀이 있었는가? 하느님은 예전에는 사람처럼 말을 하시고 산보도 하셨는가?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지선악과는 사과인가 복숭아인가?
인류의 시조는 단일조상인가 복수 조상인가 등등 이야기의 주제와는 상관없는 의문들을 제기합니다. 특히 뱀에 대해서는 성경 전통에서 악마 또는 사탄과 동일시되면서 구약 외경에서 타락한 천사의 우두 머리와 동일시되고 요한묵시록에서 악의 화신인 '옛 뱀' 또는 '용'과 동일시됩니다. 따라서 00씨처럼 도대체 왜 하느님은 악의 화신인 뱀을 창조하시어 인간을 죄로 유혹하게 하고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하셨는가? 하고 묻는 것은 창세기 저자의 집필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에덴 동산은 무위도식하며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이상향이 아닙니다. 아담은 그곳에서 동산지기로서 피조물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인간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생명나무와 지선악수 사이에서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고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잘못 선택하여 자신과 하느님, 자신과 이웃, 자신과 자연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이나 동료나 피조물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고통을 자초하고 피조물까지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이 끌어들인 파멸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구원할 방도를 찾으신다는 기쁜 소식도 이 이야기 안에 들어 있습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는 말씀은 최초의 복음, 또는 원복음이라 불리는 하느님의 자애로운 개입입니다. 구원 역사 전체가 이 실낙원 이야기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뱀을 악마나 사탄으로 여기면 왜 하느님이 이런 존재를 만드셨나? 아니면 그런 존재가 하느님과 맞선 세력으로 처음부터 있으면서 선과 악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 뱀을 인간의 지나친 경쟁심과 탐욕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런 의문은 제기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저자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기원은 죄에서 비롯되는데, 이 죄는 인간의 허황된 경쟁심과 탐욕에 이끌려 하느님의 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세상의 악을 물리적인 악과 윤리적인 악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 물리적인 악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자연 재해, 전염병, 인체의 고통과 노화 등을 말하고 윤리적인 악은 우리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불행, 이를 테면 이웃과의 적대 관계, 사회적 혼란, 무절제와 방종 으로 생겨난 각종 질병 등을 말합니다.
먼저 물리적인 악으로 꼽는 가뭄, 홍수, 화산 폭발, 자연적 산불, 지진 등은 지질을 새롭게 형성하고 유지 하는 데 필요한 자연현상입니다. 그것 때문에 피해를 받는 생물체에게는 악일지 모르지만 자연계 전체로 보면 악이 될 수 없습니다. 세균으로 인한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생물이나 바이러스가 인체내에서 무질서하게 증식하면 인간을 괴롭히지만 이것들이 없으면 동식물은 생존과 소멸을 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생명체들의 시체는 누가 처리합니까? 인체 내의 통증과 발열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체를 더 큰 질병이나 손상에서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신체 반응입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자연계의 현상들은 전부 긍정적인 이유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 그 자체는 본디 전체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조화롭게 세상을 만드셨습 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이 세상의 질서와 조화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문제, 오존층의 파괴, 급속한 사막화와 황사와 미세 먼지, 생명체 종(種)의 멸종 등이 그 좋은 예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온갖 여건을 다 마련해 놓으셨는데,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로 그 좋은 여건을 망가뜨린 다음, 하느님께 그 불행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다른 사람에게 탓 을 돌리는 행태와 똑같습니다.
윤리적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호 사건, 아프리카나 북한의 기아 문제, 전쟁, 종교 분쟁 등, 00씨가 제기한 세상의 악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 하느님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다 마련해 줄 수는 있어도 아이들 대신 공부해 줄 수는 없습니다. 제 탓으로 시험에 낙방한 다음에 그 탓을 부모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 앞에서 그 탓을 하느님께 돌리지 말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개선책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종교인들이 이런 노력을 기울일 생각은 안 하 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다른 신에게 우리를 세상의 악과 고통에서 구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만 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망가져 가는 자연과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에 투신하지 않으면 인류 공동체는 물론이요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하나밖에 없는 지구는 오래지 않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묵시록의 재앙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탐욕과 집단적 죄악이 그 재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악인이 모두 득세하고 의인이 까닭없이 고통을 당한다고요? 그리고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것을 방치하실 리가 없다고요? 먼저 악인과 의인의 구분이 문제입니다. 누가 구분합니까? 또 무슨 기준으로 구분합니까? 대부분의 인간 안에는 악과 선이 공존합니다. 100% 순수한 악인도 100% 순수한 의인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객관적인 악이 존재하고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한 사람의 행실을 겉으로만 보고 악인으로 낙인을 찍어 영원히 단죄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어느 교부의 말씀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 악인이 모두 득세하고 의인이 모두 손해를 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다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원인을 잘 살펴 대처하면 모두 잘 될 것입니다. 또 득세와 손해, 행복과 불 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돈 많이 벌고 권력을 누리며 온갖 사치를 다 누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가난하고 평범하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 님이 제시하신 참 행복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마태 5장과 루카 6장).
구약에서야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세 가지 축복으로 현세적인 가치, 곧 장수와 후손과 재산을 내세웠 지만 예수님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 세 가지 축복에서 완전히 제외되셨지만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에 넘쳐 행복하게 사시고 그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민감하셨습니 다. 병자를 낫게 하시고 장애인들을 고쳐 주셨으며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시고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 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이를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에 맞서 투 쟁하셨습니다.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세상의 악에 맞선 그분의 투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자애로운 통치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는 물질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 앞에서 이론적인 답변만을 제시하지 않으시고 직접 당신의 몸을 던지 시어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세상의 악은 지나친 경쟁과 탐욕으로 인한 폭력과 거짓 에 기인하고 인간의 고통은 이 악이 가져온 결과임을 간파하시고 이를 없애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 셨습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물인 동시에 과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마태 18,23-35 참조). 언제까지나 책상에 앉아서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인간에 게 고통이 닥쳐야 하나? 하느님은 왜 이런 악과 고통을 허용하시고 방치하시는가? 하느님은 존재하기나 하시나? 이런 한가로운 담론이나 하고 있을 새가 없습니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생명나무와 지선악수, 생성과 파괴가 혼재하는 역동적인 세상에 뛰어 드십시오.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 참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기루를 쫓고 있는 사람들, 눈물과 고통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천막을 치고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출처: 한님성서연구소 정태현 신부님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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