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침묵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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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7-09-30 | 조회수3,468 | 추천수0 | 신고 |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세상 안에서 별의별 불의의 사고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를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왜 저러 한 사고 때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해주시지 않는가? 정말 전지전능하신 신이 맞는가?"
오늘 야곱의 우물을 읽고 공부하면서 깊이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 있었다. 내용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대부분 사람은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을 편리하게 생각 한다.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하며 사는 게 좋긴 하지만 귀찮고 부담될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되돌아가기를 바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탈출 16,3; 17,3; 민수 11,5; 14,3-4) * 출처 : 야곱의 우물 2017년 9월 18일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대부분 사람은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을 편리하게 생각한 다'는 말씀이 완전 공감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며 사는 게 때로는 너무도 편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떨 때는 내 사업을 하면서 너무도 힘들 때는 "아, 월급쟁이로 살 때가 행복했었어!"라는 한탄 아닌 한탄의 소리도 나왔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월급을 받으면 얼마나 편해라며 옛날을 그리워하던 때가 있다. 마치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되돌아가기를 바란 것처 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가 좋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가끔 하느 님께서 내 인생에 직접 개입하셔서 내 삶을 이렇게 저렇게 교통정리를 해 주셨으면 하 고 바랄 때도 있다. 특히나 내 삶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어떤 시련들 앞에서는 더욱 그러한 마음이 간절하기도 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으로 답하신다. 왜 그렇게 하실까를 묵상해 본다. 마태오복음 27장 39절에서 4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서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 님을 모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가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수석 사 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 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 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 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 마태 27,39-44)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어떤 불의의 사고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하는 말들, "하느님께 서 계시다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신 신이시라면 왜 저렇게 죽어가는 사람들 을 구해주시지 않는가?"라는 그러한 말들은 어떤 면에서 생각해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지나가던 자들'이나 '수석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과 원로 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비아냥거렸 던 그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다가왔다.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보시라지" 하며 비아냥 거렸던 그것과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 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 까?" 라는 뜻이다.(마태 27,46 참조) 아마도 예수님의 이 모습이 우리가 궁금해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말 철저하게 하느님께 버림받은 듯한 말씀이 아닌가? 또 하느님께서는 철저하게 침묵으로 답하시는 장면이 아니던가?
이렇게 하느님께 철저하게 버림받는 듯한 모습 또는 하느님의 철저한 침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어떤 말로 그걸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싶 다. 그건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 신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려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느님의 모 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그 자 유로움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고, 그렇게 받은 하느님을 닮은 자유로움으로 세상 만 물을 돌봐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다음은 창세기 2장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 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고 하신다. 이 장면이 바로 사람이 하 느님께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창세기 3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바로 이 장면 또한 사람이 하느님께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는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 니까 사람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자유의지와 반대로 하느님의 명령을 거스 를 수 있는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는 모습이라고 다가왔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사람은 결국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명령을 거슬러 따 먹지 말라고 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성찰 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열매를 저 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며 비아냥거렸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로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을 죽게 만들고 있으면서도 자 신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성찰하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 해 내보라시지."라며 결국 하느님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우리들 안에 있다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불의의 사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러한 불 의의 사고를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다던데 왜 저들을 구해주시지 않 는가?" 이렇게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그 모습을 보면서 지금 내 모습을 성찰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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