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입문] (2) 성경의 언어 ① 성경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로 자라나게(to form)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정의한다면, ‘하느님은 도대체 어떤 언어로 말씀하실까?’라는 질문도 가능하겠죠? 언어는 생물과 같아서 태어나고, 진화하고, 사멸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생겨나고 사라지는 언어의 다양성은 각 지방의 사투리까지 포함하자면 무궁무진합니다. 당연히 그중에 어느 것 하나를 꼭 집어서 하느님의 말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언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혹자는 하느님의 언어는 소위 천상의 언어, 천사들의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의 주요 기능이 ‘소통’이라는 점에서 설령 천상의 언어가 따로 있다한들 하느님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꼭 집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6 이제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신령한 언어로 말한다 한들,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을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7 마찬가지로 피리나 수금처럼 생명 없는 것들도 소리를 내지만 분명한 가락을 내지 않으면, 피리로 불거나 수금으로 뜯는 곡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8 또 나팔이 확실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 준비를 하겠습니까?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신령한 언어로 말할 때에 분명하지 않은 말을 하면,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1코린 14,6-9)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지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편에서도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알아듣게 말해도 듣는 사람이 귓전으로 듣거나 말하는 이의 의도 따위는 상관없이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판단한다면 소통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에 남긴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필요한 법입니다. 운동 경기에 앞서 선수들은 간단한 몸 풀기부터 시작합니다.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키는 것은 경기 중의 부상을 방지하고, 평소에 단련한 근육과 신경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줍니다. 성경을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에도 이러한 몸 풀기가 필요합니다. 성경을 집어 들기 전, 그 기도-대화의 장에 들어가기 위한 워밍업으로 간략한 준비 기도가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에 대한 바람, 하느님의 말씀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원의를 담아 잠시라도 이렇게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임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임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염원을 제 안에 키워주소서 임께서 저를 고쳐놓으실 때까지 고쳐서 완성하실 때까지(성 아우구스티노, 「삼위일체론」, XV.28.51) [2023년 3월 5일(가해) 사순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성경 입문] (3) 성경의 언어 ② 현대어 성경은 2013년 기준으로 신구약 전체가 518개 언어로, 신약성경과 일부분의 번역에 사용된 언어를 포함하면, 무려 2,80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번역본은 하나의 대본으로 수렴됩니다. 그러나 그 대본 역시 원문은 아닙니다. ‘최초로 기록된’ 성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기록된 성경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낡고 흐려져 사용하기 어려워지면 새로운 필사본으로 남겨지게 되고, 그 필사본이 후에는 다른 필사본의 대본으로 사용되기를 반복합니다. 성경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 활자화되기 이전까지는 일일이 한 글자 한 글자를 직접 필경사들이 손으로 베껴쓰기를 거듭해서 후대에 남긴 고된 작업의 결과물로 보전되었습니다. 인쇄술은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성경의 역사에서도 인쇄술의 발명이야말로 수많은 필경사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똑같은 복사본을 생산해 내는 혁신적인 기술로 성경을 찍어내기 시작하자 새로운 문제가 불거지게 됩니다. 다양한 형태의 필사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필사는 필연적으로 오류를 동반하게 됩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서 한 점, 한 획을 옮겨 적더라도 필사자가 의도하지 않은 오류가 생기게 마련이고, 어떤 경우에는 필사자가 의도적으로 본문을 고쳐 적는 경우도 생겨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대본의 필사에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 오류를 수정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필사본 사이에 존재하는 소소한 문제점들이 인쇄술을 적용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불가피한 오류의 대량생산에도 이바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쇄업자들과 성경 학자들은 현존하는 모든 필사본들 사이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차이점을 극복하고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할 수 있는 번역대본을 설정해서 그것을 활자화하는데 사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개념이 ‘공인본’이라는 용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수용본문(textus receptus)’이라는 개념이 발전한 것인데, 그 본뜻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본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성서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종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공인된’ 번역대본을 확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성경 필사본들을 모아 비교, 대조하고 그 차이점들을 분석하여 보다 신뢰할 만한 본문을 확정하되, 확정된 본문과는 다른 본문을 담은 필사본들과 그 형태를 참조할 수 있도록 하여 성경의 연구나 번역에 참조할 수 있는 성경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것을 ‘비평본(textus criticus)’이라고 부릅니다. 사본들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한 비평적 연구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시대를 거듭해가며 새롭게 발견되는 사본들과 고대 번역본들에 대한 연구 성과들은 이 비평본 성경을 다시 수정하도록 요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에는 이렇게 표준적인 새로운 판본을 바탕으로 연구와 번역 작업이 수행됩니다. 현행 한국천주교회의 ‘새번역성경’의 첫머리에는 이 번역본이 어떤 번역 대본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일러두기에서 밝혀 놓고 있습니다. 가지고 계신 성경 책의 목차 앞에 실린 일러두기를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2023년 5월 7일(가해)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성경 입문] (4) 성경의 언어 ③ 이전 글의 말미에 언급했던 새번역 「성경」 (2005)의 일러두기를 보면, 그 첫 번째 문장은 “성경은 ‘본문’에 충실한 한국 교회 공용 번역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本文, textus)이라함은 필사본을 거쳐, 인쇄본으로 출간한 비평본 성경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보존해 온 성경 말씀의 기록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미 언급했듯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필사되어 온 성경의 본문들은 원문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습니다. 필사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단 한 번이라도 오류를 담은 본문은 시간이 지나면 다음 세대의 더 많은 본문들의 대본일 터이니 2,000여년 동안 필사되어온 본문들은 최초의 기록과는 조금씩 달라져 다양한 형태의 후대의 본문들로 분화됐습니다. 주로 성경연구와 번역의 대본이 되는 비평본 성경은 그러한 다양한 본문들의 차이점을 비교 검토하여 비판적으로 선별된 형태의 본문을 싣고 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선별과정에서 선택되지 않은 다른 형태를 비평각주로 처리하여 연구자들과 번역가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선택되지 않은 형태를 ‘본문’과 다르다 해서 이문(異文)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일러두기가 일러주는 그 번역 대본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구약 성경의 히브리말 부분을 번역할 때 대본으로 삼은 슈트트가르트 판 히브리말 성경(BHS), 구약성경의 그리스말 부분은 ‘원칙적으로’ 괴팅겐 판 칠십인역 성경, 신약성경은 세계성서공회가 발행한 그리스 말 신약성경(GNT)입니다. 이 비평본 성경들은 대체적으로 성경학계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본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경우 새로운 표준판(BHQ) 작업이 진행 중인데 아직 완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원래 히브리 말과 그리스 말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히브리어 구약성경은 히브리말과 같은 어족에 속하지만 조금 다른 언어인 아람말로 쓰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게 성경은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세 가지 언어로 쓰인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이 언어들 역시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 유행했던 외래어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여러 출판물에서도 본래 한국말은 아니지만 한글로 표기된 ‘컴퓨터’, ‘칭따오’, ‘오마카세’ 등의 외래어를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탈리아어로 “번역가는 반역자”(traduttore, tradittore)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발음상의 유사성을 토대로 한 일종의 언어유희를 통해 ‘번역’의 한계를 풍자한 말입니다. 어떤 문장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원문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 글이 사용된 원어의 특성을 고려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내용을 정확히 알고자, 성경의 원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성경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매우 고역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번역작업이 필수적입니다. 번역은 반역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원문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최초의 성경 기록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글의 번역과 연구,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자 귀를 열고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에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는 은퇴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2023년 7월 2일(가해)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성경 입문] (5) 성경의 언어 ④ 새번역 성경 일러두기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성경은 ‘본문’에 충실한 한국 교회 공용 번역본이다.” 첫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는 ‘본문’과 ‘공용 번역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성경 본문을 번역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번역은 한국 천주교회가 인준한 한국 천주교회의 공인 번역본의 성격을 지닙니다. 곧, 21세기 한국천주교회는 이 번역본을 토대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더불어 이 성경 번역은 ‘본문’에 충실한 특징을 지닙니다. 곧,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의역하기보다는 원문의 의도를 살리는데 더 방점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번역 성경이 대본으로 삼은 원본 성경, 곧 원어 성경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 성경(BHS, LXX Zigler ed., GNT 4th ed.) 모두 비평본 성경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현존하는 모든 수사본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가장 원문에 가깝게 복원한 본문을 구성하고, 그 외의 증거 자료들이나 이문들을 참고할 수 있도록 난외 각주를 달아 놓은 성경들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연구와 번역의 기초자료들입니다. 성경은 외래어를 포함하여 총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아람어가 기본이고, 70인역이라고 부르는 구약성경의 희랍어(=그리스어) 번역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 성경에는 유다교에서 확정한 정경 39권 외에 다른 책들이 섞여 있습니다. 사도시대 이래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번역 성경 중 일부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로마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갈 때 유다교가 인정하는 39권만을 구약으로 인정하며 자신들을 로마 교회와 구분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 이래로 로마 교회가 제정한 정경목록, 교회규범, 성사, 전례 등등을 부정하고 성경만의 권위를 인정하려다 보니 구약성경의 경우도 원래이 성경의 주인(?)인 유다교가 인정하는 본문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듯 보입니다. 동시에 유다교와는 다른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로마 교회를 부정하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가톨릭 교회가 이 책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신약성경이 이 번역 성경을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도들 시대 이래로 그리스도교는 늘 이 성경들을 ‘하느님 말씀’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라틴어 번역 성경(=불가타 성경)이 나오기 이전까지 그리스도 교회가 사용한 성경은 희랍어 성경이었습니다. 2세기 이후로 교회는 유다인들의 성경뿐 아니라 사도들의 편지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의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생산하고 보존한 기록물 가운데 일부를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으로 인정하여 필사하고 교회의 소중한 신앙 유산으로 간직하고 전례나 교리교육 등에서 반복적으로 읽고 가르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그리스도교에서 읽히게 되는 성경은 모두 ‘희랍어 성경’인 시대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로마 시대가 지속되면서 문화적으로 서로마 지역에서는 희랍어보다는 라틴어가 주요 언어로 활용되게 되면서 희랍어 성경은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본문이 되고 맙니다. [2023년 11월 5일(가해) 연중 제31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성경 입문] (6) 성경의 언어 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이후로도 오랫동안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었습니다. 곧, 신자들은 성경을 읽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말씀을 들어온 기간이 훨씬 오래되었고, 여전히 공동체의 전례나 모임에서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은 각자가 각기 다른 본문을 따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말씀을 동시에 듣습니다. 대략 2,500여 년 정도 되는 기록된 성경의 역사 속에서 신자 대중이 성경책을 소유하고 그것을 읽기 시작한 역사는 겨우 200-30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공동체의 전례 때에나 성경에 담긴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문자화된 책을 읽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류에게 책이 지금처럼 흔한 물건도 아니었거니와 산업화와 맞물려 공교육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는 글을 읽어야 할 필요성조차 없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례 때에 성경을 봉독 하는 봉사자는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등의 안내로 시작하고 ‘주님의 말씀입니다’라는 결문으로 끝맺습니다. 전형적인 예언서의 ‘사신양식’(使臣樣式)으로서, 선포되는 말씀의 분명한 출처를 밝히는 것입니다. 전례 때에 말씀의 선포자는 하느님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청중은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전례문의 대부분을 이루는 기도와 찬양은 그 말씀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이며 대화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전례를 통해 하느님과의 만남을 체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입니다. 유다인들이 성경을 지칭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구약성경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그들은 구약성경을 각각 법(토라Torah), 예언(네비임 Nebî’îm), 그 외의 기록들(케투빔 Ketûbîm)로 구분합니다(집회서 서문 참조). 그래서 그 내용을 고려하여 성경책을 가리켜 타나크(TaNaK)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더욱 보편적으로 성경을 가리키는 단어는 미크라(혹은, 복수형으로 미크라옷)입니다. ‘부르짖다’, ‘외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라qr⁾’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성경이 문자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그 문자들로 기록된 하느님의 ‘선포’라는 본 의미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혼자서 성경을 읽더라도 되도록 소리를 내어 읽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오는 그 말씀을 귀로 듣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읊조리는 것은 하느님과 의 소통의 수단이 됩니다. 인간의 삶을 들여다봐도 오감 중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통교의 수단이 되는 감각은 아마 청각일 것입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천둥처럼 울리는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듣는 것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합니다. 죽음의 순간 망자의 청각이 사망선고 이후에도 당분간 지속되니 너무 요란하게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임종을 지키는 이들에게 당부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청각은 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감각이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소통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소리내어 나의 감정과 의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기도의 동반자입니다. [2024년 1월 7일(나해) 주님 공현 대축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성경 입문] (7) 성경의 언어 ⑥ 성경의 언어라는 소주제를 다루는 게 벌써 여섯 번째입니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이 주제는 정리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 주제를 이토록 오래 다룬 이유는 성경이 특정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강조드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긴 책이지만,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이 쓰고 전수해 온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아주 먼 옛날, 특정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시작되어 인류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들이 겪어온 기나긴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참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도 그 글들을 읽을 때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상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기반을 둔 신앙을 고백하는 이는 자신이 물질 진화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체적인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틀 속에서 살펴보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당신이 누구이시고, 나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록하여 전해주었던 사람들의 말로써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읽고, 듣는 그 순간, 하느님께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있는 바로 그때 우리는 늘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그 만남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언어를 통해서 소통한다는 것은 한 존재가 자신을 넘어서는 놀라운 체험이면서 동시에 한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말로도 한 사람의 의지와 정감을 온전히 다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말은 소통을 방해하며, 때로는 따스한 눈빛 하나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장황한 위로보다 더 고맙고, 오히려 그 마음을 더욱 잘 전달해 줍니다. 또한 수십 장의 보고서나 정교한 논문보다도 더 강력한 의미 전달의 도구가 되는 것이 시인의 시 한 줄일 수도 있고, 그마저도 다 담아내지 못하는 의미와 감정을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로 표현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평론도 원작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말로써는 도대체가 다 표현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통의 도구들을 모든 상황에 다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더욱 답답하고 짜증 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에 차마 입을 떼지 못하면서 내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를 야속해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 현실이 되는 일은 일상적이지 않은 매우 특별한 체험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어서 대부분의 인간의 소통은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글은 말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며 훨씬 휘발성이 덜합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지만 글보다 쉽사리 잊힐 수 있고, 변형되기도 쉽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 입으로 전해지던 내용들이 후대에 정리되고 편집되어 글로 옮겨진 결과입니다. 차후의 필사 과정에서 조금씩 다른 이문(異文)들이 파생되지만 구전형태의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고정적입니다. 더구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 권위를 공인받은 글들은 더더욱 고정된 형태로 굳어지는 특징을 지닙니다. 유다교의 마소라 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설령 오류가 의심되는 본문일지라도 본문 자체를 고치기보다는 난외주(欄外註)를 달아 전수받은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려 했습니다. 천년이 훌쩍 넘는 긴 필사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수사본(手寫本)들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은 각 신앙 공동체가 그만큼 성경을 소중이 간직하여 후대에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3월 3일(나해) 사순 제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정석 라파엘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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