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 -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경당 제단 지하철이나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다니다 보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심지어 예루살렘까지 진출해 유다인들에게 같은 신앙을 전파하려 애쓰는 모습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성경을 흑백논리로 왜곡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들에게도 애석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구호를 듣고 그리스도교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될까 걱정도 됩니다. 그런데 마태 25,31-46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보면, 그들의 구호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었느냐가 아니라, 가장 작은 형제에게 베푼 자비와 사랑이 심판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옛 임금이 실천해야 했던 공정과 정의와 관련됩니다. 온 세상의 임금이신 하느님께서 지상의 임금에게 바라신 것은 공정과 정의였습니다(시편 72,1-4). 하지만 지상의 임금들이 이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자, 성자께서 직접 이루실 거라는 메시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공정과 정의란 타인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지 않는 것, 특히 수탈당하기 쉬운 약자를 착취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예레 22,3; 에제 18,5.7-8 등). 여기엔 궁핍한 이의 상황을 개선해주고 착취자를 처벌하는 일도 포함됩니다(시편 72,2.4; 이사 11,4). 따라서 공정과 정의는 ‘약자 보호’와 관련된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 자애와 동정, 자비의 행위로도 표현될 수 있어서 시편 103,17과 즈카 7,9-10에서는 ‘의로움’이 ‘자애’의 병행어로 나옵니다. 그리고 생태계 전체로 보았을 때는 우리 인간이 임금과 같은 존재이므로,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모든 창조물의 임금이신 하느님을 본받아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수탈당하기 쉬운 약자에는 동료 인간뿐 아니라 인간 이외의 다른 창조물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인간이든 자연이든 상대의 몫이나 생명을 함부로 빼앗거나 착취해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말이 막연한 두려움을 주지만, 사실 그것은 세상 끝 날 주님께서 손상된 공정과 정의를 회복하시리라는 예고입니다. 이 ‘끝’은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므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해온 이들과 정당한 몫을 빼앗겨 괴로운 이들에겐 구원의 순간이 됩니다. 그 순간 심판의 기준은 ‘가장 작은 형제에게 베푼 자비와 사랑’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었느냐의 여부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마태 7,21-23에서도 확인되는 바입니다. 악인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그분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경우가 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최후의 심판은 징벌의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마태 25,41-45). 이 모든 내용을 감안할 때 ‘최후의 심판’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인 “공정과 정의”(예레 9,23)를 바로 알고 옳게 실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구약학과에서 공부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님성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저서로는 <에제키엘서>와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가 있다. [2023년 7월 23일(가해) 연중 제16주일(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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