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26]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 사도행전은 13장 이후부터 본격적인 바오로의 선교 여행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회심 사건 이후 지금의 터키, 그리스 지역을 세 차례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했습니다. 맨 처음 바오로는 유다인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유다인 회당에서 쫓겨나면 다른 민족 사람들을 향해 선포했습니다. 바오로는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인지하였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갈라 2,9 참조) 그러나 바오로가 복음을 전할 사람들은 유다인과는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이방인들에게 메시아는 들어보지도 못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방인들은 다신교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유다인과 이방인은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의 복음 선포문은 베드로의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베드로의 복음 선포문이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부활로 시작한다면, 바오로의 복음 선포문은 예수님의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을 주시며,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는 하느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17,25-26) 이런 차이는 앞에서 언급한 복음을 듣는 대상의 차이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복음 선포 대상은 하느님을 아는 유다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왜 메시아이신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선교하는 대상은 야훼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그들은 신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신은 제우스, 바다의 신은 포세이돈, 사랑의 신은 큐피트 등 여러 신들을 만들어내며, 그들의 신상을 세우고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래서 바오로의 복음 선포는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은 모두 허상이며, 진정한 신은 하느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때 바오로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들을 칭찬합니다.(17,22) 복음 선포는 일방적인 내용 전달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의 대상이 누구인지가 중요하고 그들이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팻말로 배려 없는 일방적인 선포를 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없는 선포는 복음 선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는 선전자로 비춰질 뿐입니다. 진정한 복음 선포는 선전과 선동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를 통해 삶을 변화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는 말과 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보기가 되는 삶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래서 바오로도 다른 이들에게 오해를 살만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좀 더 인내하며 겸손의 삶을 살았습니다. [2023년 7월 30일(가해) 연중 제17주일 서울주보 5면,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사목국 성서못자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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