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허영(虛榮)의 부자(父子) 기드온과 아비멜렉 기드온의 승리 – 하느님 힘으로 바알의 제단을 허물고 아세라 목상을 불태워버린 기드온은 “바알은 (누구를) 옹호할지어다.”라는 뜻의 ‘여루빠알’ 혹은 ‘여룹바알’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헐었으니, 바알은 그에게 맞서 자신을 옹호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입니다.(판관 6,32 참조) 이제 여루빠알 곧 기드온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본격적으로 미디안 사람들과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합니다.(판관 6,34 참조) 그는 먼저 자신과 가까운 북부지파의 사람들을 소집하여 3만2천 명의 군사를 거느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지시를 받은 기드온은 먼저 그들 중에서 두려움에 떨던 2만2천 명을 먼저 돌려보내고, 다음으로 남은 1만의 군사 가운데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던) 대부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다음 (개처럼 혀로 물을 핥아먹던) 3백의 군사들만 남겨 놓았습니다. 어떻게 장수가 군사의 수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으며, 더구나 대부분의 군사를 떠나보내고 소수의 병력만으로 전쟁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기드온은 이렇게 적은 인원의 군사만을 뽑아 쓰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순명하였습니다. “네가 거느린 군사들이 너무 많아, 내가 미디안을 너희 손에 넘겨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나를 제쳐 놓고, ‘내 손으로 승리하였다.’ 하고 자랑할까 염려된다.”(판관 7,2)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던 것이지요. 기드온은 미신을 믿고 우상까지 만들었던 불완전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한 전쟁에 임한다는 자세를 굳게 견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온전한 도구가 된 그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긴 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용감한 자세로 전쟁에 임하는 것뿐이었지요. 기드온이 거둔 승리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이룬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느님의 힘을 신뢰하였기에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승리를 원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어떤 승리를 구해야 할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야 할 승리는 나의 힘으로 거두는 승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승리하시도록!’ 그것이 내가 이뤄야 할 참 승리의 목표입니다. “승리의 하느님, 제게 당신의 힘을 허락하시어 제가 그 힘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기드온의 겸손과 신앙고백 – 하느님의 다스림 미디안족을 쫓아낸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였습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자자손손이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판관 8,22) 판관은 이스라엘백성 가운데에서 뽑혀 필요한 기간 내에서만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 판관이 적을 물리친 다음에는 자신이 전에 하던 일로 되돌아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기에 기드온의 부재를 염려한 북부사람들은 이제 일상 가운데서도 자신들을 지켜줄 확실한 수호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왕조를 세워 자신들의 임금이 되어 달라는 사람들의 청원에 기드온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다스릴 것도 아니고 내 아들이 여러분을 다스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을 다스리실 분은 주님이십니다.”(판관 8,23) 기드온은 자신이 왕으로 추대될 수도 있었지만 사양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스리실 분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신명기계 편집자의 신학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여러분을 다스리실 분은 주님이십니다.”라는 기드온의 말이 특별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主]님’이란 ‘나를 다스리실 주인님’이란 뜻이니, 내가 드려야 할 신앙고백은 바로 ‘나를 다스리실 주님께 나를 맡겨 드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자신과 백성을 다스리실 주님이시라고 응답한 기드온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드온의 잘못과 욕심 기드온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가지 청을 하였습니다. “저마다 전리품 가운데에서 고리를 하나씩 내주십시오.”(판관 8,24) 당시 유목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고리’나 ‘코걸이’를 즐겨 찼었는데, 기드온은 그렇게 받아 모은 금붙이들로 ‘에폿’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여기서 에폿은 출애급기 39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사제들이 제사를 지낼 때 착용하는 의복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을 우상처럼 받들며 불륜을 저질렀다고 하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점을 치는데 사용한 물건이나 형상에 가까워 보입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기를 사양하였지만 왕과 유사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기드온은 많은 아내를 두었는데, 그들에게서 난 아들이 일흔 명이나 될 정도였지요. 그는 스켐의 소실로부터 얻은 아들에게는 심지어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것이니 기드온이 자신이 왕과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작명을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드온이 아들에게 지어준 그 이름의 뜻대로 일까요? 아비멜렉은 훗날 일흔 명의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물론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만. 기드온은 그 인간적인 부족함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은 본격적으로 하느님께 거역하고 바알들을 섬기며 불륜을 일삼았습니다. 기드온은 남을 다스리는 왕의 자리는 사양하였으나 왕처럼 누릴 수 있는 안락한 삶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리품을 챙겨 하느님을 대신할 우상을 만들어 섬겼고, 현실의 편안한 삶에 젖어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기드온에게서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했던 내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했던 나는 얼마나 자주 죄로 얼룩졌으며, 항구한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했던 나는 얼마나 자주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운 삶을 살았었는지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물질적인 풍요함에 안주하는 삶은 얼마든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가르침과 참된 행복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요! 스스로 임금이 된 아비멜렉 소실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그 아버지로부터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운명적으로?) 왕이 될 이름을 받은 아비멜렉이 어머니의 고향인 스켐을 찾아 외가의 모든 친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루빠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과 한 사람이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낫습니까?”(판관 9,2) 아비멜렉의 말은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 기드온이 임금이고 그 아들 일흔 명이 왕세자라면 모를까 논리가 빈약한 말을 한 것이지요. 물론 기드온이 어느 정도 왕처럼 특권을 누리고 편안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이니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백성을 위해서 차라리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낫다고 한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감춰두고 이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비멜렉의 말을 들은 스켐의 지주들은 그가 자신의 형제라는 이유로 마음이 쏠렸습니다. 원래부터 임금을 원했던 그들은, 이왕이면 자신들 지역에서 임금이 나기를 바라면 마음으로, 소위 학연(學緣)은 아니겠지만 혈연(血緣)과 지연(地緣)으로 아비멜렉에 몰표를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비멜렉에게 신전에 보관하고 있던 재물까지 잔뜩 꺼내주었지요. 이렇게 아비멜렉은 후원자들과 재산을 배경으로 건달들을 고용하여 힘을 갖추고 자신이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될 일흔 명이나 되는 다른 형제들을 살해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그는 스켐의 모든 주민들에 의해서 임금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사회발전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나는 기꺼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할 것이다!” 정치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신감과 다짐의 이면에는 “내가 남들보다 더 낫다!”, “이 자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 혹은 “나야말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교만과 욕망이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마음과 자세로 정치에 임하는 그들이기에 이제 선거 때만 되면 무조건 상대방을 깎아내려야만 내가 된다는 절박감에 터무니없는 비방과 모함까지 서슴지 않는 것 아닐까요? 아비멜렉은 장자도 아니었으며 왕자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정실이 아닌 소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왕의 아들이라는 허영심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비멜렉은 감히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자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여러분, 아비멜렉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혹 내 안에 아비멜렉과 같은 교만, 욕망, 허영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겸손으로 위장하고 있는 나 자신이라면 그 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립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8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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