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30] 애정의 코린토 교회(18,1-23) 아테네 선교를 마친 바오로는 남쪽으로 내려가 코린토 지역에 도착합니다. 아테네에서 복음 선포가 문화적 차이 때문에 힘들었듯이, 코린토 지역은 문란한 삶의 방식 때문에 힘겨웠습니다. 코린토는 아드리아해와 에게해를 잇는 운하가 있던 항구도시이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대륙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지리적 조건 때문에, 문화와 학문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문란한 삶을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코린토 서간을 보면, 불륜과 성적 타락에 대한 바오로의 따가운 지적을 볼 수 있고,(1코린 5,1-13; 6,12-20 참조) 교회 모임 때 가난한 이들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나눔이 없는 식사를 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11,17-22 참조) 바오로는 편지를 보내 그들의 생활을 바로 잡아주고자 노력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편지는 코린토 첫째와 둘째 서간밖에 없지만, 학자들은 적어도 4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렇게 많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얼마나 큰 애정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난 사실을 전해 줍니다.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라는 부부입니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추방 명령으로 로마를 떠나 코린토 지역에 온 사람들입니다. 황제의 추방 명령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벌어진 메시아에 관한 논쟁 때문에 나왔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이들 부부와 함께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그 결실은 코린토 첫째 서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포스와 가이오스, 스테파나스 집안의 사람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1코린 1,14-16)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내라는 주님의 환시 후,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 머물면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후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이끌려 아카이아 총독이었던 갈리오에게 붙잡혀 갑니다. 갈리오는 로마인으로, 바오로와 유다인들 사이에 종교적인 문제로 다툼이 있는 것을 알기에 재판을 열기 전에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냅니다. 이를 통해 그 당시 로마 관리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의 한 분파로 보는 시각입니다. 바오로는 한동안 코린토에 머물다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에페소로 갔고, 이 부부를 에페소에 남겨 놓은 다음, 카이사리아까지 혼자 내려갔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인사한 다음, 안티오키아로 돌아갑니다. 이로써 바오로의 두 번째 선교 여행이 마무리됩니다. 바오로는 끝인사로 자신의 사랑을 전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1코린 16,24) 코린토 신자들이 신앙 안에서 잘 살지는 못했지만, 바오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삶을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엄격한 아버지처럼 때로는 따스한 어머니처럼 격려해 주었습니다. 회개란 엄한 훈계와 충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같이 아파하고 공감하는 사랑이 동반되어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이 회개를 완성하는 근원입니다. [2023년 8월 27일(가해) 연중 제21주일 서울주보 5면,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사목국 성서못자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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