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인간의 죄악에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자비 살아남은 자 ‘요탐’의 예언적 외침 기드온의 아들 일흔 명이 같은 (이복)형제 아비멜렉에 의해 살해될 때 살아남은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숨어 목숨을 구한 그는 막내아들 ‘요탐’이었지요. 아비멜렉의 죄악에 분노한 요탐은 스켐 가까이 있는 그리짐 산꼭대기에 올라 스켐의 지주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때 그는 먼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우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무들이 (자신들의 임금이 되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나무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훌륭한) 나무들은 다 사양하는데 (보잘것없는) 가시나무가 임금이 되겠다고 나서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내 아래로 숨어들어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 모든 나무들을 불살라버릴 것이다.’”(판관 9.7-15 참조) 요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정제도의 약점을 내다보고, 이제 아비멜렉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보면 그 제도가 기대보다 훨씬 허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비유는 형편없는 아비멜렉이 오르지 말았어야 할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로 인해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요탐은 다음의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이 말하는 그러한 위험이 현실이 될 것임을 예고한 후, 자신은 임금이 된 형 아비멜렉을 피해 ‘브에르’라는 곳으로 가서 숨어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해낸 기드온을 배신하여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여종의 아들인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이제 여러분과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도시는 아비멜렉으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고, 아비멜렉은 여러분과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도시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오.”(판관 9,16-20 참조) 왕의 지위를 탐냈던 아비멜렉의 최후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삼 년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재위 말년, 스켐의 지주들이 그를 배반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아비멜렉은 ‘스켐 탑’의 사람 천 명가량을 처형했습니다. 이어 아비멜렉은 ‘테베츠’로 진군해서 그곳을 함락시키고, (공격을 피해 탑으로 올라간)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려고 탑으로 다가가다가, 때마침 어떤 여자가 던진 맷돌에 머리가 부수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자한테 살해당했다는 말은 (죽어도) 듣기가 싫었던 아비멜렉은 자신의 무기병에게 명령하여 영예롭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탐의 저주대로 결국 아비멜렉과 스켐 사람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요탐의 외침은 장차 벌어질 일을 미리 내다본 예언과 같았지요. 이에 대해 판관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 일흔 명을 죽여 제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악을 되갚으시고, 스켐 사람들의 모든 죄악도 그들 머리 위로 되돌리셨다. 여루빠알의 아들 요탐의 저주가 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판관 9,56)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최초로 왕이 된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심으로 왕이 된 사람이었고, 그도 또 그를 왕으로 추대한 사람들도 멀지 않아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이를 내다본 요탐은 임금도, 또 임금을 세우려는 자도 결코 왕정제도로 인해 행복을 얻지 못할 것임을, 오히려 그들 모두는 상대방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다 파멸될 수 있음을 비유로 들려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인간적인 제도는 결코 어떠한 축복도 기대할 수 없음을 요탐의 이야기에서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의 계획과 실행이 아무리 좋아도 하느님 뜻에 대한 순명의 자세 없이는 제대로 된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니까요. 인간의 부르짖음과 회심에 응답하시는 하느님 아비멜렉에 이어 판관 ‘톨라’가 23년 동안, 판관 ‘야이르’가 22년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다시 바알을 비롯한 여러 신들을 섬겨 하느님의 진노를 사 심한 곤경에 빠졌습니다. 18년 동안 필리스티아인들과 암몬인들의 압제에 시달린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정녕 저희는 저희 하느님을 저버리고 바알들을 섬겼습니다.”(판관 10,10)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부르짖을 때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해 주었다. 하지만 너희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이제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보아라. 너희가 곤경에 빠진 이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해 주지 않겠느냐?”(판관 10,11-14 참조) 자신들의 배은망덕에 대한 하느님의 책망과 거절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계속 하느님께 아뢰었습니다.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저희에게 하십시오. 그러나 오늘만은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판관 10.15)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께 저지른 자신들의 죄에 대해 뉘우쳤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를 보이면서 “오늘만은 저희를 구해 주십시오.” 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애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회심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판관기는 그들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들 가운데에서 낯선 신들을 치워 버리고 주님을 섬기니, 주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 계실 수 없었다.”(판관 10,16)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그분의 뜻에 어긋나게 이방의 신들을 공경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 이상은 속지 않겠다고 하신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다시 구원을 손길을 펴신 걸까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과거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이 겪고 있는 아픔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혹시 지금 육신에 고통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시나요? 어쩌면 그 고통은 어떤 경우 더 큰 불행을 막는 예비신호일 지도 모릅니다. 내게 그 고통이 없다면 치유의 기회를 영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은 하느님과 나를 이어줄 사다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셨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십시오.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느님 앞에 드러난 나의 죄과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의 죄를 아파하고 뉘우치며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드러낼 때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좋으신 하느님, 당신 자비의 문을 열어주소서. 그 문이 잠겨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9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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