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43) 에스테르기
역사 안에서 유다인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큰 그림 - 에스테르기는 하느님께 대한 직접 언급이 없을 뿐이지 유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암시하고 있다. 아르트 데 헬데르, ‘첫번 째 푸림절 서한을 쓰는 에스테르 왕비와 모르도카이’, 유화, 1685년경. 히브리어 타낙 성경 ‘에스테르’는 성문서로 분류돼 있습니다. 헬라어 번역 성경인 「칠십인역」에는 ‘Εσθηρ’(에스테르),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Esther’라 해 역사서로 분류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발행한 우리말 「성경」 역시 ‘에스테르기’라 해 불가타에 따라 역사서에 배열해 놓았습니다. 에스테르기는 167절로 구성된 히브리어 본문에 헬라어 번역본에서 93절을 첨가해 한 권으로 통합한 책입니다. 「칠십인역」은 헬라어 첨가 부분을 하느님에 관해 직접 언급이 없는 히브리어 본문 사이사이에 삽입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가치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우리말 「성경」에도 히브리어 본문 가운데 삽입된 헬라어 본문을 구분하기 위해 장, 절을 다르게 표기합니다.(예; 1,1①) 하지만 히브리어 구약 성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개신교는 유다교 타낙 성경처럼 히브리어 본문만을 에스테르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성경은 에스테르기를 역사서로 분류하지만 실제로 역사성이 희박한 작품입니다. 페르시아 역사에는 ‘와스티’라는 왕비도, ‘에스테르’라는 왕비도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테르기는 임금을 제외한 다른 모든 등장인물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페르시아의 왕비는 항상 페르시아인이었습니다. 에스테르기 1장 1절의 임금이 크세르크세스 1세라면 그의 왕비는 1장 11절이 말하는 와스티가 아니라, 후타오사라는 여인입니다. 유다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몰살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또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재상 하만의 태도도 페르시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테르기 내용은 마카오베기에 나오는 유다인들을 모질게 탄압한 헬레니즘 시대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기원전 175~기원전 164년)의 통치 시대와 들어맞습니다. 히브리어본 에스테르기에 한 번도 하느님이 언급되지 않은 까닭은 이 책이 작성될 시기에 유다인들이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고 여길 만큼 암울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외세의 억압과 박해 속에서 하느님께서 과연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지를 의심했습니다. 마치 안 계신 듯,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어두운 밤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바로 에스테르기입니다. 에스테르기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게 된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기억하시고 돌보고 계심을 믿게 될 것이라 격려합니다. 에스테르기는 혼란한 인간 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발자취를 알아보라고 당부합니다.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에스테르기 저술 시기를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전 100년 사이로 넓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께 히브리어 본문이 저술됐고,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헬라어 본문이 기록됐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에스테르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도입부(1,1①-1 )는 기원전 597년 바빌로니아 1차 유배 때 포로로 끌려온 모르도카이가 유배지에서 앞으로 닥치게 될 유다인들의 고난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꿈을 통해 전해 받습니다. 첫째 부분(1,1-2,23)은 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잔치에 불참한 와스티 왕비를 폐위하고 유다인 처녀 에스테르를 새 왕비로 선택합니다. 둘째 부분(3,1-9,19①)은 유다인들을 말살하려는 재상 하만의 계략에 맞서는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의 활약을 들려줍니다. 셋째 부분(9,20-10,3⑪)은 푸림절 유래를 설명합니다. 푸림은 주사위, 제비를 뜻하는 히브리어 ‘푸르’의 복수형입니다. 에스 9,24-26은 푸림절이 본디 이교도들의 축제였지만 유다인들이 이를 자신들의 축제로 받아들였음을 설명합니다. 에스테르기는 나라를 잃은 유다인들이 다른 민족 사이에 섞여 살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고 이민족과 분명히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다른 민족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민족우월주의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유다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고유 신앙과 관습, 전례 등에 충실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말살하려는 그 모든 시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시고자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하느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성경학자들은 해외 유다인 공동체가 이방 민족에게 박해를 당하다가 같은 동포 가운데 어느 누군가의 주도적 역할에 힘입어 박해를 벗어난 사건이 실제 일어났을 수 있고, 그런 사건을 바탕으로 에스테르기가 꾸며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에스테르기는 하느님께 대한 직접 언급이 없을 뿐이지 유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암시합니다.(에스 4,14) 또한 에스테르기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적 같은 초자연적 개입으로만 여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초자연적 개입이 있든 없든 유다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모든 위협에서 건져내는 사건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에스테르기는 해외 공동체의 유다인들이 이민족의 위협을 예견치 못하는 상황에서 겪는 불안과 공포를 신앙으로 이겨내도록 이끌어줍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0월 1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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