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35] 예루살렘에서 체포와 바오로의 회심 설교(21,27-22,21) 누군가의 선동은 진실을 식별하는 도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낙인찍고 추방하도록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됩니다. 예수님의 상황도 마찬가지였고, 바오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악의 선동조차도 구원과 복음 선포의 도구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구원의 표징으로, 바오로의 추방은 로마를 향한 복음 선포로 바꾸어 버리셨습니다. 이 변화의 여정이 바오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바오로의 정결 예식이 끝날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은 그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바오로가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쳤고, 예루살렘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오로를 향한 선동은 로마 군인들의 개입을 불러왔고, 바오로의 체포로 이어집니다. 언제나 체포와 박해는 복음 선포를 가로막기보다는 주님을 통해 기회의 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안토니오 요새 앞에서 군중에게 설교를 시작합니다. 자신이 충실한 유다인이었지만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신앙고백과 복음 선포입니다. 이 설교는 사도행전 9,1-19에 소개됐었던 바오로의 회심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는 전에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요소들도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 회심 이야기는 바오로가 직접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당당하게 설교합니다. 자신은 경건한 유다인이었으며, 누구보다도 유다교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공표합니다. 그리고 유다교를 향한 충실성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헌신을 자신의 사명에 대한 충실성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듯합니다. 맹목적인 충성은 참된 주님을 못 알아보고 박해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바오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박해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자비가 사명의 핵심임을 전해 줍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도 “내 탓이오. 내 탓이오.”라며 자신의 죄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죄의 고백은 우리를 상심에 빠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의 고백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자비송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다는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거룩한 미사의 중심이 되고, 그분과 하나 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이 보다 명확해집니다. 바오로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22,16) 죄의 용서를 통한 세례로 바오로는 새로 태어났고,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새로운 사명을 받습니다. 결국 바오로의 사명은 자신의 믿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신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주님의 자비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주님 자비의 은총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3년 10월 29일(가해) 연중 제30주일 서울주보 5면, 김덕재 안드레아 신부(사목국 성서못자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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