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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삼손,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3-11-07 조회수270 추천수0

[하느님 뭐라꼬예?] ‘삼손’,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 (1)

 

 

영웅의 탄생, 하느님의 선택

 

입타에 이어 ‘입찬’이 7년간, 이어 판관 ‘엘론’이 10년간, 판관 ‘압돈’이 18년간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습니다. (압돈은 40명의 아들과 30명의 손자가 다 나귀를 타고 다닐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고 판관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밖에 전해오는 특별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러 버림을 받아 40년 동안 필리스티아인들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이때 태어난 인물이 그 유명한 ‘삼손’입니다.

 

“삼손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시대에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판관 15,20) 판관기는 이렇게 삼손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신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관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은 삼손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판관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는 ‘단’지파 ‘초르아’ 출신의 ‘마노아’였는데, 그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고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천사가 아내에게 나타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앞으로 조심하여 술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하고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아기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판관 13,5)

 

천사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손은 그 자신이 하느님께 직접적으로 특별한 소명을 받아 일한 사람이 아니라, (일찍이 그 부모에게 끼쳐진) 하느님의 섭리로 잉태되고 자라나 장차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할 사람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삼손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시지 않고, 그의 사적인 복수심을 이용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괴롭히는 필리스티아인들을 물리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지요.

 

‘나지르’는 히브리말로 ‘가려내다’ ‘봉헌하다’를 뜻하는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따로 떼어 놓은 사람’,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란 뜻을 지닙니다. 판관기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란 표현을 통해 삼손이 필리스티아인을 몰아낼 특별한 사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고 태어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판관기가 말하는 나지르인이란 삼손의 경우처럼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자신을 봉헌하게 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구약이 말하는 나지르인에서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이란 의미도 있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을 나지르인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고, 그러한 삶의 기간적인 면에서 ‘평생 봉헌’ 외에도 일정 기간을 약속하고 지키는 ‘한시적 서약의 봉헌’도 생겨났습니다. 오늘날 수도회로 말하자면 ‘종신서원’과 ‘유기서원’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나지르인은 초기 교회에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던 ‘특별한 서약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교회직무를 수행하는 이들 중에 ‘나지르인의 서약’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들은 금욕과 고행의 생활을 하도록 뽑힌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충성심으로 그러한 엄격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었지요. 나지르인이 하느님께 서원할 경우 지켜야 할 생활 수칙 등 관련된 법에 대해서는 민수기 6장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미 하느님의 선택으로 세례를 받고 새로 태어난,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봉헌을 기념하는 매번의 미사에서 우리 자신도 함께 봉헌하는 ‘새로운 나지르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새롭게 봉헌하는 노력을 더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나지르인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아버지 마노아의 기도와 봉헌

 

하느님의 사람에게서 자신의 아이가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라는 말을 아내에게 전해 들은 마노아는 아이의 장래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고,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찾아온 하느님의 천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앞으로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 아이는 어떤 사람이 되며 또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판관 13,12) 이에 삼손의 어머니가 지켜야 할 사항을 다시 강조한 주님의 천사는 (마노아의 청을 받아들여 바쳐진 번제물과 함께) 제단의 불길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태양’을 뜻하는 삼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하느님의 복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이제 삼손이 ‘초르아’와 ‘에스타올’ 사이의 ‘단의 진영’에 있을 때 하느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삼손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고 힘쓴 삼손 부모님들의 노력이 인상적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를 위한 기도’를 드릴 때 하느님께서 자녀들을 위해 맡기신 사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삼손의 행동, 하느님의 섭리

 

‘팀나’라는 곳은 유다지파의 영토 가까이 있는 곳으로서 후에 단지파의 성읍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삼손은 이 ‘팀나’에 들렀다가 그곳에 사는 필리스티아 여자 하나를 보고 반해서 그 여자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여달라고 청하였지요. 이에 부모는 삼손에게 말하였습니다. “네 동족의 딸들 가운데에는 여자가 없어서, 할례받지 않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가서 아내를 맞아들이려 하느냐?”(판관 14,3) 그래도 삼손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이 동족이 아닌 이방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려 한 것이지요. 하지만 삼손이 고집을 피운 이러한 잘못된 결혼은 판관기의 해석에 의하면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일이 주님께서 하시는 것인 줄 몰랐다. 그분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을 치실 구실을 찾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다.”(판관 14,4)

 

그리하여 삼손은 그 부모와 함께 팀나로 혼인할 여자를 만나려 내려갔습니다. 삼손이 팀나의 포도밭에 다다랐을 때, 힘센 사자 한 마리가 달려들었지만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들이닥쳐 찢겨 죽었습니다. 얼마 뒤에 삼손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다시 그곳으로 가다가 일전에 죽은 사자를 보니 그 시체에 벌 떼가 모여 있고 꿀도 고여 있었습니다. 삼손은 그 꿀을 따서 먹고 부모에게도 가져다드렸습니다.

 

삼손은 혼인잔치에 함께 한 30명의 필리스티아 젊은이들에게 속옷과 예복 30벌을 걸고 수수께끼를 내었습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소. 이는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오?” 이 수수께끼를 도저히 풀 수 없었던 젊은이들은 나흘째 되는 날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여 결국 답을 찾아내었습니다. “꿀벌이 (죽은) 사자에게 달려들어 그를 먹고 꿀을 만들어 내니, 결과적으로 힘센 사자에게서 다디단 꿀이 나온 것이오.”

 

이에 삼손은 그들이 자신의 아내를 꾀어내어 답을 얻어낸 것을 알고서는 분노하여 아스클론 사람 30명을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사람들의 옷을 벗겨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삼손이 화를 내며 자기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 버리자 삼손의 아내는 혼인 때 들러리를 서준 동료의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삼손의 복수심이 움트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인 필리스티아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이려 했던 삼손은 뜻하지 않게 그들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손을 도구로 사용하실 상황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 모든 일은 결국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지나온 삶의 자취에서 하느님의 계획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하느님 뭐라꼬예?] ‘삼손’,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 (2)

 

 

아내를 찾으러 간 삼손의 복수

 

삼손의 혼인잔치는 결과적으로 신랑이 낸 수수께끼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이방인인 필리스티아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했지만 그녀의 배신으로 기만을 당했고, 그렇게 분노한 그는 서른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필리스티아 여인의 매력이 철철 넘쳤던 것일까요? 데리고 오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삼손은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끌고 장인에게 가서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장인의 대답은 “자네가 딸을 미워한다고 생각하여 이미 들러리를 섰던 동료에게 주어버렸네. 대신 더 예쁜 동생을 아내로 삼게나.”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삼손은 “내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해를 끼친다 해도, 이번만은 그들이 나를 탓할 수 없을 것이오.”(판관 15,3) 하면서 밖으로 나가, 여우 300마리를 사로잡아 두 마리씩 꼬리를 서로 비끄러매고서는 그사이에 홰를 매달아 불을 붙여 필리스티아인들의 곡식밭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곡식과 포도밭은 물론 올리브 나무들까지 홀랑 불에 타버리게 되었습니다. 수확을 앞둔 많은 것들이 홀랑 타버리자 화가 치솟은 필리스티아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야기한 삼손의 처와 장인(?)을 불태워 분풀이를 했습니다. “너희가 이런 식으로 한다면 좋다.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기 전에는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판관 15,7) 삼손은 이렇게 말한 후 닥치는 대로 필리스티아인들을 쳐 죽이고 나서 ‘에탐’ 바위틈에 머물렀습니다.

 

이제 필리스티아인들은 삼손의 확실한 원수가 되었고, 이로써 삼손과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판관기는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손과 필리스티아인들의 전쟁

 

필리스티아인들이 유다에 진을 치고 ‘르히’를 습격한 후 삼손을 내놓으라고 하자 3,000명이나 되는 유다인이 삼손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르히’는 ‘턱뼈’을 뜻하는 곳으로 장차 삼손이 ‘당나귀 턱뼈’로 필리스티아인들을 쳐부수게 될 일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네를 묶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 넘기려고 내려왔네.”(판관 15,12) 이에 자신을 죽이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삼손은 밧줄에 묶여 바위틈을 빠져나와 ‘르히’로 끌려갔습니다.

 

묶여오는 삼손을 본 필리스티아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을 때 주님의 영이 삼손에게 들이닥쳤습니다. 삼손의 팔을 동여맨 밧줄들이 녹아내렸고, 자유로워진 삼손은 근처에 있던 싱싱한 당나귀 턱뼈를 잡고 휘둘러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압박하던 필리스티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 시작되었습니다.

 

 

들릴라의 배신과 삼손의 마지막 복수

 

시간이 흘러 삼손은 고향인 초르아 근처의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필리스티아 제후들은 들릴라에게 가서 ‘삼손의 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어떻게 하면 그를 꼼짝 못 하게 잡을 수 있는지’를 알아주면 큰돈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를 몇 번이나 속였지만 날마다 들볶고 조르는 바람에 지겨워서 죽을 지경이 되어 결국 자기 속을 다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내 머리는 면도칼을 대어 본 적이 없소. 나는 모태에서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기 때문이오. 내 머리털을 깎아 버리면 내 힘이 빠져나가 버릴 것이오. 그러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처럼 된다오.”(판관 16,17)

 

들릴라는 나지르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던 삼손의 고백을 재물의 유혹 앞에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힘을 잃어버린 삼손은 필리스티아인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삼손의 눈을 후벼낸 다음, 일찍이 삼손이 그 성문의 문짝과 양쪽 문설주를 빗장째 뽑아갔던 ‘가자’로 끌고 내려갔습니다. 그곳 감옥에서 삼손은 청동 사슬에 묶여 연자매를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그의 깎인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이 모여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흥이 고조된 그들은 급기야 삼손을 불러내어 조롱하였습니다. 포박된 채로 기둥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삼손은 하느님께 절규하였습니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 이 한번으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저의 두 눈에 대한 복수를 하게 해 주십시오. …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죽게 해 주십시오.”(판관 16, 28-30) 그가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내자 건물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삼손은 모여있던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판관기는 삼손의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사는 동안에 죽인 사람보다 더 많았다.”(판관 16,30) 삼손이 필리스티아인들의 시대에 판관으로 일한 기간은 20년 동안이었습니다.

 

들릴라가 잠이든 삼손의 머리털을 잘라냈을 때 삼손은 허약해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남은 힘마저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필리스타인들이 잡으러 오자 잠에서 깨어난 삼손은 “지난번처럼 밖으로 나가 몸을 빼낼 수 있겠지” 생각하였지만 그는 이미 힘센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번처럼’은 늘 우리에게 보장된 말이 아님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우리에게 ‘어제처럼’ 또는 ‘저번처럼’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니,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늘 깨어 사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싶습니다.

 

판관기는 이렇게 가련해진 삼손을 가리켜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 여기서 ‘떠나다’라는 히브리 말은 힘이 ‘빠져나가다’와 같은 동사로 사용됩니다. ‘하느님께서 떠나심’과 ‘힘이 빠져나감’은 같은 맥락의 말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삼손을 떠나시니 그가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판관기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나를 먼저 떠나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을 계속 떠나가면 하느님도 어쩔 수 없이 나를 떠나실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하느님께 버림을 받게 된 나는 모든 힘을 잃고 지쳐버리고 말지 않을까요? 결국 나에게 필요한 것은 ‘끝까지 하느님만은 놓치지 않는 노력’, ‘어떻게 해서든 그분 곁에 머물려는 마음’, ‘조금이라도 더 하느님 가까이 나아가려는 열정’ 등의 자세 아닐까요? 지칠대로 지쳐버린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이 무너져도 하느님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 바로 그것이라는 말입니다.

 

‘톰 존스’(Tom Jones)가 불러 크게 히트한 ‘딜라일라’(Delilah)라는 팝송 얘기를 잠깐 할까 합니다. 제가 참 좋아한 노래인데 나중에 가사 내용을 알고 그 끔찍함에 크게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눈 자신의 애인을 칼로 찔러 죽인다는 끔찍한 내용의 노래였다니요! 이 노래 속의 여자의 이름 딜라일라는 삼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들릴라와의 유사성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나의 여인, 그녀가 나를 배신할 때 난 그걸 지켜보며 제 정신이 아니었지. 나의 딜라일라, 어찌하여 딜라일라여!”라고 외치는 톰 존스에게서 들릴라를 향한 삼손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하지 않나요? 노랫말 중에 “그녀는 내게 어울리지 않은 걸 알 수 있었지만 난 노예처럼 그녀에게 빠져버렸고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었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들릴라에게 빠져버렸던 삼손의 울분에 찬 정신상태를 당신 계획을 위해 이용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인생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나의 분노, 나의 슬픔, 나의 울분, 나의 우울함, 이런 것들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나 자신의 지난 삶의 흔적을 돌아보며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헤아릴 수 있는 은혜를 구해보면 어떨까요?

 

다른 한편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사랑하는 이에게 빠져 그의 노예가 되는 행위는 전혀 예기치 못한 파멸의 시작일 수 있음도 생각하게 됩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내가 자유를 점점 더 잃어버리고 그에 종속된다면 그건 잘못된 사랑일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이니까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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