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되라] 하느님의 ’남다른‘ 백성 : 세 번째 이야기, 가나안 문화에 젖어버린 백성 여호수아는 광야의 2세대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던 그들에게 정착할 땅이 생기고 집이 생겼다. 참으로 낯설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자란 2세대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착 생활이란 농경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농사짓는 법을 몰랐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배워야 했다. 문제는 이러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농사짓는 데에 날씨, 특히 비는 필수적인 요소다. 비가 없으면 그것은 곧 흉작으로 연결된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를 주관하는 신이 바알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비와 바람의 신인 바알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 비가 잘 내리게 하는 비결이며, 이것이 곧 풍작으로 이어지리라 믿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농사를 잘 짓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도, 도구도 아니었다. 바알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먹고 살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우게 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할 백성들에게 우상이 들어온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 세상과는 ‘구별되어’ 살아가야 할 이 백성들에게 ‘세속’의 것들이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한다. 갓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세대들, 하느님의 말씀으로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단련 받은 이 세대들은 그렇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며 백성들은 변해간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그들의 마음을 판관기는 잘 보여준다. 백성들은 선택적으로 신을 모셨다. 선택적이라는 말은 여러 신들을 두고, 그때 그때 필요한 신들을 불렀다는 뜻이다. 신들마다 나름의 기능(?)이 있었다. 야훼 하느님은 만군의 신이요, 전쟁의 신이었다. 전쟁이 잦았던 때에 하느님은 백성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이었다. 하지만 땅이 생기고 농경 생활이 시작되니 이제는 다른 신이 필요했다. 풍요와 다산의 신, 곡식도 많이 거두게 하고 가축들도 많이 낳게 해줄 신이다. 주변 민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신의 이름이 바알이라고 했다. 어느새 백성들은 바알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전쟁의 신보다 필요한 것은 풍요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일이겠는가? 하느님보다 재물을 택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은가? 예언자들은 하느님 한 분만을 섬겨야 한다고 수없이 호소했지만, 백성들은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때에, 자기에게 필요한 신만을 찾을 뿐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가나안 사람이 되어 버렸다. 다른 민족들과 어울려 ‘세속화’되어 버렸다. 그들은 어느새 가나안 사람처럼 생각하고, 가나안 사람들이 찾는 것을 찾으며,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자기 아들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하고, 점괘와 마술을 이용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는 일에 자신들을 팔아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다.”(2열왕 17,17) 자기 아들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한다는 말은, 몰록이라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자기의 갓난아기들을 불 속에 던져 제물로 바친다는 말이다. 이것이 세속화된 백성들의 결말이다. 백성들뿐인가? 아하즈, 므나쎄 등 왕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랬다. 왕들마저 자신의 아기들을 불 속에 던져 인신 제사를 바쳤다. 그들은 더 이상 거룩한 백성이 아니었다. 이들을 이제 어찌해야 할까. 이들의 결말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여호수아는 이미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계약을 너희가 어기고 다른 신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면, 주님의 분노가 너희에게 타올라, 너희는 주님께서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바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여호 23,16) 그곳은 약속의 땅이었지만, 거룩하지 못한 이들이 차지할 곳이 아니었다. 이제 이들에게는 정화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2023년 11월 19일(가해)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원주주보 들빛 4면, 정남진 안드레아 신부(용소막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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