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의 용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1)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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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기 | 작성일2019-01-03 | 조회수3,009 | 추천수0 | 신고 |
구속에 관하여 여러 의견을 제시되고 있읍니다만, 집중된 토론을 하기에는 본질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 같아, 일단 정리하는 의미에서 제가 우리나라 어느 정부 기관지에 "원죄는 이미 용서되었는가, 아니면 유전되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구속/공동구속에 관해 기고한 바 있는 기고문의 내용을 축약하여 올리고자 합니다. 우선 구속/공동구속에 관한 기본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한 다음 토론을 하는 것이 주제에 집중하기에 좋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글의 순서는 1.원죄의 구성/2.원죄+본죄와 구속/3.구속과 믿음 순으로 정리하겠습니다. 1. 원죄의 구성
사도 바오로는 신약 성경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로마서)에서, 아담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한 모든 사람이 아담처럼 죄를 지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5,12ㄴ).”(영문: Therefore, just as through one person sin entered the world, and through sin, death, and thus death came to all, inasmuch as all sinned.-New American bible)
주석 성경은 또한, 가톨릭교회 교부들 중에, 특히 라틴계 교부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문제에 대해 아담이 죄를 지은 그 행위 안에 모든 인간이 신비로운 방식으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En Adán todos hombres son pecadores)는 식으로까지 번역되어 있다(주석성경, 신약, 571쪽 각주 14번 ㈎항 참조). 이러한 번역은 아담의 범죄와 각 사람 개인의 죄 사이의 연대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바오로는 로마서(5,12)를 기록할 때, 이 연대성의 정확한 성격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주석 성경에는 또, “바오로에게든, 그의 동시대 사람에게든, 아담은 역사적 개인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든 인류를 그 안에 내포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유로 바오로는 아담을 그리스도의 예형(豫型)으로 보는 것이다." 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아담의 죄가 후손인 인간들에게 유전되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아담의 범죄에 함께 참여한, 공동 범죄행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아담과 함께 죄를 지었으며, 아담과 함께 죽음에 이르렀고, 아담과 함께 심판을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출생의 시간표에 따라 그 출생 시기만 달리할 뿐, 모두 하나로 연대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히브2,11-15). 이 사실은 인류 출생의 엄청난 비밀이 아닐 수 없다. 이어서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은 어떤가? 같은 로마서에서,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죽음에서 해방되어 생명을 얻었다는 증언이다. 그러면 앞 문장의 “모든 사람”과 뒤 문장의 “모든 사람”은 같은 사람들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들인가? 또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대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다음 절에서는 “모든 사람” 대신에 “많은 이”로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답은 단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있는 분은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는 하느님 단 한 분 밖에 없고, 하느님께서 아담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주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구절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요한복음에는,“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요한6,37.39.44; 10,29; 17,2.9.12.24; 17,6 참조)” 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다. 이러한 신비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속량을 위해 곧 죄의 용서를 위해 그들을 죄악의 나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동시에 그분께로 옮겨주어, 인류 구속 사업을 성취하도록 준비한 거룩한 위업이다(콜로1,13-14 참조). (이상 졸저, '공동구속' 13-18쪽에서 인용하였음)
2. 원죄와 구속(救贖)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친인 마리아의 태중에 강생하였고(마르1,15) , 또한 하느님은 '때가 차자' 우리 인간을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어 당신 아드님의 나라로(예수 그리스도께) 옮겨주었다(에페1,10; 콜로1,13). 결국 같은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태중에, 그리고 우리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옮겨짐으로써 역사적인 이중의 잉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류 생명의 크나큰 비밀이며 신비이다. 우리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옮겨져, 그분의 인성 안에서 살게 됨으로써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肢體) 를 이루게 되었고(1코린12,27; 히브2,13-15), 인간의 죄들이 자연스럽게 예수께로 전가 되었다(이사53,6).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지체를 이룬 인간들의 죄와 고통과 죽음을 그분의 성혈로 씻어(에페1,7; 1코린1,30; 히브10,22), 인간에게 하느님의 의로움과 영원한 생명을 부여해 주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구속사업의 기본 개념이다.
그런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에는 인간이 예수에 대한 믿음(신앙)이 아직 없을 때였으니(1코린1,30), 하느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만이 존재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 안에 살고 있던 모든 영혼의 원죄 + 본죄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을 통해 용서해 주었고(로마3,24; 에페1,7 참조), 예수의 죽음을 통해 인류가 받아야 할 죄벌까지도 예수가 대신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속죄의 제물이 된 것이다(로마3,25; 8,3).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친인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시점부터 십자가에서 처형 당할 때까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지속적인 속량(Redemption)을 말한다(로마3,23-24). 즉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서 인간의 죄를 처단하고(로마8,3ㄴ; 갈라3,13; 2코린5,21) 그들을 의롭게 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피로 이루어진 속량(에페1,7)을 구속의 육적 개념(quasi-physical conception)이라 부른다. 그런데 예수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하느님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Mechanism 이 달라진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준다(로마4,22-25; 갈라2,16ㄴ). 또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 주로 믿음으로써, 그 구속의 효과가 믿는 이들에게 미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갈라2,16ㄴ). 이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원리이다. 이것을 육적개념과 구분하여 구속의 지적 개념(intellectual conception)이라고 부른다. 구속의 육적개념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동안 그분의 육신 안으로 옮겨진 인간의 죄악을 직접 처단하여 인간을 의롭게 해 준 원리인 반면, 지적개념은 예수님의 돌아가신 후 그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하느님께서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는 원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속사업과 관련하여 지적 개념을 얘기할 때 개신교의 "이신칭의" 교의를 빼 놓을 수 없다. "이신칭의" 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만으로 하느님께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이라는 의미로써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가 구성한 개신교의 핵심 신앙 슬로건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율법의 행위(유다교의 할례, 음식규정, 제사규정 등)나 인간의 행위 (수고, 노력, 수행, 고행, 참선 등)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를 믿는 '인간의 믿음' 이 바탕이 된다고 주장하는 구속의 대표적인 '지적개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신칭의'가 구속에 관한 교의(Dogma)이면서도 '인간의 믿음' 만으로 구속된다는 논리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인간의 죄를 처단한 원리인 구속의 육적개념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신교 내에서도 구속에 관한 반쪽 이론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Albert Schweitzer, The Jones Hopkins University Press, p.219-225 참조). 루터의 '오직 믿음' 슬로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죄를 처단하신 구속의 기본 원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그분 자신이 인간으로 이땅에 강생하여, 그분의 성혈로 인간의 원죄 + 본죄를 용서하였고(구속의 육적개념), 그 죄들에 대한 보속으로 그분의 육신이 수난하고 죽임까지 당하였다. 예수님은 그분의 인성 안으로 옮겨진 인간의 죄와 고통과 죽음을 처단 하였으며 그분 안에서 살던 인간에게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함에도 인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위업을 구속의 원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오로지 인간의 믿음에 의해 구속이 결정된다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논리로써, 하느님의 위업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 내렸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한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다(에페1,7). 루터는 "이신칭의"가 교회를 세우고 넘어지게 하는 중요한 교리라고 자찬하였으나, 이 슬로건의 선포로 인하여 하느님의 위업을 한낱 인간의 일로 바꾸어 버렸다. 개신교회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이신칭의"를 선포한 이후 독일에서는 모든 예배와 삶이 형식주의로 흘러갔다. 이유는 신앙생활에서 실천을 배제한 이 슬로건 때문이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이러한 형식주의적인 신앙에 대한 반동으로 “경건주의 운동”이라는 새로운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이 운동을 선포한 필립 야콥 슈페너 목사에 의하면, 그 당시 루터교회는 파선 상태에 놓인 선박과 같았다고 표현한다. 이 개혁운동은 루터 사망후 정확히 130년인 1675년에 슈페너 목사가 쓴 책 <<경건한 열망, 교회개혁을 위한 제안들>>에서, 회생의 기운마저 살아진 루터교회를 재건할 목적으로 여섯 개 조항의 대안을 선포하면서 일어난 운동이다. 여섯개 조항의 대안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행동 강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안 제3항을 보면, “신앙과 하느님 지식의 본질은 교리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적인 신앙경험 속에 있다.” 는 등이다. 그리고 개혁의 대안들 중에는 루터가 "이신칭의" 의 중심에 두었던 '인간의 믿음'에 대해서는 단 마디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루터와 동일한 교단에 속한 슈페너 목사 마저도 '이신칭의' 논리에 등을 돌렸다는 증거이다. 구속의 기본개념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로써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대, 모든 인류의 죄악를 용서한 인류 구원계획의 일환이다(로마5,18). 그러나 '이신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 만을 구속한다는 지적개념의 원리로, 현실의 삶이 아닌 지적인 교리에 집착함으로써, 신앙이 형식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그래서 슈페너의 개혁 대안은 루터의 “오직 믿음” 슬로건을 배격하고, 삶을 실질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강령들로 채웠다. 이는 루터의 “이신 칭의” 가 성경의 참 진리를 반영하는 논리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고, 신학은 실천적인 훈련이어서 실천만이 신앙의 쇄락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선포한 것이다. 흔히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인간의 구속이 '실천'에 있느냐 아니면 '믿음'에 있느냐 하는 논쟁도 슈페너 목사의 "경건주의 운동"이념으로 사실상 승패가 결정난 사안이다. 왜냐하면 신앙자체가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신칭의"는 인간의 믿음만으로 구속된다는 논리이기 때문에, 이를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속은 없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런 주장이 성경에 바탕을 둔 주장인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와 같은 값싼 구원론 신앙을 갖게 된다. 가령 예수의 강생 이전에 예수를 믿지 않고 이미 세상을 떠난 그 많은 영혼들의 원죄와 본죄는 용서 받지 못하였는가? 그리고 현세와 미래에 태어날 인간으로써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지은 죄들은 용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가? 라는 문제이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 준다. 이 주제에 대해 지적개념으로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의문에 대해 매우 분명한 해답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루터가 그것을 간과하였거나 이해를 하지 못한 것 뿐이다. 성경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즉 '인간의 믿음' 만으로는 답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즉 하느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간의 믿음과는 상관 없이,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인간들의 과거 죄들을 용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세와 미래의 인류의 죄악 역시 과거의 죄들과 함께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인류를 옮겨 주었을 때에(콜로1,13-14; 이사8,18), 과거뿐 아니라 현재 및 미래에 태어날 모든 영혼을 그분께 옮겨 주었고, 예수는 자신의 지체를 이루게 된 모든 영혼들의 죄악들을 그분의 피를 통해 그 모두를 구속하였다고(에페1,7; 히브2,13-15; 1요한2,2)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1) 예수 강생 이전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는 커녕 그분을 알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들인데도, 그들의 죄악들(원죄 + 본죄 + 죄벌)을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죄들을 용서해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피로써 이루어진 속죄로 내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로마서 3장25절ㄱ-26ㄱ)" 위의 성경 구절에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믿음'을 통하여 에서 '믿음'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력(The power of redemption)을 믿은 신뢰를 의미한다. 인간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피로써 이루어진 속죄(expiation or propitiation)"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들을 당신의 피로 씻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가져다 주었다는 뜻이다(히브10,22). '이전에 지은 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강생하기 이전에 인간들이 지은 원죄 + 본죄를 포함하는 의미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피로써 인류를 구속한 구속의 육적 개념을 의미한다. 인간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이 과거 인간이 지은 죄들을 용서해 주셨다. 그리고 로마서 5,8-9에서는 우리가 아직 예수를 믿지 않던 죄인이었을 때에도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에 대한 죄벌을 보속(Satisfaction) 하기 위해 돌아가셨다(속죄의 제물이 되었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2) 또한 구속의 육적 개념으로 보아, 현세와 미래에 태어나는 사람들로써 비록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 지라도 과거 아담 안에서 범한 그들의 죄악들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용서되었다고 보는 것이 성격적인 해석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운 분이시며 또 예수님의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분임을 드러내십니다.(로마3,26ㄴ 참조)" (밑줄친 말은 우리말 성경에 '예수님을 믿는 이를..."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이는 '예수님의 믿음' 의 오역이다. 이 글의 3. '구속과 믿음'에 상세히 설명되고 있으니 참조 바람.)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 나라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 주었을 때에도(콜로1,13), 그리고 죄들을 용서해 주었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었다(2코린5,15; 1요한2,2 참조). 이 때에 하느님은 인간의 믿음을 보아 그렇게 한 일이 결코 아니다. 즉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을 선별하여 그들이 범한 과거의 죄악들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그분의 은총으로 모든 인류를 거저 구속한 것이다(로마3,24). 이말은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때, 무슨 조건을 붙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자의적인 해석으로 받아 들이거나(2코린6,1) 인간의 믿음 때문에 구속해 주셨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갈라2,21).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저 구속되었다는 사실이 바오로가 말하는 구속의 핵심 진리이다. 따라서 인간의 "믿음 만으로 구속되었다."는 지적 개념의 논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무시한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이다. 다만 종말에 그들이 최후의 심판에서 구제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고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으니(요한3,18-19),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의 심판에서 구제를 받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인 해석이다 (redeemed, but not will be saved). 구속은 집단적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불문하고 성취되었으나, 반면 종말에 있을 심판에서는 인간의 행실을 보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아, 심판자인 그분의 결정에 따라 개인적으로 최종 구원(성화)이 정해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마태16,27; 묵시20,12). 구속은 하느님의 인간 구원계획의 일환으로, 인간의 믿음이 있기 훨씬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그분을 통하여 구속하기로 계획한 하느님의 사업이다(창세3,15). 그런데 지적 개념에서, 인간이 예수님을 믿으니 하느님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였다고 하는 구절을 놓고, 마치 인간의 믿음이 하느님의 구속사업에 선행(先行)하는 것처럼 해석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구속은 인간의 믿음이 있기 전에 이미 성취되었고, 다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인간들이 구속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느님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준다는 의미이다(로마4,5; 4,22-25).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인간의 믿음보다 먼저이기 때문에 그분의 공로를 찬양하는 것이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공로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 예수를 믿으면 구원된다(로마10,9; 사도16,31) 는 말과는 다른 개념이다). '인간의 믿음' 때문에 구속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인간의 수고, 노력 등) 를 내세우는 발상이다. 그러한 주장은 대표적인 신앙의 왜곡이다. 인간의 공로로 구속된 것이 아니니 인간의 믿음을 내 세울 것이 전혀 없다. 인간의 믿음이 있기 전에 하느님은 "은총으로 인간을 거저 구속하셨다.(로마3,24; 에페1.7)" 그런데 루터는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었다.(로마4,3)”고 하는 구절을 놓고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먼저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를 구속한 것이 아니냐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의 본 뜻은 아브라함의 공로로 구속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한 것은 구속의 지적개념과 동일한 개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로마4,23). 더불어 주석성경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이 구절은 창세15,6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믿음'이 ”의로움“을 받아 낼 수 있는 무슨 법적 공로로 간주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문맥을 살펴보면, 겉으로는 법적인 용어가 쓰이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는 한 신앙인을 하느님께서 지고한 방식으로 받아들여 주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 진다.(주석 성경, 신약, 567쪽 참조)”
아래에 계속.....(한글이 좀 이상하네요. 칸이 잘 안좁혀집니다....)
일찍이 독일 태생으로 프랑스 국적의 의사이면서 개신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A. 슈바이처 박사는 바오로 사상을 깊이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으로, 소위 종교개혁자들이 바오로의 서간문(로마서, 갈라티아서, 필립비서 등)을 기초로 ‘이신 칭의’ 논리를 구성하였으나, 그들이 바오로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만든 반쪽 이론이라며, ‘오직 믿음’ 을 비판한 최초의 “바오로에 관한 새 관점”논자로 꼽히고 있다. 그는 바오로 신학의 핵심 사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로 정의되는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Mysticism)>>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그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루터의 '이신칭의' 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바오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에(Being-in-Christ)라는 ‘그리스도 신비주의’ 구속론이 주(主) 분화구(main crater)이고, ‘칭의’는 변두리에서 형성된 보조 분화구(a subsidiary crater)이다”(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Albert Schweitzer, The Jones Hopkins University Press, p.225 참조). “바오로의 구속론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개념의 독립된 표상으로써, 구속에 있어서 육적 개념(quasi-physical conception)과 지적 개념(intellectual conception)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지금까지 바오로의 연구는 일방적으로 후자의 지적 개념에만 국한 시켜서 해석되어 왔다. “구속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저(freely)이루어 졌음에도(로마3,24), 소위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믿음'에 의해 구속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수님의 구속위업을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인위적(人爲的)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 버렸다.(같은 책 pp.219-220 참조)” ‘종말론적인 긴장’을 바오로 신학에서 제거해 버릴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바로 믿음만을 부르짖는 신앙이고, 종말론적 대망에서 사랑을 전제로 탄생한 바오로의 윤리사상을 간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사도 바울의 신비주의, 알베르트 슈바이쳐, 한들출판사, 595쪽 참조).
『공동구속』, 하느님의 구속사업에 성모 마리아의 필연적인 참여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죄악을 속량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로마3,25). 실제로 예수의 몸으로 인간이 구속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은 바로 모친 성모 마리아로부터 받은 몸이다. 그래서 구속에서 성모님의 참여는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속은 하느님이 죄인인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 세우신 구원계획의 두 번째로 발하신 피아트(Fiat)이며, 이 구속에 성모 마리아가 필연적이며 적극적인 참여를 한 것이다. 이 신비가 공동구속의 핵심 원리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없다(사도4,12). 그러나 구속은 예수님과 그분의 모친 성모 마리아의 필연적이 협력으로 성취한 위업이다. 그래서 '공동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절대로 『공동 구속자』가 될 수 없다고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스위스 개혁교회 목사) 목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가톨릭교회의 마리아론은 계시 신비에 대한 도전이며, 나아가 이단이라고 단정 지울 정도로 『공동 구속』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반박하였다. 그가 언급하는 요점은 인간 마리아가 어떻게 하느님과 대등하게 하느님의 사업에 “협력”을 하고, 하느님인 예수와 공동으로 사업을 펼칠 수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녀를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구원 역사 안에서 비록 상대적일지라도 독자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모든 시도는 계시 신비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이 신비를 하느님에게만이 아니라, 추가로 인간과 그 수용성에 의존하게 만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마리아는 주님의 여종이기 때문에, 기념될 만한 말을 한다. ‘당신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그리하여 그녀는 ‘주님의 어머니”가 된다. 이 구절을 기초로 하여 에페소 공의회의 '테오 토코스'(하느님을 낳으신 분)가 성경적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리아가 모든 은총의 중재자일 것인가? 『공동 구속자(co-Redemptrix)』일 것인가? 천상의 모후(Regina coeli)일 것인가? 어째서 마리아의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 Mihi).’라는 말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모성 발휘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상황들이 구축될 수 있는가?”
라고 강경하게 저항하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네”라는 대답이 예수님의 육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냐 아니면 하느님의 은총 선포가 마리아의 “네”를 가능하게 한 것이냐’하며 그는,
“정확히 말하면 신앙은 모든 상호 교환성을 포기하고, 유일하게 의지해야 할 중재자를 인정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계시와 화해는 다시 역전될 수 없으며 분리될 수 없는 독점적인 하느님의 업적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공동 구속자』의 자격을 놓고 또 다른 개신교 신학자인 장 보스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 하였다.
“협력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에 보충적인 인간의 평행 관계를 설정하려고 시도하는 위업의 근원인 듯 보인다. 공로란 모든 이에게 충분한 은총의 열매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하는 완벽한 선물에 대한 인간의 상응하는 응답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는, “나무와 톱”이라는 비유를 들어 이들 신학자들과는 다르게 마리아의 『공동 구속자』로서의 역할을 옹호하는 의견을 내놓은 바가 있다.
“톱은 나무쪽에서 보면 한낱 수동적인 행위밖에 하지 않고 주체적인 협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자르는 과정에서 보면 톱은 자기의 힘으로 나무꾼과 협력하는 일을 하고 있다.”
라고 하며 성경(코린토1서)에서 바오로가 기록한 것 처럼, 마리아의 구속 협력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해 “확실히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이다(1코린3,9 참조).”라고 말함으로써 바오로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공동 구속』에 성모 마리아의 필연적인 참여는 성경에 “말씀이 사람이 되심(요한1,14)”과 “예수님의 육신 안에서 죄를 처단하심(로마8,3ㄴ)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이 땅에 강생한 이유는 그 육신 안에서 인간의 죄를 처단하시기 위해서(구속하기 위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4세기 아타나시우스 성인도 말씀 육화의 첫 번째 근거로 “우리의 죄가 그분을 내려오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구속의 기본 원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의 인성 안에서 예수의 피로 인간의 죄를 없애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 일이다(에페1,7; 1코린1,30 참조). 예수의 외부 상처에서 흘린 피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인간의 죄를 씻었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살던 인간은 그분의 생명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받은 원리이다. 그런데 예수의 피는 원죄없이 태어나신 성모 마리아가 예수께 드린 피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의 참여는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모님의 협력이 없었다면, 인간이 구속은 불가능하였다고 예수님이 증언하신다(1코린3,9; 천상의책.제18권-13,16). 다음에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예수와 우리 인간과의 협력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필리3,10).”,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2코린1,5).”,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1,4).”
『공동 구속』에 강한 의혹을 제기한 앞서 예를 든 두 신학자의 사상의 근저에는 마르틴 루터와는 달리 “인간과 신은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인간 마리아가 하느님께 협력하는 일, 하느님 사업에 참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담겨져 있다. 아마도 이들 개신교 신학자들은 구원(Salvation)과 구속(Redemption)을 의미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마리아의 『공동 구속』 임무가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이사7,14)”에 있다는 진리를 간과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 가능한 일이다. 구약 성경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께 택하심을 받은 바 있다(예레1,5 참조).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예수는 우리 인간을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도록 부르셨다고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주시어, (…)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1,3-4)” <구속/공동구속(2)에서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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