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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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9-02-13 | 조회수3,826 | 추천수0 | 신고 |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
구약 성경 여러 곳에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예언의 약속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복음이라고 하는 창세기 3장 15절의 내용입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에서는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참조) 라는 하느님의 예언의 약속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이사 11,1 참조) 이 밖에도 성경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예언의 약속들이 많이 있으나 이제 마지막으로 구약성경의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말라 3,23-24 참조) 그리고 바로 신약성경인 마태오 복음서가 등장하게 되는데 마태오 복음서를 시작하는 대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열고 있습니다. 왜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을 하겠는지요? 그 이유는 바로 구약성경의 곳곳에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누구의 후손을 통해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느냐 하면, 바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셨던 그 내용 고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족보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소개해 드리고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에 관해서 나눔을 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구약성경에서 누군가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는 것은 치욕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에스테르기를 필사했는데 거기에서 유다인들을 몰살시키려고 했던 하만이 바로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나중에 구약성경을 읽으시면서 눈여겨 보시면 모세 오경에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아무튼 그랬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에서 살아갈 때에 구리 뱀 사건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21장 4절에서 9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백성들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이 조금해지고 많이 힘들었겠지요. 그래서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셔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습니다. 그대에 모세가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너무 힘들고 고달플 때에 뱀의 유혹(창세기에 나오는 그 뱀의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들이 사실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모세를 통해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아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곧 뱀의 유혹에 빠져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 모습이 아무튼 십자가의 예형이라고 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죄를 용서받는 속죄 예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여러 예식 등은 주로 모세 오경 중에서 레위기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레위기에 보면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를 용서받으려면,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속죄 제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제물은 흠 없는 것이어야 하고 자신이 끌고 온 제물에 자신의 손을 얹으면 그 사람의 죄가 그 제물로 옮겨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죄지은 그 사람은 그 제물을 스스로 죽여야 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죄를 용서받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부터 제가 히브리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에 대해서 나눔을 해 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전체를 읽어보시는 것이 아주 큰 도움이 되시는데 제가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속죄 제물은 대사제가 바칠 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유다지파에서 태어나신 분이신데 어떻게 레위지파 그것도 아론의 지파만이 사제 지파가 되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대사제가 되실 수 있으신지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 잘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이 대목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튼 멜키체덱은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에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마중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준 사제입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영원한 대사제로 성경에서 불리우고 있는 분입니다. 대충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아무튼 예수님은 그렇게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대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우리들의 죄가 용서되려면 대속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 제물은 흠이 없이 깨끗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하느님 앞에서 용서받으려면 그렇게 흠 없는 대속 제물을 끌고 와서 스스로 죽여서 대사제에게 바치는 그런 과정이 필요했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그 단 한 번의 대속 제물이 되어 주신 그 사건으로 온 세상은 다시는 구약시대처럼 동물을 잡아 바치는 대속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 조건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개념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참조)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하시면 조금 쉽게 다가오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나 군중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아무런 반항도 없이 돌아가실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따라다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제자들과 군중들은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 그러니까 힘 있는 정치적인 왕으로 로마를 무찔러 주실 수 있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믿고 따랐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정치적인 힘으로 자신들에게 평화를 선물해 주신 분으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고 그러한 기적들을 보아온 사람들은 분명 예수님이 어떤 기적을 통해서 자신들의 바람대로 해 주실 분이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결과는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에 예언되어 있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으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에는 하느님의 종의 노래가 네 편이 있습니다. 한 번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그 모습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모습이 바로 이사야 예언서에 예언되어 있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 그 자체였다는 것을 그제서야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하는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는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는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1-12 참조) 위의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종의 노래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든 부분이 다 중요하지만 더욱 눈여겨 보시고 묵상해 보실 구절들이지요.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창세기에서 보면 인간의 죄가 꽉 차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고 판단하셨을 때에는 홍수로 싹 쓸어버리셨습니다. 의로운 노아와 그의 가족만 남겨두시고요. 그런데 노아가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칠 때에 노아와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다시는 노아 때처럼 물로 그렇게 사람을 쓸어버리지 않겠다고요. 그리고 무지개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무튼 그 이후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는 했지만 그건 일부 지역적인 벌을 받은 것이고 인류 전체를 멸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떻게든 죄로 물들어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무척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애쓰시는 그 간절한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면 성경을 올바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죽을 힘을 다해서 사람들이 죄에서 돌아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별별 애를 다 쓰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이 세상에 죄가 꽉 차게 되었을 때에, 성경은 그 부분을 "때가 차서"라고 표현하셨는데 아무튼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카드를 내놓으신 것이 바로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마태 21,37-40 참조)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하느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는 예언이 성취되어 오신 분이시고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속 제물이 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대속 제물이 되실 수 있는가 이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대속 제물을 바칠 때에 그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 누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흠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흠 없으신 분은 하느님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려면 흠 없는 분, 곧 하느님 당신이 제물이 되어야만 가능했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세례자 요한이 잘 알았기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지웠다는 점입니다. 침뱉고 조롱하고 때리고 하면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다 뒤집에 씌우지 않았는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쓰시고 십자가에 죄인으로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속 제물이 되셨다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 9,11-14 참조) 히브리서에서 알려 주시는 내용 그대로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는 영원한 효력을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예수님을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용서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징표가 바로 십자가의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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