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한나의 서원 실로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옛 성읍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 사무엘이 어린 시절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성소가 있던 곳입니다(1사무 3장). 그 성소는 어머니 한나가 불임으로 고통받다 주님께 기도하고 서원해 사무엘을 얻은 곳이기도 합니다. 한나는 에프라임 땅에 살던 엘카나의 첫째 부인으로 암시되는데요(1,2), 그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둘째 부인으로 프닌나가 들어온 듯합니다. 한나와 프닌나의 이런 관계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가르, 야곱의 아내 라헬과 레아를 떠올려줍니다. 사라와 라헬의 불임으로 남편이 다른 여인에게서 먼저 아이를 얻고 그로 인해 여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점이 공통적입니다. 한나는 불임과 프닌나의 조롱으로 마음고생하다 실로 성소에서 서원을 하는데(1,11), 서원의 내용이 역설적입니다. 아이를 얻으면 그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이를 갖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한 셈이니, 당시 한나의 신세가 얼마나 암담했는지 말해줍니다. 이 과정에서 한나의 성품도 드러납니다. 불임을 조롱하며 괴롭히는 프닌나에게(6절) 앙갚음하거나 남편의 사랑을 과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에게 받은 고통을 상대에게 돌려주지 않고, 홀로 하느님 앞에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7.10절). 아마도 한나는, 프닌나가 괴롭히는 원인이 불임인 자신에게 남편이 과분한 대우를 해준다는 데에 있음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한나를 지극히 사랑한 남편의 처사는 1사무 1,5에서 엿보입니다: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여기서 “한몫”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실 ‘두 몫’으로 해석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남편 엘카나가 측은히 여기며 사랑한 한나에게 정해진 몫의 두 배를 주는 일이 되풀이되자 프닌나가 분노한 것입니다(5-7절). 그러나 한나는 프닌나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나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원하였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너무 간절하고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기에 자신이 그토록 바란 아이를 하느님께 내어놓겠다는 서원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한나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셨다는 사실은 실로의 사제 엘리의 말(17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의 사연에 대해 알지 못했던 엘리가 축복해주자, 그는 음식을 먹었고 얼굴도 전처럼 어둡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18절). 드디어 한나는 소원대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사무엘이 젖을 뗄 무렵에는 아들을 성소로 데려가 자신의 서원을 지켰습니다(1,24). 세 살 남짓의 사무엘이 성소에 남겨져 사제 엘리의 손에서 자라게 된 건, 성전에 홀로 남았던 어린 예수님이 자신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 루카 2,49을 상기시켜줍니다. 또한 한나가 부른 기쁨의 노래(2,1-10)는 이후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루카 1,46-55)에도 인용됩니다. 지금의 실로는 유적으로만 남았지만, 이곳에서는 상대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매달리며 노력한 끝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를 낳은 한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구약학과에서 공부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님성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저서로는 <에제키엘서>와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가 있다. [2023년 12월 31일(나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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