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하느님의 말씀] 성경, 세상과 인간을 비추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말씀 태초에 하느님께서 온 세상과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큰 뱀들, 소위 고대 신화 속의 용 또는 레비아탄에 비길 수 있는 존재들 또한 있었습니다(창세 1,21). 그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분명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십니다(창세 1,25). 그런데 하느님의 이 말씀은 성경의 또 다른 이야기에서 일련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 및 지혜 전통에 속하는 이야기들은 그 큰 뱀들을 적대하시고 패퇴시키시는 하느님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사 27,1; 51,9; 에제 29,3; 32,2; 욥 7,12; 시편 74,13). 사실, 이보다 더 큰 모순이 성경 내에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뒤 ‘참으로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과 함께 하늘과 땅의 질서를 세우십니다(창세 2,1). 이어서 거룩한 시간을 세우시며 당신의 창조를 완성하십니다(창세 2,2-4ㄱ). 이렇듯, 아무 죄 없이, 은총 속에 태어난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게 됩니다. 뱀이라는 유혹자의 손에 이끌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창세 3장).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대적할 존재를 창조하시고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왜 인간은 은총을 누리면서도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까? 어찌하여 지고선(至高善)이신 분께서 악의 실존을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느님과 세상-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눔으로써 명약관화하게 해결되는 의문입니까? 아니면 설마 몇몇 무신론자들의 푸념처럼 하느님께서 악을 상대로 무력하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이 모순점들에 대해 단 하나의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이라 하겠습니다. 허나 굳이 그 열매를 따 먹지 않은 이에게도 자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모순점들을 전하는 성경의 설화적 현실이 우리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신다고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적대시되는 일들(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윤리-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기는커녕 부모 자식 간에 반목하고, 간음을 저지르고, 남의 소유를 도둑질하며,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타인을 상대로 창세기의 아담-하와이면서 동시에 뱀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네 현실에 대한 상징이 되어줍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저 모든 것이 하느님 뜻에 따라 잘 될 것이라는 추상적인 낙관주의에서 비롯된 하느님 사랑의 일원론(一元論)을 비루하게 늘어놓지 않습니다. 말씀 그 자체이신 분께서 이루시는 강생의 신비에 따라 성경은 그분께서 실제 살로 취하신 인간의 얼굴과 그 가운데 천막을 세우신 세상(요한 1,14)에 대한 대조 그림을 내놓음으로써 자기 본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 대조 그림과 우리 현실 사이의 ‘연속성 가운데 비연속성’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앞으로 1년간, 1달에 한 번 쓰일 이 칼럼은 하느님 말씀으로서 성경이 조명하는 인간 군상의 민낯과 그 민낯을 마주 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이할 것입니다. 그로써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늘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immanent), 우리와 다르신(transcendent) 하느님을 지향하기를 요청받는 존재로 조명될 것입니다. [2024년 1월 21일(나해)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조우현 십자가의 요한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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