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65) 나훔서
니네베의 멸망은 하느님의 징벌 - 기원전 7세기 중반 남 왕국 유다 요시야 임금 통치 시기에 활동한 나훔 예언자는 니네베의 멸망을 예고하고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로합니다. ‘나훔 예언자’, 18세기, 러시아 카렐 리아 키지수도원. 히브리어 ‘나훔’은 ‘나훔야’의 줄임말입니다. 우리말로 ‘야훼께서 위로하시다’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주님께서 위로하신다)도 나훔과 같은 히브리어 어근에서 변형된 이름입니다. 말뜻처럼 나훔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협하던 원수의 몰락과 주님의 승리를 예고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신앙적으로 위안과 희망을 북돋아 준 예언자입니다.(로마 15,4-5 참조) 구약 성경 제1경전인 「타낙」에는 열두 소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드야, 요나, 미카,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 하까이, 즈카르야, 말라키입니다. 성경에서 열둘(12)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이며 ‘완성’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부족의 시조입니다. 성전 사제단 역시 열두 조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구약의 소 예언자도 열둘이었고, ‘사도’라 불리는 예수님의 제자도 열두 명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새 예루살렘을 ‘12’라는 수로 표현합니다. 새 예루살렘 도성 성벽 초석과 성문도 열두 개이고, 초석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습니다.(묵시 21,12-21 참조) 아울러 교회의 신앙 고백문인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 신경도 열두 신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타낙」은 나훔서를 후기 예언서 가운데 10번째, 소예언서 가운데 7번째에 배열해 놓았습니다. 이 예언서를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은 ‘Ναουμ’으로,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Nahum’,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나훔서’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나훔은 ‘엘코스 사람’(1,1ㄴ)으로 남 왕국 유다의 요시아 임금(재위 기원전 640~609년)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스바이야·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같은 시기 활동했었죠.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나훔은 요시야 임금 통치 초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당시 근동의 패자는 아시리아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시리아, 북 왕국 이스라엘, 티로, 시돈 등을 함락할 만큼 군사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민족들은 아시리아의 수도를 ‘피의 성읍’(3,1)이라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 임금이 신하들의 음모로 죽임을 당하자 백성들이 이 반란자들을 맞서 그를 왕좌에 앉혔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습니다. 기원전 7세기 중반 요시야가 유다를 통치할 때 아시리아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됩니다. 7세기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아시리아 안에서도 왕권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급기야 기원전 612년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파괴합니다. 나훔은 니네베 함락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2,1) 이는 제2이사야의 예언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와 흡사합니다. 하지만 같은 기쁜 소식이어도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나훔서는 ‘니네베의 멸망’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정치 변화 안에서 나훔 예언서는 니네베의 멸망을, 유다를 억압하고 괴롭혀 온 아시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규정합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징벌 뒤에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은 여럿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예언자이죠. 나훔서는 총 3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먼저 서론(1,1-8)은 히브리어 자음 순서를 따라 고통받는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당할 징벌을 예고합니다. 둘째 부분(1,9─2,3)은 니네베의 최후에 대한 위협과 유다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비상한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것은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셋째 부분(2,4─3,19)은 니네베 멸망에 대한 애가로 읊어집니다. 니네베의 힘이 아무리 막강해도 마지막에는 재로 변해 흔적도 없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니네베의 멸망은 하느님의 주권과 백성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구체적인 본보기로 만드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요나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니네베를 아끼시는데 왜 나훔서에서는 하느님을 “보복하시는 분”(1,2)이라며 니네베에 불행을 선언하는 것일까요? 성경학자인 안소근 수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훔서 1,2-8의 노래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느님을 ‘분노에 더디신 분’(1,3), ‘선하신 분’(1,7)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쉽게 분노하고 마구 보복하는 분이 아니시며, 분노에 더디신 분이면서도 아시리아의 지나친 불의를 벌하지 않은 채 끝까지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은 아시리아보다 강하십니다. 아시리아가 폭행을 저지를 때, 그 아시리아를 응징하시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불의를 꺾고 정의를 세우십니다.”(「구약 종주」, 186~187쪽, 성서와 함께)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3월 2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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