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 아브라함의 믿음도 조금씩 성장했다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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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20-01-22 | 조회수2,448 | 추천수0 | 신고 |
아브라함의 믿음도 조금씩 성장했다
사실 세상 모든 만물은 주님의 섭리에 의해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어 새싹을 내고 그 새싹이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아기가 태어나 어른으로 성장하듯이, 그렇게 세상 모든 피조물은 성장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섭리 안에 신앙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성장하는 만큼 성경도 열어 깨닫게 해 주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연학 신부님의 책 제목처럼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해 안에서 우리 신앙도 성장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는데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을까? 아니 아브라함만을 부르셨을까? 하느님께서 정말 아브라함 한 사람만을 부르셨고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부르시지 않으셨을까요? 이 궁금증에 대해서 저는 로마서를 읽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의 소제목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를 읽으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셨는데 사람들의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웠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지 못하고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을 숭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심지어 나무도 신이라고, 돌도 신이라고,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신이라고 섬기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해와 달 별을 포함해서 신이 아닌 것들이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갈 때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깨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보고 신이라고 경배할 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신이 아니고 그것들을 만드신 신이 계실 것이라고 늘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보라고 말씀을 건네시고 계시고 깨어 있으면서 그러한 피조물을 만드신 신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아브라함이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아브라함은 간절히 하느님을 만나뵙기를 원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아브라함은 세상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분을 만나뵙기를 간절히 원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떠났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떠남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떠남을 통해서 점점 점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이지요. 창세기 12장부터의 이야기를 보시면 아브라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해 나가고 있는지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디까지 성장하는가?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했던 그러한 모습에서 성장해서 나중에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까지 신앙이 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성장에 아브라함의 혼자의 힘과 능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늘 보살펴 주신다는 점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고대에는 신들이 무척 많았고 또한 각 민족을 지켜주는 민족신이 각 민족마다 다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야훼 하느님께서는 그저 자신들을 지켜 주시는 민족신이라고 믿고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고대에는 그렇게 각 민족마다 그 민족을 지켜주는 신이 있다고 믿었기에 전쟁을 하면 그게 바로 신들의 전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전쟁에서 진 나라의 신은 바로 죽은 신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의 하느님 호칭 중에 '만군의 주님'이라는 호칭이 나오는데 바로 그 표현이 전쟁하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솔로몬 왕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하였고 먼저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이어 남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고 그 결과 바빌론으로 유배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신학적인 성찰이 이루어졌는데, 그때에 유다인들이 깨달은 것은 자신들을 지켜주시던 야훼 하느님께서 자신들만의 민족신이 아니고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집필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마지막 작품으로 창세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창세기 1장을 통해서 그동안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신이라고 믿고 경배했던 것들에 대해서 그것들은 신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창조주가 바로 자신들이 신으로 믿고 따랐던 야훼 하느님이시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민족신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야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할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은 뽑힌 민족이고 뽑히지 않은 민족은 개처럼 취급했다는 점이 아이러니이기도 한 부분입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한 것이 극에 달했을 때에 바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려고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든 모습을 온전히 다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계시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든 것을 다 열어 보이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든 것을 다 열어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계시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드릴 말씀은 많으나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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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믿음, 성장, 계시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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