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하늘은 어디에, 어떻게… (묵시 4장)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역사적이었고 실제적이었다. 사람의 아들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삶 곳곳에 필요한 말씀을 남겼다. 그러나 묵시 4장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우리의 시선은 요한을 따라 하늘을 향한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어좌에 앉으신 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결합되어 정돈된다. 요한이 바라본 하늘은 어떤가. 애초 하늘은 땅과 맞닿아 있지 않는, 그야말로 하늘은 땅과 철저히 구분된 ‘넘사벽’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바라본 하늘은 특별한 데가 있다. 먼저 하늘을 볼 수 있는 요한의 면모부터 남다르다. 요한에겐 어떠한 노력도, 특별한 재능도 보이지 않는다. 대개 묵시문학들의 주인공은 의인이거나 깨끗하거나 초월적 능력을 소유한 이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저 보는 것을 제 역할로 삼아 하늘의 소리와 장면을 듣고 보았다. 요한에게는 선민적 특권이 보이질 않는다. 하늘을 바라보는 요한의 시선 역시 특별하다. 하늘이 땅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땅에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요한은 본다. 땅에서 하늘을 향하는 시선은 넘사벽 하늘의 경계를 쓰러뜨린다. 유다의 묵시문학들은 하늘을 두고 땅보다 우월하고 특별한 곳으로 묘사하기 바쁘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그런 공간적 차별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어 땅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공간적 통합을 이룬다. 하늘에서 요한이 보게 될 것은 ‘이후에 나타날 것들’이다.(4,1) 묵시 1,9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네가 본 것을 책에 기록하여라.” 책에 기록된 것은 요한이 본 것과 다른 무엇이다. ‘이후에 나타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요한의 시선을 통해 나타날 그 무엇들은 실재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묵시 4장에 자주 등장하는 ‘~처럼, ~같이’라는 표현만 봐도 그렇다. 요한의 시선은 실재 존재하는 것을 해석한다. 하늘은 더이상 가까이 하지 못하는 실재가 아니라 요한의 시선 안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창조된다. 하늘의 어좌와 그 둘레의 스물 넷 원로와 네 생물이 불가능의 공간을 만들고 불가능의 공간에 모든 가능태의 독자들을 초대해 무궁한 해석의 시간들을 희망케 한다. 요한 묵시록의 하늘은 그래서 문학이고 예술이 된다. 묵시 4장이 빚어내는 예술 작품의 중심엔 어좌가 있다. 어좌가 모든 있다는 것들의 기준이다. 어좌에 앉으신 분을 하느님으로 이해하는 경우, 요한이 빚어내는 하늘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되는 세상이다. 다분히 영성적인 관점이다. 이를테면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지 묻는 객체적 질문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주체적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라는 질문은 하느님이시라면, 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으로 묘사된다. 어좌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빗대어 다른 상징으로 소개된다. 값비싼 보석이 하느님일 수는 없다. 그러나 값비싼 만큼 하느님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해석이 벽옥이고 홍옥으로 재현된다.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형언하는 순간에 하느님이 아니게 된다. 요한 묵시록 역시 구약의 전통적 표현으로 감히 규정하고 다가설 수 없는 신적 현현을 서술한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 그리고 천둥이 그것이다.(탈출 19,16-19; 시편 18,8-16) 일곱 횃불과 유리 바다 역시 그러하다. 신적 현존과 중요한 인물을 묘사할 때, 일곱 횃불과 유리바다는 자주 사용되었다.(즈카 4,2) 일곱 횃불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라고 다시 해석된다. ‘타오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세라핌이라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로 일곱 영을 또다시 해석하기도 한다. 어좌를 꾸미는 여러 상징들을 두고 초월적이어서 배타적인 하느님만을 위한 전통적 공간이 어좌라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러나…번개든 천둥이든 또한 일곱 횃불이든 그것들의 배타성(?)은 스물 넷 원로의 등장으로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스물 넷 원로는 천상의 영광을 나타내는 흰옷, 왕권을 가리키는 금관을 쓰고 있다. 원로를 가리키는 그리스말 ‘프레스뷔테로스’는 ‘나이 든 사람, 조상’이라는 뜻을 지닌다. 인간의 근원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관습적으로 천상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아니다. 천상의 자리는 스물 넷 원로가 함께함으로 인간의 근원, 인간의 본디 자리와 뒤엉킨다. 전통적 공간의 혼돈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좌 한가운데 그리고 그 둘레에 있는 네 생물 역시 구별되고 배타적인 공간 개념을 무용하게 만든다. 그리스말로 ‘자오’, 곧 ‘살아있다’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조온’은 대게 에제키엘 1장의 네 생물을 옮겨 온 것이라 여긴다. 유배의 시간,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듯 절망에 지쳐 있을 때, 에제키엘은 네 생물을 통해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는 희망을 선사한다. 네 생물은 어느 곳에 콕 박혀 있는 배타적 상징체가 아니다. 어느 곳이든 하느님이 계신다는 열림 그 자체다. 숫자 ‘4’의 묵시문학적 의미도 그렇다. 세상 전체를 가리키는 숫자 ‘4’(묵시 7,1;20,8)는 네 생물이 외치는 ‘전능하신 주 하느님’에서 제 가치의 극단을 드러낸다. ‘전능하신’이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판토크라토르’는 ‘모든 권능을 가진 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어떠한 한계나 모자람을 용인하지 않는 그야말로 감당하기 힘든 ‘모든 그 무엇’이다. 세상 모든 곳에 모든 것으로 계시는 하느님이 네 생물을 통해 독자와 소통한다. 네 생물을 또렷이 읽고 보는 순간, 시공간의 한계 속에 숨막힐 듯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 하느님을 찾아 헤매며 삶의 아픔과 슬픔을 호소하는 모든 신앙인들은 아직 결론 내지 못해 의문과 고뇌로 흘러가는 제 삶의 우주를 목도한다. 그 삶이 무엇이든, 그 삶이 어떻든, 하느님은 거기에 모든 것으로 계실 것이라는 사실. 찾아 나설 하느님이 계시는 게 아니라 이미 모든 곳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우리는 끝끝내 살아 내는 제 삶의 현실 안에서 놀라고 반갑게 만나 뵙는다. 요한의 시선을 따라 올라온 하늘은 실은 우리 모든 인간이 살고 있는, 혹은 살아 내는 삶 자체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우리 삶은 그 자체가 하늘이 된다. 더이상 바라볼 하늘은 없다. 더이상 허투루 포기하고 절망할 인생은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고뇌와 혼돈 앞에 묵시 4장은 지금 우리 삶 자체를 정확히 겨눈다. 어쨌든 살아가는 이 삶이 참으로 하늘이어서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가. 이 땅의 우리가 살아 내는 그만큼 하늘은 딱 그만큼 세상 안에 훤히 드러나고 스며든다. [월간 빛, 2024년 5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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