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하느님의 말씀] 빛이신 주님께 눈먼 이, 사도 바오로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 22,3) 열성 또는 욕망이라 불릴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 원의는 ‘보다’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쉬운 예로 당장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대상은 나의 열성 또는 욕망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원의는, ‘알아보다, 맛보다’와 같은 표현들이 드러내듯, 원하고 갈망하는 대상을 물리적으로 목격함에 머무르지 않고 그 대상과의 더 긴밀한 결속, 하나 됨을 지향합니다. 창세기 3장의 인간이 선악과나무 열매를 보며 갈망하고 먹었음은 ‘하느님과 같아지다, 하느님이 되다’라는 욕망을 표현하는 일이었지요.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구원 역사 내 인간은 하느님을 보고자,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에게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창세 1,26-28). 그러나 ‘모상’이라는 말 자체가 전제하는 바, 본연적으로 하느님과 같은 존재일 수 없는 인간에게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시선과는 다른 시선이 주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회심 사건은 그 다른 시선의 한 단면을 성경의 독자들에게 선사합니다. 바오로는 ‘늘 드러나시면서 동시에 감춰지시는’ 하느님의 빛을 봅니다. 달과 여러 별들이 태양에 견주어지는 빛을 지닐 수 없듯이, 하느님의 빛은 여러 빛물체들을 있게 하고 초월하는 근원입니다(창세 1,3). 그러나 이 빛은 신비롭고 겸손하신 하느님을 닮아, 어둠과 역설적으로 한 몸을 이룹니다. 낮이 밤에게 자리를 내줌으로써 달과 별이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을 내고 온 생명이 휴식을 취하는 창조 질서가 세워지듯이(창세 1,4-5), 하느님 빛의 감춰짐은 모든 존재가 자기 고유의 빛을 발하며 쉴 수 있는 시공간을 지탱합니다. 바오로는 토라를 위시한 창조주 하느님 말씀의 빛을 받아 열성적인 유다인이란 빛을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떤 존재보다 하느님을 담아내고자 했던 바오로의 눈에 말씀 그 자체이시자 빛 자체이신 주님(요한 1,1-4)께서 당신을 선사하십니다(사도 9,3-6). 자기의 근원 앞에서 바오로의 빛은 땅에 떨어져 힘을 잃고 어둠에 빠져듭니다(사도 9,8). 주님께서 의도하신 이 어둠은 사흘이라는 기간 동안 바오로의 빛을 새롭게 창조합니다(사도 9,9). 이로써 열성적인 유다인으로 훤히 드러나고 있던 그의 빛은 다른 존재 고유의 빛을 지탱하는 어둠을 품은 역설적인 빛, 곧 하느님의 빛을 닮게 되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주님께 눈먼 이, 바오로의 탄생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여전히 열성적인 유다인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그 빛마저도 내려놓을 줄 알게 된 바오로의 신앙고백입니다(1코린 9,20-22). 이는 참 하느님이시지만 우리 구원을 위해 참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 상에서 지극히 사랑하올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으심이란 어둠을 체험하고 수용하심으로 부활이란 빛을 성취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금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눈은 어떻게 하느님을 담아내려 합니까? 우리 모두는 창세기 3장의 아담을 닮아, 여전히 나의 빛과 시선에만 스스로를 묶으며 하느님을 보려 드는 경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어둠을 관통하며 자신의 빛과 시선을 내려놓음으로써 하느님의 빛을 마주한 바오로의 회심 사건은 우리를 위한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줍니다. 주님의 빛이 자아내는 창조적 어둠에 우리의 눈 역시 머무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2024년 5월 19일(나해) 성령 강림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조우현 십자가의 요한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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