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어린양, 공동의 몸(묵시 5,6-14) 어린양의 뿔과 눈은 낯설다. 일곱의 뿔과 일곱의 눈을 가진 어린양은 묵시문학을 위한 상징적 표현이다. 묵시문학이 본디 그렇다. 묵시문학은 현실을 비틀고 상상한다. 그리고 현실의 여러 상징들 위에 다양한 선과 색을 덧입혀 새로운 형상으로 만들어 낸다. 어린양이 그렇다. 마치 탈인상주의의 고흐같이…. 말이 난 김에, 고흐의 말을 떠올려 본다. 그림을 왜 그렇게 그리는가, 라는 질문에 고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림은 그림 스스로 이야기한다.” 현실을 이해하기 힘든 기하학적 형태로 왜곡하여 표현한 고흐의 그림은 찬찬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숨어 있는 어린양의 의미는 이야기와 읽기가 만나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어린양은 뿔과 눈을 각각 일곱 개나 가지고 있다. 왜 일곱인가. 주석학자들은 완전수 ‘7’을 염두에 두고 어린양의 완전함을 강조한다. 어린양은 권능과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 그런데 말이다. 어린양은 살해된 만큼 힘이 없다. 어린양의 권능은 죽는 일과 엮여져 있고 그래서 어린양은 힘센 사자가 아니었다. 권능과 지혜의 충만함은 다르게 읽혀져야 한다. 어린양이 지닌 일곱 눈은 두 차원의 친교를 은밀하게 감추고 있다. 하나는 일곱 눈이 하느님의 일곱 영인 이유로 어린양은 하느님과의 밀접한 친교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곱 눈이 온 땅에 파견됨으로 하느님과 온 땅이 친교의 자리에 함께 머문다는 것이다. 어린양은 홀로 권능을 지닌 주인공이 아니다. 어린양은 하느님과 온 땅과의 친교 안에 ‘공동체적인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어린양은 예수만이 아니다. 어린양은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존재들이 엮여져 있는 ‘공동의 몸’을 가리키는 형상이 된다. 어린양은 두루마리를 받았다. 그렇다면 묵시 5장의 질문, 그러니까 누가 봉인을 열 수 있겠는가,의 질문은 어린양에 의해 해소된 것인가. 묵시 6장부터 어린양은 봉인을 제거할 것이고 그때 우리는 새롭게 펼쳐질 묵시적 환시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우리의 이야기는 어린양을 향한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의 찬가를 소개한다. 그 찬가는 어린양이 봉인을 뜯기에 합당한 이유를 노래하고 있다. 사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는 금대접을 가지고 있는데, ‘성도들의 기도’라고 요한 묵시록은 해석한다. 요한 묵시록 안에서 ‘성도들’은 땅 위에서 자신의 신앙 증거로 고통과 박해를 받는 이들로 묘사된다. 천상의 어좌 주위에 머무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금대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천상의 영광, 기쁨이 지상의 고통, 박해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알려 준다. 그리하여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부르는 그 노래는 어린양의 형상이 가리키는 그 ‘공동의 몸’과 길은 논리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난제(예컨대, 봉인 열기)를 해결한 승리자의 논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 하늘과 땅이 너무나 가까운 그래서 너무나 친근한 벗이 된다는 논리 말이다. 그래서일까. 노래의 대상인 어린양은 삼인칭이 아니라 이인칭 ‘너’로 호출된다.(우리말 번역은 ‘너’가 아니라 ‘주님’이라고 번역하지만, 그리스말 본문에는 ‘주님’이 없다.) ‘너’라고 어린양을 부르는 순간, 천상의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독자는 마치 카페에 앉아 단둘이 소근대는 대화의 당사자가 되어 버린다. 바로 앞에 앉은 너, 어린양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너는 충분히 봉인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네가 그토록 너를 아끼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해 희생했으니까!”, “네가 참 고마워!” 어린양은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묵시문학은 ‘모든’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네 가지 범주로 표현하는 습성을 지닌다. 모든 민족이라고 해도 충분할 터인데, 굳이 종족, 언어, 백성, 민족으로 구별하여 표현한다. 그러나…, 이 구별은 하느님 안에 ‘하나됨’을 지향한다. ‘모든’ 민족이 하느님과 하나’되는 사제의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과 하나’가 만날 수 있는 그 이유가 ‘너’의 희생 덕분이다. ‘너’의 희생을 더 정확히 살펴보기 위해, ‘속량하다’로 번역한 그리스말 동사 ‘아고라조’의 뜻을 되새겨 본다. 이 동사는 다분히 상업적 의미를 지니는데, 물건을 사거나 구입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희생을 부정적 사건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 혹은 치러야 할 대가로 이해한다.(1베드 1,18 참조) 말하자면 하느님이심에도 치러야 할 몸을 단단히 치르셨다는 것.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라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신 게 아니란 말이다. 하느님은 참된 인간으로서 바보같은 죽음을 맞닥뜨리셨고 바보같이 돌아가셨다. 그것으로 그분은 새 노래로 칭송받기에 합당하시다. 봉인을 열고자 한 것은 봉인 안에 적혀진 것을 알아차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봉인을 열 그 사람, 바로 어린양이 누군지, 그가 왜 봉인을 열기에 합당한지, 바로 그 어린양이 도대체 누군지 묻는 것이어야 했다. 묵시 5장의 끝은 수백만 수억만 천사들의 목소리와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가 하나되어 울리는 찬가로 막을 내린다. 어린양이 누군지 묻는 건, 더 이상 배타적인 인물에 대한 연구나 독특하고 초월적인 한 영웅에 대한 칭송의 차원에서 끝낼 일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곧잘 영웅화 작업으로 점철되는 경우가 많다. 세상과 다르고, 여느 인간과 다르고, 그리하여 인간의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들과 차원이 다른 하느님 예수를 그려내고 상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묵시 5장의 어린양은 모든 것을 품는다. 구별과 차별로 갈라 세우는 게 아니라 생명과 죽음, 영광과 고통, 사람과 천사 모두를 수렴하는 한 형상으로 어린양이 소개된다. 어린양에 대한 만물의 칭송은 이러하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어린양을 읽는다는 것은 태초의 창조주 하느님과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의 필연적 인연을 되새기는 일이 된다. 저멀리 아득히 찍혀 있는 한 점으로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좇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같은 넓디넓은 모든 곳에서 모든 존재 안에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우연 하나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만물의 목소리 안에 창조주 하느님과 어린양은 늘 이야기되고 읽혀진다. 모든 만물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외친다. “아멘!” [월간 빛, 2024년 7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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