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30) 하느님의 말씀에 잡혀 활동한 예레미야 예언자 -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경당 천장화 중 예레미야 예언자 중국의 두보(杜甫)는 사회풍자와 교훈적인 주제를 담아낸 시를 많이 썼다. 두보가 살던 당나라는 찬란한 문화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다. 당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정비된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강했던 당나라도 잦은 전쟁과 반란,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차츰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현종이 임금일 때 아름다운 여성 양귀비에 빠져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해 낙양 등의 큰 도시를 점령한 큰 군벌들이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왔는데, 당나라 중엽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이 가장 유명하다. 부패한 관리들은 모두 꽁무니를 뺐고 장안을 지키는 군인들도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의 굴욕을 당했다. 당시 말단 관리였던 두보도 포로가 되었다가 1년 만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도망쳐 나오다가 높은 성 위에서 수도 장안이 불타고 부서져 내려 폐허가 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보가 눈물을 흘리며 쓴 시 “國破山河在(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여전하고) 城春草木深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우거지는구나)…(후략)”는 그의 시집 「춘망」(春望)에 남아있다. 두보는 지금도 시성(詩聖)으로 불리며 애민정신에 투철하고 사람의 마음과 역사적 진실을 아주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한 시들을 많이 써서 중국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시인이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방 사제의 아들이었다. 예레미야는 20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의 마지막 왕 때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인 약 40여년간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의 활동 기간은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혹독한 시기였다. 55년간 왕들의 폭정이 계속됐고, 요시아왕의 개혁정책도 뒤이은 왕들의 실정으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나라가 부실한 상태가 되다 보니 암흑과도 같은 시대가 지속되었고,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굶주림과 고통으로 몹시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종교가 더 부패하여 일반 백성들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였다. 그는 예언자와 사제들을 정조준했다. 그들의 부패상을 모두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실 당시의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예레미야가 멸망을 예언하는 것은 지나친 경고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활동은 녹록지 않았다. 한마디로 고통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예레미야는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는 와중에 예레미야는 펑펑 울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하여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고 백성들의 미움까지 사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너무 억울했지만, 백성들의 어두운 미래가 측은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는 웃음거리, 조롱거리로 내몰려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칠 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잡혀있었다. [가톨릭신문, 2024년 7월 21일,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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