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십사만 사천(묵시 7,1-17) 땅이 무너지고 빛이 스러지고 모든 인간 계급이 아우성친 후, 묵시 7장은 너무나 조용한 기운을 서술한다. 땅의 네 바람을 붙잡은 네 천사, 해 돋는 쪽에서 올라와 그 어떤 것도 해치지 말라는 다른 한 천사, 그들 덕에 뭔가 움직이지 않는, 뭔가 숨을 고르고 침착해야만 할 것 같은, 그리하여 태풍 전야 같은 고요함에 긴장하게 된다. 네 천사, 네 모퉁이, 네 바람…, 숫자 ‘4’의 반복은 당시의 세계관, 그러니까 세상이 네모나게 생겼고(이사 11,12; 에제 7,2 참조) 네모난 세상의 네 바람은 네 천사로부터 시작한다는 유다 전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해 돋는 쪽, 곧 메시아의 방향을 가리키는 동쪽(에제 43,2; 마태 2,1-2 참조)에서 올라오는 천사는 ‘하느님의 인장’을 언급한다. ‘인장’은 소속감과 정체성을 가리키는 형상으로 하느님에게 소속되어 하느님을 통해 제 정체성을 다듬어 가는, ‘하느님의 종들’의 등장을 알린다.(에제 9,4-6 참조) 세상에 등장할 하느님의 종들을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혹은 신비스런 사상이나 황홀한 환시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침묵 속에 묶어 두자. 하느님의 종들을 설정하고 규정하는 어떤 잣대든,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을 규정하고 나아갈 전망을 제시하는 그 어떤 외침이든 꼼짝없이 침묵해야 한다.(묵시 7,2-3) 십사만 사천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십사만 사천은 무엇보다 땅의 자손들, 그러니까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열두 부족에서 나온다. 신약의 시대에 이르러 열두 부족이 갖는 유다 민족의 혈연적, 지리적 배타성은 점차 옅어져 갔고 요한 묵시록이 소개하는 열두 부족 역시 전통적 족보(창세 49; 신명 27,12-13)와는 거리가 있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전통적 하느님 백성이 다시 정리되고 편집된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단 지파가 없고 요셉의 두 아들 중 하나인 므나쎄 지파가 들어와 있다. 열두 부족의 첫 자리엔 르우벤 보다 메시아를 가리키는 ‘유다 지파’가 차지한다. 더욱이 열두 지파의 순서가 야곱의 여종이 낳은 아들들부터 시작된다. 본부인의 아들보다 첩의 아들을 우선시하는 족보를 우리 전통인들 받아들이겠는가.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대담한 것인가, 무모한 것인가. 기존의 사상과 전통을 꺾어 놓고야 마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 앞에서 우리는 습관에 젖은 과거를 잠시 내려놓게 된다. 열두 부족을 다시 보는 것은 십사만 사천의 가치를 제대로 셈하는 것이기도 하다. ‘12’라는 숫자는 하느님 백성을, ‘1,000’이라는 숫자는 충만함과 완전함을 가리킨다. 하여, 각 부족으로부터 나오는 ‘12,000’이란 숫자는 하느님 백성의 충만함, 완전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하는 것은 묵시문학적 특성으로 강조와 다짐의 의미를 배가시킨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 가득하고 완전하여 그 어떤 이도 하느님 백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말하자면 하느님 인장의 보호 아래 머무는 이들은 셈할 수 없어 무한대라는 것이다. 묵시 7,9은 이러한 십사만 사천의 숫적 의미를 적확하게 서술한다. “그 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자리엔 차별이 없기를, 제도와 관습에 얽매여 소외와 배타의 삶이 하느님 백성의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원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과 권력의 차이로 계급의 차별이 횡행하는 오늘날, 제 능력과 경험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첫째 자리를 갈구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끌려가는 딱한 인생들이 많다. 십사만 사천의 자리는 이 세상 모든 이를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 메타포다. 셈을 하고 평가를 하여 서로를 갈라놓는 분열의 세상에 포탄처럼 부딪쳐 터져 버린 요한 묵시록 저자의 간절한 사랑이다. 내가 받(고자 하)는 하느님의 인장은 다른 이가 받을 하느님의 인장을 가리키는 상징체다. 하느님 백성의 손은 다른 이, 나아가 모든 이의 손을 찾아 나서는 매개체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는 이들은 ‘남들보다 잘 사는 이들’이 아니라 ‘모든 이와 함께 잘 사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이마에 박힌 하느님의 인장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오는 이들의 ‘몸 전체’를 감싸는 희고 긴 겉옷으로 다시 소개된다.(묵시 7,9) 천상의 영광과 기쁨을 가리키는 흰 겉옷을 입은 ‘셈할 수 없는 큰 무리’는 구원의 승리와 기쁨의 상징인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이렇게 외친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이 외침은 시편 118편을 옮겨 놓은 것이라 여기며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자주 강조된다. 그러나 이 외침은 구원을 누가 주었는지를 다시 캐묻는 얘기가 아니다. 구원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해서 진부한 것이다. 이 외침은 구원을 받은 이들이 하느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화답의 찬가다. 구원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구원은 마침이 아니라 비로소 하느님과 어린양을 향한 발걸음의 시작이다. 그 발걸음을 따라가 보자면 구원 받은 이들의 정체성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13절에 이르러 원로는,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요한은 답하지 못했고 질문을 던진 원로가 결국엔 답을 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먼저 우리말 번역에서 다시 고칠 부분이 있다.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 아니라, ‘겪고 있는’ 사람들로 고쳐야 한다. ‘겪어 낸’이라고 번역된 동사 ‘에르코마이(‘오다’라는 뜻.)가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큰 환난은 지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지속적인 상황을 가리킨다. 역사비평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큰 환난을 역사적 사건의 유무로 따져 묻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한 묵시록이 쓰일 당시, 그러니까 9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힌 큰 박해가 있었는지 묻곤 한다.(물론, 제국적인 큰 박해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큰 환난의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텍스트 안에 서술된 큰 환난의 가치다. 큰 환난은 여전히 지속적이다. 아니 지속적이어야 한다. 어린양의 피로 제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희생에 대립한 행복과 기쁨의 길은 요한 묵시록에 적혀 있지 않다. 오로지 피 흘리는 어린양 예수를 향한 집요한 서술과 초대가 요한 묵시록이 닦아 놓은 길이다. 큰 환난이라는 표현은 고통과 희생의 사전적 의미를 갈아 치운다. 어린양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과 사랑의 의미를 담아 큰 환난은 아프지만, 너무 힘들지만 그럼에도 영광과 기쁨의 메타포가 된다. 큰 환난을 겪고 있는 이들은 어린양이 겪은 죽음의 길을 함께 걸으며 ‘하느님의 어좌 앞’에 서 있다.(15절) 그들이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이며 그 삶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머무는 것이기도 하다. ‘천막’과 ‘목자’의 형상은 구약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보호로 이해된다.(탈출 26,1; 29-42-45; 시편 27,5; 76,3; 이사 4,5-6; 시편 23; 이사 40,11; 에제 34 참조) 배고픔도, 목마름도, 그 어떤 열기도, 그리하여 그 어떤 눈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요한 묵시록의 서술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각인된다.(16-17절) 그러나, 하느님의 보호는 죄다 ‘미래형 동사’로 소개된다. 여전히 큰 환난을 겪고 있는 이들은 현재형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눈물을 제 삶 속에서 겨우 짊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느님을 향한 희망과 위로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2000년 전 요한 묵시록이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아직 아프고 힘들고 그래서 희망과 위로를 갈망한 요한 묵시록의 원의를 여전히 간직한다. 하느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과 현실의 ‘목마름’ 안에서도 여전히 단단하고 뜨거워서 하느님을 만나는 영광과 기쁨은 그 ‘목마름’ 안에서도 구현된다. 고통과 환난과 박해를 가리키는 어린양의 피와 천상의 영광과 기쁨을 대변하는 우리의 하얀 겉옷의 간극은 이렇게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 안에 허물어지고 메워진다. 어린양의 피에 우리의 겉옷을 빨면서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인생사 아픔과 슬픔과 불행의 극복이 아니라 그것들과의 애틋한 사투이며 어린양 예수는 백마 탄 기사(묵시 19,11-16 참조)로 그 사투에 성실히 임한다. 그것이면 우린 되었다. 누군가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 했다.(나희 덕, 「고통에게 1」)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것이 예수를 닮는 것이고, 수의를 입는 것이 희고 긴 겉옷을 제 영광과 기쁨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게 신앙이다. [월간 빛, 2024년 10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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