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다시 보기] 일관성과 융통성 성경을 번역하다 보면 늘 부딪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 번 나온 단어가 다른 곳에서 다시 나오면, 그 단어를 같은 말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고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일관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 21장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일곱 제자들이 밤샘하며 그물질을 하였지만, 헛수고를 했는데,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많은 고기를 잡았다는 대목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있고 빵도 있었다”라는 9절의 장면에서 숯불이라고 번역한 희랍어는 “안트라키아(ανθρακια)”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2번 나오는데, 또 한번은 18장 18절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입니다. 이렇게 이 단어 “안트라키아”가 나올 때마다 같은 단어로 번역하는 것은 일관성이 있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당시의 상황, 즉 호숫가인데, 가정이나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숯을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었을까? 또는 역사적인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숯이라는 것이 그 당시 그곳에도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숯불보다는 모닥불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융통성에 대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여기서 “편하다”라고 표현된 이 희랍어 단어는 “크레스토스(χρηστος)”인데 신약성경에 7번 나옵니다. 그런데 전후 문맥이나 상황에 따라 제각기 번역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루카 6,35),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로마 2,4), “나쁜 교제는 좋은 관습을 망칩니다”(1코린 15,33),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3) 이와 같이 “크레스토스”라는 단어가 형용사로는 “편하다”, “좋다”, “좋은”, “인자하시다”, 그리고 “너그럽다”로 번역되었고, 명사로 사용되었을 때는 “호의”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의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이 되긴 하지만, 그 뜻은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단어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번역이 되지만 그 뜻은 서로 통하고 있으니, 이를 융통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사족을 달자면 같은 뜻을 지닌 단어일지라도 한자 말보다는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렇게도 시도를 해 보지만 그것도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 기회에 피력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제가 번역한 우리말 성경을 희랍어로 되번역하면 얼마나 원문에 가까워질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저의 글에 대한 반응으로, 독자들이 궁금한 점이 있으면 개인카톡으로 연락해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2024년 11월 3일(나해) 연중 제31주일 가톨릭마산 8면, 황봉철 베드로 신부(성사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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