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밤새도록 최고 의회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으시고 유다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가신 예수님. 빌라도는 그가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로 고발을 당하였을 뿐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군중의 소요가 두려워 유다인들의 요구대로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라고 명령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끌고 가 기둥에 묶고 살점이 찢겨 뼈가 드러날 때까지 채찍질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매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살을 파고드는 가시들로 엮어 만든 관을 머리에 씌우며,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마르 15,18)라고 하며 조롱합니다.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습니다. 그분 앞에 거짓으로 무릎을 꿇고 절하며 조롱합니다. 군사들의 비웃음에 사람들도 함께 큰 소리로 웃으며, 예수님께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으며 모욕합니다. 며칠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그분께 온갖 칭송을 하길 마다 않던 모습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인간의 간교하고 간악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제 십자가 형틀을 메고 ‘해골 터’라는 뜻을 지닌 골고타 언덕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움푹 팬 이마 주름 사이로 피와 땀이 엉겨 붙습니다. 머리를 짓누르며 날카롭게 살을 파고드는 가시관. 그 가시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또 떨어뜨립니다. 너무나도 앙상한 예수님의 두 팔은 십자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채찍으로 찢어진 상처 위로 땀과 핏방울이 떨어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날카로운 비명만 내뱉습니다. 그렇게 골고타에 다다르신 예수님을 군사들은 형틀에 눕히고 그분의 손과 발을 못으로 박은 후,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형틀을 똑바로 세웁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사람들의 모욕과 비난보다 더 고통스러운, 아버지께마저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아려옵니다. 그렇게 비참하고 처참한 고통 중에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은 결코 억울한 죄인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들을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명하시며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처참한 죽음마저 달게 받아들이신 사랑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마르코는 어떠한 부연 설명 없이 담담히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만 묘사합니다. 마치 그곳에 우리를 초대하여 그분의 죽음을 바라보라고, 그분의 십자가 앞으로 다가와 그 극심한 고통과 죽음 너머에 숨겨진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고 느끼고 깨달으라고 우리를 초대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 죽음 앞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2024년 11월 10일(나해)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서울주보 4면, 이영제 요셉 신부(문화홍보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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