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마태오 복음 15장 '가나안 여자의 믿음' 부분에서 궁금한 것이 있어 올립니다....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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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2021-03-04 | 조회수6,126 | 추천수0 | 신고 |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셨는데 가나안 부인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강아자들도 먹는다는 말에 왜 믿음이 크다고 하신건지요....?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그런 다음 마태오 복음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애를 확인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 가나안 여인은 이민족이라는 출신의 약점을 넘어서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사에도 끈질긴 구애는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출신이나 병듦의 약점이나 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는 장점과 강함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예수님께서 갈리래아 지방에서 조금 떨어진 티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을 때 마귀들린 딸을 둔 이교인이던 가나안 여인(페니키아 여인)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교 여인이 유다인인 예수님께 소리 지른 이유는 딸이 호되게 마귀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아프지만 사랑하는 딸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달되는 장면입니다. 자신의 일이라면 염치나 체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조금은 망설였겠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의 일인지라 더 이상의 머뭇거림도 없이 소리를 지릅니다. . 이 때 예수님은 첫번째 시험으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며,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대답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여인에게서 믿음을 발견하십니다. "당신만이 제 딸을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라는 믿음입니다. . 이스라엘에서 빵은 매일 먹는 주식이기도 하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손을 씻는 도구가 되기도 하여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바로 손을 닦고 식탁 밑으로 버린 빵을 말합니다. 그 부스러기로 강아지와 거지는 굶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제자들의 행동으로 한 여인이 이교도란 이유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상식적이라면 절규하는 여인에게 "왜 소리를 지르느냐? 우리 스승님께 무엇을 바라느냐?라고 물어봤어야 하는데 제자들은 이유도 묻지 않은채 돌려보내자고 했던 것입니다. . 교회 문턱이 높아지고 본당 신부에게 다가가기 힘들어진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교우가 많은 본당일수록 그 말은 더 힘을 얻습니다. 이유를 물어보기 전에, 또 그렇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기 전에 돌려보내자고 말하는 제자들의 짧은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적지 않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 박남규 요한보스코 신부 . 1. 성령(聖靈 Holy Spirit) . 성령(聖靈, Holy Spirit)은 그리스도교의 성삼위 또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느님을 이루는 세 위격(페르소나, Hypostasis) 중 한분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지난 날 성신(聖神)이라고도 했으며, 구약성서에서는 히브리어 "루아하 코데쉬" (רוח הקודש), 신약성경에서는 코이네 그리스어 "프네우마" (πνεῦμα)이며 라틴어로는 "스피리투스 상투스" (Spiritus Sanctus)로 번역하였다. . 사도행전에 따르면,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하여 본격적인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그래서 교회력에서는 성령께서 강림하여 교회가 시작된 날을 성령강림대축일(Whit Sunday, 예수님 부활 대축일로부터 만 7주간이 되는 50일째 되는 날)로 기념한다.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고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는다. . 성령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고 고백한다. 단,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발하신다’로, 서방교회 전통에서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필리오케 문제) 발하신다’고 고백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삼위일체이신 것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의도는 같다. . 성령과 관련된 성사(Sacrament,성례전)으로는 견진성사(Confirmation, 견진예식, 견신례가 있다. 입문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의 두 번째 관문을 지나는 견진성사는 유아 세례를 받은 이들이 13세 기준으로부터 성령의 현시(現示)를 확인하는 성사인데, 이 예식에서는 이마에 기름을 바른다. 교회사적으로는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에게 새로 태어나는 영으로, 태어난 아이처럼 몸에 기름을 바르며 축복하던 예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교회에서는 성신과 함께하는 전례가 필수적이다. 구원 은총으로서 합당한 사제가 성신을 받고자 하는 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신을 모시고, 축복을 주는 전례가 성신의 은사다. 이러한 전례는 육체가 죽고 영이 사는 세례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 회복과 더불어 사도들이 이끌던 초기 그리스도교회로부터 더불어 현대에 회심으로 진화하는 생명체 사랑으로의 완덕을 향유하게 된다. . 2. 악령(惡靈) . 악령(惡靈) 또는 악귀(惡鬼)는 종교나 전승, 신화에서 초자연적 존재로서 일반적으로 심술궂은 영 또는 귀신, 잡신을 일컫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을 따르지 않는 천사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다이몬은 신에 가까운 존재 또는 신과 인간과의 중간적 존재를 의미하였다. 이것이 나중에는 인간의 수호령으로서 능력이나 성격 등 인간의 신들린 상태 또는 부분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악령·악마 또는 이교의 신을 가리키게 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인간의 심리적인 힘, 즉 자기가 지배할 수 없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는 무의식적이고 어쩔 수 없는 심리적인 힘을 데모니셰(Dämonische)라고 표현하였다. 괴테는 창작에서의 이 힘을 강조, 천재를 나타내는 데 썼다. 한편 키에르케고르는 데모니셰를 죄악감에 빠진 인간이 악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선에 대하여 품는 불안감이라고 설명하였다. . 3. 악령을 멀리하고 성령을 모시는 방안들 . 현대 사회에 있어 악령은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갖가지 물질주의, 생명경시 사조로서 유혹하고 있다. 악령은 스트레스를 조장하며 너죽고 나살자는 영벌(永罰) 바이러스를 조장하기에 식별 및 영복(永福)으로 이겨내야 할 일들이다. 이에 성령 칠은(지혜, 통달(이해), 의견, 굳셈(용기), 지식, 효경, 경외(두려움))의 씨앗과 아홉가지 열매(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수확 및 파종의 은총을 믿고 생활속의 순교(순교자: 적색순교, 성직자: 백색순교, 평신자: 녹색순교)를 통한 겸손과 섬김력의 여정과 귀로를 지나가야 할 것이다. . Whit Sunday(성령강림대축일)의 Wit Sunday(위트있는 주일)라고도 하며, 위트의 어원은 지혜(wisdom)라고 한다. 즉 성령강림대축일은 지혜의 주일로서 성령강림의 핵심은 세상에 참된 지혜를 준다는 것이다. . 슬기는 세속 사랑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귀함을 깨닫는 지혜이며 통달은 구원의 진리를 인간 지력의 한계 내에서라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의견은 성령과 악령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돕는 것이며, 지식은 믿을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게 하는 은사이다. 용기는 신앙 생활에 수반하는 장애를 극복하는 힘을 주는 것이며, 효경은 하느님께 대한 자녀적 사랑을 증진시키고, 경외심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는 은사이다. . 김수환 추기경님 어록 “배운다는 것은 지식을 얻는다기보다 삶의 지혜를 얻고 슬기로운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대신학교 졸업식. 1980.2) . 지금은 지나가는 것 사순 2주간 목요일도 지나가는 것 너죽고 나살자는 조폭도 뺑소니도 너죽고 나죽자는 부부싸움도 다 지나가는 것 . 예수님 고통의 40일도 바람처럼 물처럼 불처럼 지나가는 것 . 너살고 나살자는 공자의 삶을 원한다면 너살고 나죽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보라 그리하여 예수님 부활 대축일 50일 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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