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다시 보기] 주님의 기도에 유감: “저희가”< “저희도”
용서는 왜? 그리고 누가 먼저? 한번은 저의 친정집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아침기도를 하는데, 부친이 주님의 기도에서 어느 한 부분에서 입을 다물고 소리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외우는 순간 숨이 막히셨나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매번 그 구절에 가서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나고 이상한 표정으로 부친을 쳐다보니, 말씀이: 나는 요즘 주님의 기도를 할 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하는 이 대목이 마음에 걸려 외우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덧붙이시길: 내가 요즘 어떤 신자와 맘이 상해서, 그가 용서가 안 되는데, 이 기도문을 외우면, 결국 거짓말을 또 하는 셈이 아니냐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 6,9-15; 루카 11,2-4에 나옵니다. 우리말 번역과 희랍어로 된 주님의 기도를 견주어 봅니다. 우리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희랍어: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저희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였듯이. 보시다시피, 주문장은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이고, 그 조건문으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입니다. 그런데 이 조건문을 외우다 보면,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 잘못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인데, 왜 우리가 먼저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상대가 나에게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말입니다. 여기서 그럼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나는 먼저 누구로부터 용서를 받은 적이 없는가? 생각해 보면 분명히 있습니다, 특히 부모님으로부터, 그것도 여러 번, 또는 어떤 누구로부터. 신앙의 측면으로 보면, 먼저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려고 당신 아들의 생명까지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요한 1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예수님을 통해 먼저 받았습니다. 그 용서를 체험했으니,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도 이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본(공동번역과 200주년)에서 “저희가 용서하오니”는 우리가 먼저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이 강조되거나 앞서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왜 우리가 혹은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반발심”이 자연히 생겨납니다. 그런데 희랍어 본문(라틴어 번역인 불가타와 영어번역(American Standard Verstion, 1901) 그리고 새 번역(2005년)에서는 “저희가 용서하오니”가 아니라 “저희도 용서했듯이”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용서라는 것을 누구로부터 먼저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나 처음이 아니라, 누구처럼, 누구의 본을 보고 용서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먼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용서를 본받아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했듯이”의 시제는 “단순과거”(aorist)로 몇 번을 용서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용서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 용서를 감히 청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남을 용서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겠다는 조건이 먼저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먼저 용서받았으니, 그 용서의 은총이 먼저 그리고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25년 4월 6일(다해) 사순 제5주일 가톨릭마산 8면, 황봉철 베드로 신부(성사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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