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오바드야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지난 호까지 우리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활동했던 예언자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죄로 타락한 예루살렘을 향해 임박한 심판과 징벌을 전하며, 회개를 부추기며 다급한 외침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지 않은 남유다 왕국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멸망을 맞이했습니다. “유다의 자손들이 멸망하던 날”(1,12)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바드야 예언자가 활동한 시기는 유다의 멸망 이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오바드야 예언자는 과연 무엇을 예언했을까요? 앞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아닌 적대국인 아시리아의 교만을 고발하며 심판을 예고한 나훔 예언자처럼 오바드야 예언자는 에돔이라는 한 나라를 향해 심판 신탁을 전합니다. 즉 에돔을 향해 저주를 쏟아내며 에돔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같은 강대국도 많은데, 왜 하필 에돔에게 저주와 멸망을 퍼부을까요? 유다와 에돔의 관계 창세기에 따르면 이사악의 아들 야곱과 에사우는 쌍둥이면서도 모태에서부터 서로 다투었습니다. 장성한 후 야곱은 형 에사우의 맏아들 권리를 빼앗았고, 아버지를 속여가며 축복을 가로챘고, 그로 인해 기나긴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각각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인데,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조가 되었고, 에사우는 에돔 민족의 시조가 됩니다. 훗날 야곱은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형에게 용서를 청하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들 후손 사이의 갈등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에돔 왕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이스라엘은 먼 거리를 우회해야 했습니다.(민수 20,14-21 참조)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피를 나눈 “에돔족을 역겨워해서는 안 된다.”(신명 23,8), 곧 에돔을 상종하지 못한 민족으로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기원전 10세기에 하닷에제르와 싸워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 죽이고, 에돔 전 지역에 자신의 수비대를 두어 신하로 삼았습니다(2사무 8,13-14 참조). 이후 솔로몬 시대에도 에돔은 유다의 통치를 받았고, 에돔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임금을 세우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여호람 시대에 에돔이 자치권을 행사하면서부터는 유다와 대립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2열왕 8,20-22 참조). 이처럼 유다와 에돔은 피를 나눈 형제 임에도 깊은 증오의 뿌리를 간직한 상호 적대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다를 멸망시켰을 때, 서로를 원수로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건일까요? 에돔을 향한 심판의 원인 유다의 치드키야 임금 제4년에 에돔은 바빌론을 반대하며 유다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바빌론이 유다를 침략할 당시에 에돔이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유다를 향한 에돔의 만행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바빌론 때문에 수도가 함락당하고, 성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왕조가 무너진 채 백성들이 유배를 끌려가는 참혹한 상황을 맞은 유다를 보며 에돔은 기뻐하였고, 그 틈을 타 에돔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여 헤브론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에돔은 형제인 유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방인들과 한패가 되어 유다인들을 약탈하였으며 노예로 잡아가 매매하며 이득을 취하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에돔을 향해 유다는 적개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바드야는 에돔의 멸망을 예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 아우의 날을, 그 재난의 날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 유다의 자손들이 멸망하던 날 너는 그를 두고 기뻐하지 말아야 했다.”(12절) “그 재앙의 날에 너라도 그의 불행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 그 재앙의 날에 너는 그의 재산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다.”(13절) “환난의 날에 너는 살아남은 이들을 넘겨주지 말아야 했다.”(14절) “네가 한 그대로 너도 당하고 너의 행실이 네 머리 위로 돌아가리라.”(15절) 새로운 미래를 위해 필요한 지혜 그렇다면 오바드야 예언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민족주의적 예언서, 편파적인 예언서라고 봐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오바드야가 체험한 하느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온 법칙으로 복수해야 속이 시원한, 속이 좁은 하느님이신가요? 원수를 엄하게 벌하는 하느님의 복수가 유배 중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위안이 될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오바드야 예언서는 또 다른 가르침을 던져줍니다. 앞서 유다와 에돔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 바대로 그들은 일방적인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상호 적대 관계였습니다. 오바드야 예언서는 에돔의 만행을 고발하지만, 에돔이 저지른 잘못과 악행에 앞서는 유다의 잘못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서로를 향한 적개심이 만들어낸 악의 재생산, 연속된 폭력의 악순환, 끝없는 보복과 복수를 고발하는 오바드야 예언자의 메시지를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어떤 순간에는 이 악순환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고, 누군가는 먼저 이를 시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미래, 구원의 내일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국가 간의 전쟁을 보면 어떤 명분에서 시작은 되었지만, 끝낼 명분을 찾지 못해 장기전에 돌입하여 비극을 이어 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치 원죄처럼 국민의 공감대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특정 국가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나, 집안과 집안 사이에 당연한 듯 대물림되는 뿌리 깊은 원한과 앙심이 있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누군가는 먼저 끊어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끝나지 않을 악순환을 ‘지금 내가’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평화는 복수와 보복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업적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대물림되던 원죄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주었고, 그 업적에 동참하기 위해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는 은총을 입으셨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를 따르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입니다. 만약 내 마음속 풀지 못한 응어리, 뼛속 깊이 새겨진 적대감과 앙심이 있다면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평화의 모후시여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성모님의 군단, 2025년 7월호, 여한준 롯젤로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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