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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요엘 예언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5-12-03 조회수20 추천수0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요엘 예언서

 

 

시대 배경의 이해 

 

요엘서를 읽어보면 “프투엘의 아들 요엘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1,1)이란 말 외에 인물과 시대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정보도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예언서가 만들어진 시대를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봅니다. 역사에서 일어난 구체적 사건으로 ‘메뚜기 재앙’을 언급하지만, 오늘날 태풍과 같이 근동지역에서는 여전히 메뚜기 떼의 습격은 수시로 발생하는 일이니 이 사건 하나로 시대를 예측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언제인가?’를 찾기보다 ‘이 사건을 통해 예언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헤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메뚜기 재앙과 가뭄

 

예나 지금이나 메뚜기 떼는 대지를 뒤덮고 사방으로 기어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곡식을 먹어 치웁니다. 농부들은 빗자루로 메뚜기들을 후려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고 메뚜기 떼가 지나간 곳은 마치 불에 타버린 것처럼 황량하게 됩니다. 그러니 농부들에게 메뚜기 떼의 습격은 분명 치명적인 재앙입니다. 모든 것을 해치우는 메뚜기의 파괴력을 설명하기 위해 예언자는 “그들의 이빨은 사자 이빨 같고 암사자의 엄니 같다.”(1,6)라고 합니다. 

 

한편 예언자는 또 다른 재앙인 가뭄을 이야기합니다. 가뭄 역시 메뚜기 재앙만큼이나 가혹합니다. “곡식 농사는 망하고 햇포도주는 말라버렸으며 기름은 떨어졌고”(1,10), 짐승들이 신음하고, 양 떼가 죽어갑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제단에 제물과 제주를 봉헌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황입니다. 

 

자! 여기서 예언자는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통해 자연 현상과 재해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말하려는 것일까요? 두 재앙은 하느님의 심판이 펼쳐질 ‘주님의 날’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날인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예시에 불과합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두 가지 무서운 재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일 사람들에게 요엘 예언자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주님의 날이 다가온다. 정녕 그날이 가까웠다.”(2,1) 주님의 날에 비하면 앞선 재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날은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이며, 숫자가 많고 힘이 센 민족의 침입과 같아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날입니다. 마치 불이 삼키고 간 것처럼 살아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 날이 얼마나 끔찍할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녕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내랴?”(2,11)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두려움을 맛보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목 놓아 울며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반드시 오고야 말 그날을 대비하기 위한 방책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2,13) 바로 회개만이 살길임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진실한 회개만 하면 주님의 날을 쉽게 피해 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요엘 예언자는 회개를 통해 단순히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구원은 회개에 따르는 당연한 보상이 아니며, 용서를 빌었으니 당연히 주어지는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구원은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지, 완벽한 나의 회개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실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마음을 찢으며 하느님께 돌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요엘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2,14) 과연 하느님은 그렇게 회개하는 인간을 못 본 척하고 당신 계획대로 예정된 재앙을 내리실까요?

 

 

나에게 주님의 날은?

 

분명 주님의 날은 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된 회개로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비록 주님의 날을 피할 수는 없더라도 그 후에 이스라엘에 펼쳐질 ‘복구와 회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을 주고, 황폐하게 만든 이들을 내쫓으며,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게 되리라 선포합니다. 결국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3,5 참조)을 받습니다. 반면 같은 날, 하느님 백성을 흩어버리고 땅을 빼앗은 민족들에게는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이 따르게 됩니다. 

 

자! 공포스러운 주님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같은 날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고 마음을 찢고 회개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따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소유를 찬탈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는 그날이 무서운 재앙의 날일 뿐입니다. 그러니 요엘서가 말하는 주님의 날은 수신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다양한 사건이 전개되는 모순적인 날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사건들은 많습니다. 메뚜기 떼와 가뭄만이 아니라 홍수와 산사태, 산불과 쓰나미, 전염병과 전쟁이 어쩌면 주님의 날의 예시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종말론에 비추어 반드시 오고야 말 주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주님의 날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우리에게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우선적인 주님의 날은 바로 ‘나의 죽음’이겠지요. 그러니 개별 사건인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수신자에 따라 다양한 사건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은 날을 우리는 ‘기일’이라 부르며 제사를 지내며 고인을 추모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신 성모님에게도 기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을 ‘기일’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이라고 합니다. ‘영혼이 꿰찔리는 고통’을 품으신 성모님에게 주님의 날은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불려 올려지는 환희와 영광의 날이었습니다. 

 

11월! 위령 성월입니다. 반드시 오고야 말 주님의 날이 누군가에게는 제삿날이지만 성모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는 승천날이 되기를 희망하며 오늘을 살아갑시다. 영혼이 꿰찔리는 고통은 아니더라도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로 주님의 날을 맞이합시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11월호, 여한준 롯젤로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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