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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9에 대해]나를 바치는 제사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황충렬 쪽지 캡슐 작성일1999-03-05 조회수4,827 추천수7 신고

'나'를 바치라 하네

 

 

 

 

1.

아브라함은 야훼의 명을 따라

100세 때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인신제사는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야훼께 대한 이 눈물어린 순종이

가슴 저미는 믿음으로 승화되고 있지만,

성서학자들은 이 이야기(창세 22장)를 통해

가나안에서 행해지던 인신제사(人身祭祀)

금지한 것으로 설파하곤 하지요.

 

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차츰

야훼 신앙 공동체,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로 그 꼴을 잡아갑니다.

그 가운데 제사는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지요.

이 제사는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신 야훼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공동체 의식이자 축제로서(출애 29,45-46),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 제물은 흠 없는 소나 염소, 양이었고

그를 야훼 앞에서 잡아 생명을 상징하는

제물의 피를 뿌리고 불에 사름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화되는 의식(儀式)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레위 4장).

 

3.

희생제사, 생명(제물)의 피를 보아야 하는 제사.

우리 민족도 희생제사가 있고,

인신제사의 흔적도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심청전에서 봅니다.

가장 소중하고 흠 없는 생명,

심지어 사람까지 제물로 바쳐 신의 진노를 달래고

앞으로의 삶에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그러나 이 인신제사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금지되어 왔습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의 처참함을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4.

2000년 전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자렛에서 살고,

갈릴래아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예루살렘에 와서 죽은 예수라는 사람.

당시에는 함부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지엄하시고 전능하신 유다의 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신은 그분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자의식(自意識)을 지닌 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사람.

 

그가 잡히던 날 밤(성 목요일),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먹을 빵과 포도주를

바로 자신의 몸과 피로 기념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미사의 기원이 되었지요.)

그렇게 자신을 통째로 내어 주는 삶을 산

사랑 덩어리 예수는 그 날 밤 체포되어, 하느님 모독죄,

군중 선동죄(= 체제와 국가 전복의 위험이 있는 정치범)

사형에 처해집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가 제자들에게 약속한 대로 부활하고,

그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을 통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온 세상에 전해집니다.

 

그의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그 예수를 스승이요 주님으로 전하는데,

그의 십자가상 죽음을 희생제사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유다교 신앙생활의 중심인 제사에 대비시켜,

예수는 그 제사의 희생제물로 자신을 내어 놓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바쳐진,

아니 스스로 바친 희생제물이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주요 관점이기도 합니다. 히브 9,26·28; 10,12; 에페 5,2)

스스로 내어놓은 그 큰 사랑을 통해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신 분,

이를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요한 3,16; 골로 1,22).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예수의 삶을 따랐던 이들은,

이를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것이지요.

물론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뵙고,

예수의 삶에서 참 삶, 부활하는 삶을 알았기 때문이겠지요.

 

5.

오늘날 우리는 '미사'(Missa '파견하다'라는 뜻)라는 제사를 드립니다.

이 미사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그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찬미하고,

흠 투성이인 우리를 정화하고,

공동체가 함께 친교와 일치를 도모하는 거룩한 제사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이 제사에서 제물은 무엇입니까?

밀떡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봉헌금도 있지만,

신자들의 봉헌은 이미 바쳐진 희생제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는 인상이 짙습니다.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 덩어리, 예수.

 

미사 때의 제물을 묵상하고 있는 지금,

예수께서 최후 만찬 때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 들려 옵니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루가 22,19).

무엇을 행하라는 것일까요?

예수를 끊임없이 희생제물로 삼으라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먼저 계시하시고, 사랑으로 생명을 키워오신 하느님,

예수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구원, 당신의 나라,

십자가에까지 달리는 사랑을 기억하고 이를 행하라는 것이겠지요.

 

교회는 그 절정이 미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정 미사가 그 절정일까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바는 미사보다도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에 있지 않을까요?(마르 12,33; 히브 9,9; 10,8)

미사는 바로 그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필요한 은총을 받고

파견되는 자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미사는 그 의미와 역할에 충실한가요?

 

6.

우리는 미사를 통해,

흠 없는 당신을 제물로 다 내어놓으신 주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를 여시고,

그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그분을 찬미하며,

그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곤 합니다.

그런데 미사의 제물로 예수만을 바치려 한다면

우리의 미사는 반쪽짜리 미사에 그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미사의 봉헌물로, 제물로

나를 바치는 미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우리의 스승 예수가 이미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입니다.

당신이 직접 몸으로 사신 바지요.

'네가 희생제물이 되어라'가 아니라,

'우리', 바로 '나'가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섬김을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섬김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열었던 그분이시지 않습니까?

(참조 마태 7,12; 20,26·28; 마르 9,35; 10,43-45; 루가 10,25-37; 22,26)

'너'를 제물로 바쳐 죄 사함 받음이

미사의 궁극적인 지향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 말 없이, 심지어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미하며,

바로 내가 그 부활로 가는 길을 걷는 것이

미사의 궁극적 지향이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스승은 그런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 스승을 따르는 우리라면,

미사 때 제물이 되신 그분으로 우리가 정화되는 것만도,

또 우리가 드리는 봉헌물로

그분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다 된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살라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나 아닌 다른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바로 '나'를 온전히 다 그분께 내어드리는 제사…….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의 적에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로는

이러한 헌신(獻身)의 모범입니다(2고린 12,14-15).

 

그러기에 미사는 대속제사만이 아닙니다.

미사는 바로 그렇게 사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새롭게 힘을 얻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웃을 위한 희생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요.

 

오늘도 성체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이웃에게 생명의 몸과 피가 되는 힘을 주십니다.

스스로 나를 바치는 삶의 뿌리가 되어 주십니다.

 

* 이 글은 삼토신학회(三土神學會) 소식지 {삼토} 제5호에 실린 저의 글입니다.

참고가 되실까 하여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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