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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46 의화교리 및 루터교와의 합의문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조정제 쪽지 캡슐 작성일2002-05-16 조회수3,307 추천수2 신고

우리가 구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자주 헷갈리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도 여기에 대해서 확실하게 아시는 분이 우리 가톨릭 안 평범한 신자들 사이에서는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의화라 함은 ==> "의롭게 되다"라는 의미인데요,

우리 모든 인간들은 "원조들의 원죄로 인하여 타락하여 죽을 운명인 것인데 즉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이 말은 원조들의 범죄 이후로 하느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들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끊겼다고 함은 즉 죽을 운명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의 나그넷길(세상)에서 우리를 다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맞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화>혹은 의인(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이라고 합니다.

의인이라는 말은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지금은 칭의(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라고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의화던 의인(칭의)던 간에 근본적인 의미는,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 이는 선행으로던, 다른 종교의 법력^^으로던 간에 스스로 구원을 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의롭게 변화되어지거나> 혹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거나>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의화던 의인이던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거져 주시는 은총 안에서,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의롭게 되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통 말하는 <구원>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예수를 믿고 선행을 하여야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함으로서 받는 은총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거져 주시는 은총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아들(의롭게 되어 진)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의화된 혹은 의인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의 기본이며 가장 중요한 신앙입니다.

가톨릭이라고하여 예수님을 믿고 거기에다가 선행을 하여야 <의화>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이단설로 이미 교회안에서 이단선언된 것입니다.

 

의화된 그리스도인은, 은총 안에서 주님을 본받으며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화>에 힘써야 하고, 선행과 완덕을 향해서 최선을 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이 선행 등을 통해서 공로를 쌓는다하여, 그것이 자신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라, 은총이 주어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의화가 되었다 하여도 사람들은 사욕편정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기에 언제나 은총안에서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은총 안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잘 살피고, 몸과 생각과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의화"된 우리는 "성화"되어 더욱 완덕에로 가까이 나이가 주님으로부터 많은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라는 질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서>구원(의화)받는다라고 하여야 합니다.

 

이제 개신교의 구호인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이 가톨릭에서는 통용이 되는 것이 아닌지 알아보자구요.

 

"가톨릭교회교리서"(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www.cbck.or.kr 항목 줄을 보면 지름길이 있습니다. 지름길을 클릭하면 여러 문헌이 나옵니다. 그 문헌 중에는 가톨릭교회교리서도 있습니다. 교리서 3,4부를 클릭하시면 하느님의 구원, 은총과 의화라는 작은 제목이 있습니다. 잘 읽어보셔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제3편 제3장 하느님의 구원 <은총과 의화> 항목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은총없이 아뭇거도 할수 없다^^=오직 은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없이 구원<의화>없다=오직 믿음>

가 성립합니다.

아니 "은총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구원"이라는 등식은 바로 가톨릭교회의 신앙입니다.

 

즉, 의화(구원)은 은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화의 바탕에서, 성령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성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하면 이단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기에 루터와 교회와의 논쟁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루터가 교회를 이탈하였고 다른 종교개혁가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이탈하였지만, (즉 교회는 그들을 파문하였지만,)

 

개신교들의 구원에 대한 주장은 루터교와 대동소이합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은 <예수말고도 선행으로도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단이다>라고 주장하는 무식한 이유가 바로 의화(칭의)와 성화를 이해 못하고 하는 말들입니다.

 

당연히 개신교들에게도 가톨릭과 거의 비슷한 "성화" 교리가 있답니다. 성화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에 대해서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아

 

아래는 조금 길지만 가톨릭과 루터교가 가장 중요한 믿음 사항인 의화론에서 갈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와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연구해 보니 그렇지않다, 그러므로 가톨릭과 루터교의 구원에 대한 믿음은 같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문서입니다.

 

길지만 프린트해서 한번 꼼꼼하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루터교와의 의화교리 합동선언문>>

 

 

루터교 세계 연맹과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

 

루터교 세계 연맹과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

GEMEINSAME ERKLAUNG ZUR RECHTFERTIGUNGSLEHRE

DES LUTHERISCHEN WELTBUNDES UND DER KATHOLISCHEN KIRCHE

 

*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 의장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과 루터교 세계 연맹 크리스티안 크라우저 회장이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서 론

1. 의화에 대한 성서 메시지

2. 교회 일치 문제로서 의화 교리  

3. 의화의 공동 이해  

4. 의화의 공동 이해 해설  

    4.1. 인간의 무력과 의화에 대한 관계에서 죄악  

    4.2. 죄의 용서와 정의의 실천인 의화  

    4.3. 신앙과 은총을 통한 의화  

    4.4. 죄인으로서 의인  

    4.5. 율법과 복음  

    4.6. 구원의 보증  

    4.7. 의화된 사람들의 선행  

5. 도달된 합의의 의미와 범위  

부록 자료  

 

 

<<서 론>>

 

 

1. 의화 교리는 16세기 루터의 종교 개혁에서 핵심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첫째가는 최고의 명제”이고,1) 동시에 “모든 다른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통치자이며 판관”이기도2) 하였다. 의화 교리가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 신학을 거슬러, 종교 개혁의 형태와 그 특수한 가치에서 각별하게 주창되고 방어된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다른 성격의 의화 교리를 주창하고 옹호하였다. 종교 개혁의 전망에서 볼 때, 의화 교리는 모든 논쟁의 핵심 사안이었다. 루터교 고백문과3) 로마 가톨릭 교회의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하여 양편은 교리상으로 서로 정죄하였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하며, 교회 분리의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2. 루터교 전통에서, 의화 교리는 특별한 위치를 점유해 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교리는 루터교-로마 가톨릭의 공식 대화에서도 처음부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3. 다음의 보고서들에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루터교-로마 가톨릭 합동 위원회의 “복음과 교회”(The Gospel and the Church, 1972)와4) “교회와 의화”(Church and Justification, 1994),5) 미국의 루터교-로마 가톨릭 대화에서 나온 “신앙에 의한 의화”(Justification by Faith, 1983)와,6) 독일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교회 일치 신학자 실무 그룹의 “종교 개혁 시대의 정죄들─그들은 여전히 갈라져 있는가?”(The Condemnations of the Reformation Era─Do They Still Divide?, 1986)7) 교회들은 이러한 대화 보고서들의 일부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1994년 독일에서 다른 복음주의 루터 교회들과 함께 교회가 인정하는 최고 수준에서 이루어진, ‘정죄들’ 연구에 대한 연합 복음주의 루터 교회(the United Evangelical-Lutheran Church)의 구속력 있는 논평은 이러한 수용의 중요한 사례이다.8)

 

4. 의화 교리에 관한 토론들 안에서 작성된 모든 대화 보고서나 논평들은 접근 자세에서나 결론에서 높은 수준의 일치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 교회들이 이러한 대화의 전반적 결과들에 관하여 정확하고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고, 그렇게 하여 구속력 있는 결정들을 내릴 수 있도록, 의화에 관한 대화의 결실들을 평가하고 요약할 때가 되었다.

 

5. 이 합동 선언문은 대화에 바탕을 두고 서명하게 되는 루터교 교회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9)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의화에 대한 공동 이해를 이제 정식화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 주려는 취지를 지닌다. 이 선언문이, 양 교회가 의화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의화 교리의 기초 진리들에 대한 일치를 담고 있고, 그것을 해설하는 데 여전히 존재하는 상위성들이 더 이상 교리상의 정죄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6. 우리 선언문은 지금까지의 대화 보고서와 자료 문서들에 비하여 새롭거나 독립적인 내용이 아니며, 독자적으로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록 자료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이 선언문은 이 자료들과 그들의 논증들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7. 대화들 자체처럼, 이 선언문은 이전의 논쟁 문제들과 교리상의 정죄들을 극복하는 데 교회들이 정죄들을 가볍게 대하지도 않고 그들 자신의 과거를 부인하지도 않는다는 확신에 의지하고 있다. 오히려, 이 선언문은 우리 교회들이 자신들의 과거 역사 안에서 새로운 통찰에 이르게 되었다는 확신으로 각인되어 있다. 서로를 분리시키는 쟁점들과 정죄들에 대하여 교회들이 검토하고 이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볼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청하는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 의화에 대한 성서 메시지>>

 

 

8. 성서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우리의 공동 도정은 이러한 새로운 통찰로 이끌어 왔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라는 복음을 듣는다. 이 기쁜 소식은 다양한 양식으로 성서에 제시되어 있다. 구약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시편 50,1-5; 다니 9,5 이하; 전도 8,9 이하; 에즈 9,6 이하)와, 인간의 불순명(창세 3,1-19; 느헤 9,16 이하.26)과, 아울러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이사 46,13; 51,5-8; 56,1[53,11 참조]; 예레 9,24)과 ‘심판’(전도 12,14; 시편 9,5 이하; 75,7-9)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9. 신약성서에서‘의로움’과 ‘의화’에 관한 갖가지 언급들이 마태오 복음(5,10; 6,33; 21,32), 요한 복음(16,8-11), 히브리서(5,1-3; 10,37-38)와 야고보서(2,14-26) 등에서 발견된다.10) 바오로 서간에도 구원의 선물이 여러 가지 양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여러 구절들 가운데서 다음 내용들을 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갈라 5,1-13; 로마 6,7 참조), “하느님과 화해하다”(2고린 5,18-21; 로마 5,11 참조), “하느님과의 평화”(로마 5,1), “새로운 창조”(2고린 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삶”(로마 6,11.23),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됨”(1고린 1,2.30; 2고린 1,1). 이 서술들 가운데서 주된 것은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죄인의 ‘의화’(로마 3,23-25 참조)인데, 이것은 종교 개혁 시대에 각별히 두드러지게 되었다.

 

10. 바오로는 복음을, 죄의 권세 밑으로 추락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권능으로서, “하느님의 공의가 신앙을 위한 신앙을 통하여 계시되었다.”(로마 1,16-17 참조)고 선포하며 ‘의화’를 부여하는(로마 3,21-31 참조) 메시지로서 설명한다. 바오로는 예레미야가 하느님 자신에 관하여 선포한 것(예레 23,6 참조)을 부활하신 주님께 적용하면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정의”(1고린 1,30 참조)라고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그분의 구원 활동의 모든 차원이 뿌리를 두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려고 다시 살아나신 분”(로마 4,25)이시기 때문이다. “모두 죄를 지었고 하느님의 영광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로마 3,23; 1,18─3,20; 11,32; 갈라 3,22 참조) 모든 인간 존재에게는 하느님의 정의가 필요하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3,6)와 로마서(4,3-9)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창세 15,6)을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로마 4,5 참조)으로 이해하면서, 이 정의가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자신의 복음을 강화하고자 구약의 증언을 상기시킨다. “의인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기 때문이다”(하바 2,4; 갈라 3,11; 로마 1,17 참조). 바오로 서간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권능이기도 하다(로마 1,17; 2고린 5,21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서 그것을 저들의 정의로 만드신다(2고린 5,21 참조). 의화는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신”(로마 3,25.21-28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된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에페 2,8-9).

 

11. 의화는 죄의 용서(로마 3,23-25; 사도 13,39; 루가 18,14 참조)이며, 죄와 죽음의 지배 세력으로부터 해방됨(로마 5,12-21 참조)이며,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됨(갈라 3,10-14 참조)이다. 의화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미 지금, 그리고 도래할 하느님 나라 안에 온전히 수용되는 것이다(로마 5,1-2 참조). 의화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하나 되는 것이다(로마 6,5 참조). 의화는 세례 안에서 성령을 받아들이고 한 몸으로 합체될 때에 이루어진다(로마 8,1-2.9-11; 1고린 12,12-13 참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덕분에, 은총으로,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로마 1,1-3 참조)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온다.

 

12. 의화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오고(로마 10,17 참조), 성령의 열매인(갈라 5,22 참조) 사랑을 통하여 활성화되는(갈라 5,6 참조) 신앙으로 생활한다. 그러나 의화된 사람들이 권세와 욕정 때문에 안팎으로 맹렬한 공격을 받고(로마 8,35-39; 갈라 5,16-21 참조) 죄악에 빠지기 때문에(1요한 1,8-10 참조), 끊임없이 하느님의 약속을 새로 듣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여야 하며(1요한 1,9 참조),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도록 권고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의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유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2-13). 그러나 기쁜 소식은 여전히 머무른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리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시는 사람은’(갈라 2,20) 결코 단죄받는 일이 없습니다”(로마 8,1). 그리스도의 “올바른 행위가 모든 사람을 위한 의화와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로마 5,18 참조).

 

 

<<2. 교회 일치 문제로서 의화 교리>>

 

13. 성서가 말하는 의화에 대한 상반된 해석과 적용들이 16세기에 서방 교회 분열의 주된 원인이었으며 아울러 교리적 정죄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의화의 공동 이해는 그와 같은 분열을 극복하는 데 근본적이고 불가결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 일치 대화들은 최근의 성서 연구의 통찰들을 적용하고, 신학과 교의 역사에 대한 현대의 연구들을 원용함으로써, 이 합동 선언문이 의화 교리의 기초 진리들에 대한 합의를 정식화할 수 있게 하였고, 의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수렴에 이르게 하였다. 이 합의에 비추어 볼 때, 16세기에 각기 내려진 교리적 정죄들은 오늘의 상대방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3. 의화의 공동 이해>>

 

14.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서에서 선포된 기쁜 소식을 함께 청취하였다. 최근의 신학적 대화와 함께 이루어진 이 공동 청취가 의화를 함께 이해하는 데로 이끌었다. 이것이 기본 진리 안에서 합의를 이루게 하였는데, 특정 진술에서 일치하지 않는 설명들은 이 합의와 양립 가능하다.

 

15. 신앙 안에서 우리는 모두, 의화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역사(役事)라고 확신한다. 성부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의화의 토대와 전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다. 그래서 강생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정의가 되심을 뜻하며,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이 정의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오로지 은총에 의해 우리는 하느님께 수락되어, 우리를 선행으로 준비시키고 부르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받게 된다.11)

 

16.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구원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이 구원을 받을 때에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의화된다. 신앙은 그 자체로서 성령을 통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역사하시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완성으로 이끄실 삶의 쇄신으로 신자들을 인도하신다.

 

17. 우리는 또한 의화 메시지가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신약성서 증언의 핵심으로 이끌어 간다는 확신을 공유한다. 곧, 죄인들로서 우리가 얻게 되는 새 생명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선물로 부여하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받게 될 뿐, 결코 어떤 방식으로도 공로로 취득할 수 없는, 용서하고 새롭게 하는 자비의 덕임을 말해 준다.

 

18. 그러므로 이 메시지를 담고 있고 설명하는 의화 교리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한 부분 그 이상의 것이다. 의화 교리는 내적으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신앙 진리와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교회들의 모든 가르침과 실천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께 정향하도록 하는 불가결한 기준이다. 루터교 신자들이 이 기준의 특유한 의미를 강조한다고 해서, 모든 신앙 진리의 상호 연관성과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가톨릭 신자들이 여러 기준에 자신이 매여 있다고 여긴다고 해서, 의화 메시지의 특별한 역할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루터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그분의 새롭게 하시는 선물을 부어 주시는, 곧 그리스도를 한 분 중개자(1디모 2,5-6)로서 그 무엇보다도 신뢰함을 공동의 목표로 한다(부록 자료, ‘3절에 대하여’ 참조).

 

 

<<4. 의화의 공동 이해 해설>>

 

    4.1. 인간의 무력과 의화에 대한 관계에서 죄악

 

19. 모든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전적으로 의지한다고 우리는 함께 고백한다. 사람이 이 세상의 다른 사람과 사물에 대하여 갖는 자유는 구원과 관련된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느님의 심판에 놓여 있으며, 구원을 얻기 위해 스스로 하느님께 향할 수도 없고, 하느님 앞에서 공로로 의화를 얻을 수도 없으며,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의화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진다. 이를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이 함께 고백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것은 사실이다.

 

20. 인간이 하느님의 의롭게 하시는 행위에 동의함으로써 의화를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협력한다’고 가톨릭 신자들이 말할 때, 그들은 이러한 인격적 동의가 천부적 인간 능력에서 생기는 행위가 아니라, 은총의 결과 그 자체라고 본다.

 

21. 루터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죄인으로서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활동을 능동적으로 거스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에 협력할 수 없다. 루터교 신자들은 사람이 은총의 작용을 거부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루터교 신자들이 인간은 오로지 의화를 (단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할 수 있다고 강조할 때에, 이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의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신앙에 개인적으로 충만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부록 자료, ‘4.1절에 대하여’ 참조).

 

   4.2. 죄의 용서와 정의의 실천인 의화

 

22. 우리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며, 동시에 죄의 구속력(拘束力)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선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함께 고백한다. 사람들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성령을 통하여 그들 안에 적극적인 사랑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이 두 가지 행위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분께서는 자신의 인간성 안에서 우리의 의로움─죄의 용서와 하느님 자신의 구원의 현존─이 되시기(1고린 1,30 참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이 이것을 함께 고백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것은 사실이다.

 

23. 루터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라는 것을 강조할 때에, 그들의 의도는 무엇보다 먼저, 용서의 선언을 통하여 하느님 앞에서 의로움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에게 부여되었으며,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만 인간의 삶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단호히 고수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은총은 용서하시는 사랑(“하느님의 호의”)이라고12) 강조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쇄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의화가 인간의 협력 여부에 구애받지 않으며, 인간 존재 안에 있는 삶을 쇄신하는 은총의 결과들에 의존하지 않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24. 가톨릭 신자들이 신자에게 선물로 제공된 은총의 수용을 통한 내적 인간의 쇄신을 강조할 때에,13) 그들은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성령 안에서 적극적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 새 생명의 선물을 수반한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의화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 선물은 인간의 협력과 무관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부록 자료, ‘4.2절에 대하여’ 참조).  

 

    4.3. 신앙과 은총을 통한 의화

 

25. 우리는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믿음으로 의화된다고 함께 고백한다. 세례에서 성령의 역사(役事)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의 토대가 되는 구원의 선물이 주어진다. 그들은 의화를 이루는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약속을 신뢰하게 되는데, 이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그분께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신앙은 사랑에 적극적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선행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의화된 사람들에게 전제되거나 뒤따르는 것이 무엇이든, 신앙의 자유로운 선물은 의화의 바탕도 아니고 그것을 공로로 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26. 루터교의 이해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신앙으로만(sola fide) 죄인들을 의롭게 하신다. 신앙 안에서 그들은 창조주와 구세주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바치고 그분과의 친교 안에서 생활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적 말씀으로 이러한 신뢰를 생기게 하심으로써 신앙을 이룩하신다. 하느님의 활동은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차원에 영향을 미쳐 희망과 사랑의 삶으로 인도한다. ‘오로지 신앙에 의한 의화’ 교리 안에서는 의화 자체와, 필연적으로 의화에서 일어나며 그것 없이는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 삶의 양식의 쇄신 사이에 분리(分離)가 아닌 구별(區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삶의 쇄신이 생겨나는 토대를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쇄신은 의화 안에서 사람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사랑에서 따라 나오는 까닭이다. 의화와 쇄신은 신앙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

 

27. 가톨릭의 이해 또한 신앙을 의화에서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 의화란, 신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세례를 통하여 의화된다. 죄인들의 의화는 죄의 용서이며,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의화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의화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께 믿음과 바람 그리고 사랑을 받으며, 그러한 가운데 그분과 친교를 누리게 된다.14) 하느님께 대한 이 새로운 개별적 관계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사람들이 당신께 의지하도록 언제나 당신 자신에게 진실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창조 역사(役事)에 지속적으로 의존한다. 이처럼 의화 은총은, 하느님을 거슬러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인간의 소유물이 결코 될 수 없다. 가톨릭의 가르침이 의화 은총에 의한 삶의 쇄신을 강조하지만, 믿음과 바람 그리고 사랑 안에서 이 쇄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심오한 은총에 의지하게 마련이고, 인간이 의화에 이바지하여 하느님 앞에서 자랑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로마 3,27 참조)(부록 자료, ‘4.3절에 대하여’ 참조).

 

 

   4.4. 죄인으로서 의인

 

28. 우리는, 세례 안에서 성령께서 세례 받는 사람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시고, 의롭게 하시며, 진정으로 새롭게 하신다고 함께 고백한다. 그러나 의화된 사람은 전 생애를 통해서 언제나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의화 은총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들 또한 공격을 가하는 죄악의 세력 앞에 끊임없이 내던져져 있으며(로마 6,12-14 참조), 옛 아담의 이기적 욕망 안에서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에 대하여 평생 투쟁하여야만 한다(갈라 5,16; 로마 7,7-10 참조). 의화된 사람들도, 주님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마태 6,12; 1요한 1,9 참조), 매일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여야 하고, 거듭해서 회개하고 보속하여야 하며, 계속해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

 

29. 루터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이런 처지를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인 존재로 이해한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신앙 안에서 그들이 받아들이려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선사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은 전적으로 의롭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율법을 통하여 자신을 보게 되면, 그들 또한 아직도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죄악은 여전히 그들 안에 머물러 있다(1요한 1,8; 로마 7,17.20 참조). 그들이 반복해서 그릇된 신들을 향하고, 창조주로서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오롯한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신명 6,5; 마태 22,36-40 병행구 참조). 이렇게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은 진정 죄악이다. 그럼에도,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죄의 세력은 그리스도의 공로 아래 분쇄되었다. 의화된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일치하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배하시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죄가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삶 안에서 부분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매일매일 세례로 되돌아감으로써 세례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에게 죄의 용서가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죄는 더 이상 파멸과 영원한 죽음을 가져오지 않는다.15) 그러므로 루터교 신자들이, 의롭게 된 사람들 또한 죄인이라고 말하고,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반대가 진정 죄라고 말할 때에, 그들은 이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이 죄가 ‘지배당하는’ 죄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긍정 속에서, 그들은 의화된 사람들 안의 죄를 이해할 때 이견이 발생함에도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일치한다.

 

30.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 때 부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본연의 의미에서” 죄악이고 “저주받아 마땅한”(로마 8,1 참조) 모든 것을 없앤다는 것을 고수한다.16) 그러나 사람 안에는 죄로부터 나오고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 cence)이 남아 있다. 가톨릭이 확신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의 죄란 언제나 인격적 요소를 포함하는데, 이 요소가 이 사욕편정의 경향에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이 경향을 진정한 의미에서 죄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기에서 이 경향이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원초 계획에 부합하지 않고, 그것은 객관적으로 하느님과 상치되며, 원수로 평생에 걸쳐 투쟁하여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해방을 감사하면서, 하느님을 거스르려는 이 경향이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가져오지는 않으며,17) 의화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분리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개인이 의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한다면, 계명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활동 덕분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의 말씀을 통하여 화해성사(고해성사) 안에서 용서와 평화를 받아야 한다(부록 자료, ‘4.4절에 대하여’ 참조).

 

 

   4.5. 율법과 복음

 

31. 우리는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 없이”(로마 3,28)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의화된다고 함께 고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셨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율법을 극복하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들이 의화된 사람들을 위하여 유효하며, 그리스도께서, 의화된 사람들의 처신에도 또한 준거가 되는 하느님의 뜻을 당신의 가르침과 모범으로서 표현하셨다고 아울러 고백한다.

 

32. 루터교 신자들은 율법과 복음의 구별과 올바른 자리매김이 의화의 이해를 위해서 본질적이라고 주장한다. 신학적으로 말할 때 율법은 요청이며 고발이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점에서,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고발 아래 서 있으며,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은 자신을 의화시키시는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로 서슴없이 돌아서게 될 것이다.

 

33. 율법이 구원의 길로서 완성에 이르고 복음을 통해서 극복되었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같은 율법 수여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의화된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할 의무를 지닌다고 강조할 때에,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자비로이 약속하셨음을 부인하지 않는다18) (부록 자료, ‘4.5절에 대하여’ 참조).

 

 

   4.6. 구원의 보증

 

34. 우리는 신자가 하느님의 자비와 약속에 의탁할 수 있다고 함께 고백한다. 그들 자신의 나약함과 그들의 신앙에 가해지는 다양한 위협에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강력한 힘 위에서 그들은 말씀과 성사 안의 하느님 은총의 효력 있는 약속에 의지할 수 있고, 이 은총을 확신할 수 있다.

 

35.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이 특별한 양식으로 강조하였다. 유혹의 한가운데에서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의지하고 그분만을 신뢰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구원을 보장하지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36.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약속의 객관적 실재 안에서 믿음을 정립하고, 각자 자신의 체험에서 벗어나, 오로지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말씀만을 신뢰하는(마태 16,19; 18,18 참조) 종교 개혁자들의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가톨릭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를 죄와 죽음의 암흑에서 해방시키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일깨워 주시는 하느님께19)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 바로 신앙을 갖는 것이라고 선언한다.20)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그분의 약속을 신뢰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바라볼 때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고 계시다고 확신하여도 좋을 것이다(부록 자료, ‘4.6절에 대하여’ 참조).

 

 

   4.7. 의화된 사람들의 선행

 

37. 우리는 선행들─믿음과 바람 그리고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 생활―은 의화를 뒤따르며 그 결실이라고 함께 고백한다. 의화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고 그들이 받은 은총 안에서 활동하면, 성서의 용어로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전 생애에 걸쳐 죄를 거슬러 투쟁하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런 의화의 결과를 성취하여야만 한다.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 문서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업을 열매 맺기를 권고한다.

 

38. 가톨릭의 이해에 따르면, 은총과 성령의 역사로 가능해진 선행들은 우리를 은총 안에서 더욱 성장하게 하여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보존하게 하고,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를 더욱 깊게 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선행의 ‘공로’ 성격을 긍정할 때에, 이는 성서 증언에 따라 선행에 천국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자는 것이지, 선물로서 주어지는 이 선행의 성격을 의문시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의화가 항상 은총의 무상(無償)의 선물이라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39. 은총의 보존과 은총과 신앙 안에서 성장에 대한 개념은 루터교 신자들에게서도 견지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인 의로움과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참여하는 것이 언제나 완전하다고 강조한다. 동시에,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안에서 그 결과의 성장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을 그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의화의 결실이며 표지들로 볼 때에도, 그들은 성서를 따라서, 믿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점에서 무상의 ‘상급’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이해한다(부록 자료, ‘4.7절에 대하여’ 참조).

 

 

<<5. 도달된 합의의 의미와 범위>>

 

40. 이 선언문에 담긴 의화 교리의 이해는 의화 교리의 기초 진리에 대하여 루터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합의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이런 합의에 비추어, 18항에서 39항까지 의화에 대하여 서술하는 데 사용된 언어와 신학적 부연 설명, 그리고 강조점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상위성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화에 관한 루터교와 가톨릭의 해명들은 그들의 상위성 안에서도 상호 개방되어 있으며, 기본 진리와 관련된 합의들을 깨뜨리지 않는다.

 

41. 이렇게 16세기의 교리적 정죄들은 의화 교리와 상관하는 한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될 수 있다. 이 선언문에 담겨 있는 루터 교회의 가르침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발한 정죄에 해당되지 않는다. 루터교 고백문 안의 정죄들은 이 선언문에 담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적용되지 않는다.

 

42. 이러한 가운데에서 의화 교리와 관련된 정죄들의 심각성이 어떠한 경우에도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것들이 단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가르침과 실천에서 유의하여야만 하는, 우리를 위한 ‘유익한 경고’로 존재한다.21)

 

43. 의화 교리의 기본 진리 안에서 이룩된 우리의 합의는 우리 교회들의 삶과 가르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합의는 자체 증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면에서 후속 해명이 필요한 갖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여전히 상존한다. 이 문제들은, 다른 주제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 교리 사이의 관계나, 교회론, 교회 안의 권위, 직무, 성사, 그리고 의화와 사회 윤리 사이의 관계 등을 포함한다. 우리가 도달한 합의가 이 해설을 위한 견실한 토대를 제공하리라고 확신한다.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계속하여 이 공동의 의화 이해를 심화시키고 교회들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 결실을 거두고자 함께 노력할 것이다.

 

44. 우리는 교회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도정에서 이루어진 결정적인 전진적 발걸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 드린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뜻인 가시적 일치를 향하여 앞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부록 자료>>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의 전거

 

 

 

    “합동 선언문”의 3절과 4절에서 서로 다른 루터교-가톨릭 대화에서 취해진 정식들은 다음과 같은 문헌들과 연관된다.

 

    1) “모두 한 분 그리스도 아래”(All Under One Christ), 1980년 로마 가톨릭·루터교 합동위원회의 아우크스부르크 고백에 관한 성명서, in: Growth in Agreement, Harding Meyer와 Lukas Vischer 편, New York/Ramsey, 제네바, 1984년, 241-247면.

 

    2) 「종교 개혁 시대의 정죄들─그들은 여전히 갈라져 있는가?」(The Condemnations of the Reformation Era─Do They Still Divide?) 문헌과 관련하여, 독일 연합 복음 루터교와 LWF 독일 민족 위원회의 합동 위원회가 한 논평, in: Lehrverurteilungen im Gespra¨h, 괴팅겐, 1993년(이하 VELKD로 표기).

 

    3) Denzinger-Scho¨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32판에서 36판까지(이하 DS로 표기).

 

    4) Denzinger-Hunermann, Enchiridion Symbolorum......, 37판 이하(이하 DH로 표기).

 

    5) “교리 판결들-교회 분리적?” 연구에 대한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의 평가, 바티칸, 1992년, 미출판 자료(이하PCPCU로 표기).

 

    6) 「루터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대화집 VII」(Lutherans and Catholics in Dialogue VII), “Justification by Faith”, 미니애폴리스, 1985년(이하 USA로 표기).

 

    7) 「종교 개혁 시대의 정죄들─그들은 여전히 갈라져 있는가?」(The Condemnations of the Reformation Era─Do They Still Divide?), Karl Lehmann과 Wolfhart Pannenberg 편, 미니애폴리스, 1990년(이하 LV:E로 표기).

 

 

 

    3절에 대하여: 의화의 공동 이해(14-18항)(LV:E 68 이하; VELKD 95).

 

    ─ “…… 의화를 중심에 두고 법률적으로 이해하는 신앙은 바오로에게,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성서 전체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 비록 그것이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표현하는 유일한 성서의 방식 또는 바오로의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러하다”(USA, 146항).

 

    ─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통해서만 올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느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우신 약속들의 선언’을 돕든지 아니면 방해하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실천, 구조와 신학들을 시험해 볼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28항)”(USA, 153항).

 

 

 

    “근본적 긍정”(USA, 157항; 4항 참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 “이 긍정은 오로지 신앙만을 통한 종교 개혁 의화 교리처럼, 교회의 모든 실천과 구조 그리고 전통들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의 다른 한 쪽은 ‘그리스도뿐(solus Christus)’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홀로,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선물을 베풀어 주시는 한 분 중개자로서 궁극적으로 신뢰를 받으실 것이다. 이 대화에 참여하는 우리는 모두, 전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실천 그리고 직분들이, 신자들의 구원과 천상 아버지의 찬미와 영광을 위해서, 성령을 통하여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의 순명’(로마 1,5 참조)을 기르도록 하여야 한다고 확신한다”(USA, 160항).

 

    ─ “이런 이유 때문에 의화 교리는―무엇보다도 그 성서적 바탕은―교회 안에서 언제나 특별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역할은, 우리 죄인들이 오로지 하느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점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분의 사랑을) 허용할 수 있을 뿐, 어떤 변형된 양식으로도 우리가 ‘공로로 쌓을 수 있다’고 하거나, 또는 어떠한 전제 조건이나 사후 조건에 이를 묶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의화 교리는 모든 시대에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특정 해석이 ‘그리스도교적’이라는 명칭을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동시에, 의화 교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의 선포와 실천이 주님께서 베푸신 것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교회를 위한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LV:E 69).

 

    ─ “의화 교리가 우리 교회의 전체 가르침 안에 있는 교리의 한 부분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전체 교리와 실천을 판별하는 시금석으로서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합의는―루터교 관점에서 볼 때―우리 교회들 사이의 교회 일치 대화에서 근본적인 진보이다. 우리는 그것을 열렬히 환영한다”(VELKD 95,20-26; 157 참조).

 

    ─ “루터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에게 의화 교리는 진리의 위계 질서에서 각기 다른 위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양편 모두, 의화 교리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어느 특정한 해석이 ‘그리스도교적’ 명칭을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식별하는 ‘모든 시대에 걸친 시금석’이라는 점에서 그 특수한 역할을 한다는 것에 일치한다. ‘동시에, 의화 교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의 선포와 실천이 주님께서 베푸신 것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교회를 위한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LV:E 69). 성사론과 교회론, 그리고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의화 교리의 기준론적 의미는 앞으로도 더욱 연구될 가치를 여전히 지닌다”(PCPCU 96).

 

 

 

    4.1절에 대하여: 의화와 관련해서 살펴본 죄와 인간의 나약함(19-21항)(LV:E 42 이하; 46; VELKD 77-81; 83 이하).

 

    ─ “죄의 지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 은총의 자유로운 선물인 의화를 공로로 받을 만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의화의 시작인 참회와 은총을 위한 기도, 그리고 용서에 대한 열망까지도 우리 안의 하느님의 역사(役事)임에 틀림없다”(USA, 156, 3항).

 

    ─ “양편 모두 ……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대하여 곁눈질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 그러나 응답은 ‘실적(實績)’이 아니다. 신앙의 응답은, 인간 밖에서 들어와 강요하지 않는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자체적으로 성취된다. 말씀이 마음을 건드려서 신앙을 생겨나게 할 때에, 신앙 안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로서만 ‘협력’이 있을 수 있다”(LV:E 46 이하).

 

    ─ “그러나 루터교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 수용이―이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다.―의화에서 본질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의화에서 하느님과 인간 피조물의 관계를 하느님의 ‘유일 능력설(monergism)’, 또는 그리스도의 유일 효력성으로 강조하여 이해한다.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 법령 제4-6조와 제9조는 의화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교리상의 상위성을 여전히 형성하고 있다”(PCPCU 22).

 

    ─ “루터교 편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의화와 관련하여 인간 존재의 수동성을 엄격히 강조하는 것이 결코 믿음 안에서의 전 인격적 참여를 거슬러 논란하자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의화라는 사건 자체에서 어떠한 협력도 배제함을 의미한다. 의화는 그리스도께서만이 이루시는 역사이며, 은총만이 이루는 역사이다”(VELKD 84,3-8).

 

 

 

    4.2절에 대하여: 죄의 용서와 의를 이루심인 의화(22-24항) (USA, 98-101항; LV:E 47 이하; VELKD 84 이하; 또한 4.3절 인용문 참조).

 

    ─ “의화로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되기도 하고 의롭게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의화는 법률적 허구가 아니다. 의화를 이루시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하시는 바를 이룩하신다. 그분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진정으로 의롭게 만드신다”(USA, 156,5항).

 

    ─ “개신교 신학은 가톨릭 교리가 강조하는 하느님 사랑의 창조적이고 새롭게 하는 성격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 신학은 또한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무기력하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죄는 의화 안에서 ‘단순히’ 용서받기도 하지만, 죄인을 하느님에게서 멀리하게 하는 죄의 세력 안에서 진정으로 소멸되지도 않는다”(LV:E 49).

 

    ─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약속하는 바를 성취하기 때문에, 루터교 교리는 ‘그리스도의 의화에 대한 신뢰’를 신앙 생활에서 아무 효과가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루터교 교리는 은총을 하느님의 은혜로 이해하지만, 효과적인 능력으로도 이해한다. …… ‘죄의 용서가 있는 곳에 삶과 구원도 있기 때문이다’”(VELKD 86,15-23).

 

    ─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 신학이 강조하는 은총의 인격적 성격과, 하느님 말씀과의 연계를 간과하지도 않고 …… 은총을 인간 존재 편에서 하나의 객관적 ‘소유물’(제공된 소유물일지라도)―인간이 처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LV:E 49).

 

 

 

    4.3절에 대하여: 신앙으로 그리고 은총을 통한 의화(25-27항)(USA, 105항 이하; LV:E 49-53; VELKD 87-90).

 

    ─ “우리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면, 이 때 신앙을 통한 의화에 관한 개신교의 진술은 은총을 통한 의화에 관한 가톨릭의 진술과 일치한다. 그리고 한편 개신교 교리는 ‘신앙’이라는 한 단어로, 가톨릭 교리가 (고린토 전서 13장 13절에 따라) ‘믿음과 바람, 그리고 사랑’으로 요약하는 바를 실체적으로 이해한다”(LV:E 52).

 

    ─ “첫째 계명의 의미에서 신앙은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 안에서의 희망을 뜻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됨을 강조한다”(VELKD 89,8-11).

 

    ─ “가톨릭 신자들은 …… 루터교 신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신앙의 자유로운 선물보다 앞서 의화를 공로로 얻지 않으며, 하느님의 구원 선물은 모두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고 가르친다”(USA, 105항).

 

    ─ “종교 개혁자들은 …… 신앙을, 약속의 말씀 자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용서와 그리스도와의 친교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존재를 위한 기반으로서, 이를 통해서 육신이 죄에 죽고 새로운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가지게 된다(sola fide per Christum). 그러나 이 신앙이 인간 존재를 필연적으로 새롭게 만든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새 삶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의 약속을 신뢰한다. ‘신앙’을 ‘약속에 대한 신뢰(fides promissionis)’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충분한 것이다”(LV:E 50).

 

    ─ 트리엔트 공의회, 6회기, 7장 참조: “결론적으로, 의화 과정에서 죄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께 참여함으로써, 동시에 믿음과 바람 그리고 사랑을 받게 된다”(DH 1530).

 

    ─ “개신교의 해석에 따르면, 말씀과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에 무조건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움을 위하여 충분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쇄신―그것 없이는 신앙도 없다.―은 그 자체로 의화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다”(LV:E 52).

 

    ─ “루터교 신자들로서 우리는 의화와 성화(聖化), 신앙과 행위의 구별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구별이 분리를 포함하지는 않는다”(VELKD 89,6-8).

 

    ─ “가톨릭 교리는 다음과 같은 면, 곧 인간 존재의 쇄신이 의화에 ‘기여하지 않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권리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개신교와 견해를 같이한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새롭게 창조하시는 능력을 받아들이려면 의화 은총을 통한 인간의 쇄신을 강조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믿음과 바람 그리고 사랑 안에서 쇄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총에 대한 응답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하다”(LV:E 52 이하).

 

    ─ “가톨릭 교리가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는 한, 우리의 이의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곧, 은총이 인격적인 것이며 말씀과 연결되어 있고, 그 쇄신이 …… 단지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의해 이루어진 응답일 뿐이라고 하고, 인간 존재의 쇄신이 의화에 기여하지 않으며, 확실히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권리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한 그러하다”(VELKD 89,12-21).

 

 

 

    4.4절에 대하여: 죄인으로서 의인(28-30항)(USA, 102항 이하; LV:E 44 이하; VELKD 81 이하).

 

    ─ “그들이 의롭고 거룩하다고 하여도 일상 생활에서 이따금 죄에 빠진다. 더욱이, 성령의 활동은 신자들이 일생에 걸쳐 죄악의 경향을 거슬러 투쟁하는 것을 면제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사욕과 원죄와 본죄(本罪)의 결과들이 의화된 사람들 안에도 남아 있으므로 이들도 매일같이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USA, 102항).

 

    ─ “트리엔트 공의회와 종교 개혁자들이 정립한 교리들은, 원죄와 남아 있는 사욕이 하느님께 대치되고 …… 죄악을 거슬러 싸우는 일생일대의 싸움에서 그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 세례 이후 의화된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사욕은 더 이상 그를 하느님에게서 단절시키지 않는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실제 의미에서 더 이상 죄가 아니다.’ 루터교적 어법으로, 그것은 ‘통제되는 죄(peccatum regnatum)’이다”(LV:E 46).

 

    ─ “문제는, 의화된 사람들과 관련하여 구원의 실재를 제약하지 않으면서 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이다. 루터교 신자들은 이 경향을 ‘통제되는 죄’라는 용어로 표현함으로써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인 그리스도인 신원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구원의 실재란 사욕의 죄스러운 성격을 부인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LV:E가, 의화된 사람들 안에 남아 있는 사욕을 ‘하느님과 상반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죄로 본다고 하였을 때, 의미 있는 화해가 이루어졌다”(VELKD 82,29-39).

 

 

 

   4.5절에 대하여: 율법과 복음(31-33항).

 

    ─ 바오로의 가르침은 유다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언급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극복되었다. 이 진술과 그 결과들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 트리엔트 공의회 법령 제19조 이하의 조항과 관련하여 VELKD 89,28-3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계명은 고백문의 여러 군데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 법령 제20조가, 인간은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할 의무를 지닌다고 강조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법령 제20조가, 신앙이 십계명을 준수하는 조건 아래에서만 구원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긍정할 때, 이것은 우리에게 해당된다. 교회의 계명들에 대한 법령의 언급과 관련해서, 만일 이 계명들이 하느님 계명의 표현들이라면 우리 사이에 아무런 상위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 이 단락은 4.3절과 실제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나, 루터교의 인식에 중요한 것으로서 율법에 대한 ‘판결 기능’을 강조한다.

 

 

 

    4.6절에 대하여: 구원의 보증(34-36항)(LV:E 53-56; VELKD 90 이하).

 

    ─ “문제는 이것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나약함에도, 그리고 이 나약함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LV:E 53)

 

    ─ “(종교 개혁자들의) 토대와 출발점은 …… 하느님 약속의 신빙성과 충족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힘, 인간의 나약성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신앙과 구원에 대한 위협이다”(LV:E 56).

 

    ─ 트리엔트 공의회 또한, “죄악은 용서되지 않으며, 용서받은 일도 없었고, 그리스도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로 자유롭게 구원된다고 믿어야 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고 성사들의 효과를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나약성, 그리고 의향의 결여를 대하면서 자신의 은총 상태에 대하여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가능하다”(트리엔트 공의회, 6회기, 9장, DH 1534).

 

    ─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들은 불확실성이 단순히 감내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촉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선을 그것에서 돌리고 ‘외부로부터’ 오는 참회의 성사 안에서 발해진 사죄의 객관적 효과를 진지하게, 실천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대하여야 할 것이다. …… 예수님께서 ‘네가 무엇이든지 ……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19)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신앙인이 바위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사죄에서 발해지는 하느님의 용서에 의탁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쟁이로 선언하는 것이 될 것이고, …… 이 의탁은 자체로 주관적으로 불확실할 것이며, 용서의 확신이 용서의 안전함(securitas)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또 다른 문제로 향해서는 안 된다. 신앙인은 자신의 시선을 그것에서 돌리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용서의 말씀을 보아야 할 것이다”(LV:E 53 이하).

 

    ─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약속의 객관적 실재 안에 신앙의 바탕을 두고, 죄로부터 사죄의 특별한 말씀에 신자들의 초점을 맞추려는 종교 개혁자들의 노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의 체험을 떠나서 보도록 가르치고,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그리고 그분의 용서 말씀에 의탁하게 하려는 루터의 본래 관심사는 (정죄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PCPCU 24).

 

    ─ “특히 우리가 성서적으로 새로워진 신앙의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오늘날 구원 보증의 이해와 관련된 상호 정죄는 상호 이견의 토대를 더욱 조금밖에 제공하지 못한다. 사람은 확실히 신앙을 잃거나 부인할 수도 있고, 하느님께 대한 자기 투신, 그리고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잃거나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의미에서 믿는다면, 그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 말씀에서 신뢰할 수 없는 분이라고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도―루터의 용어로―신앙이 구원의 보증이라는 것은 옳다”(LV:E 56).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 개념과 관련하여 ‘계시 헌장’ 5항을 보라.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을 드러내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에 자의(自意)로 찬동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 의탁하는 것이다.”

 

    ─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신앙의 확실성(certitudo)과 인간 존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세속의 확실성(securitas) 사이의 루터교의 구별은 LV에서 충분히 명료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한 그리스도인이 ‘충만하고도 완전하게 믿는지’(LV:E 53) 여부에 대한 문제는 루터교의 견해에서 제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앙은 절대로 자기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은총이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이처럼 외부로부터(extra nos) 주어진다”(VELKD 92,2-9).

 

 

 

    4.7절에 대하여: 의화된 사람들의 선행(37-39항)(LV:E 66 이하; VELKD 90 이하).

 

    ─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은총, 곧 의화를 얻는 가능성을 배제하고(법령 제2조: DS 1552), 영원한 생명의 획득 또는공로를 그리스도 안의 지체를 통한 은총 자체의 선물에 의지한다(법령 제32조: DS 1582). 선행은 선물로서 ‘공로’이다. 종교 개혁자들이 인간 자신의 업적 안에서의 ‘하느님 없는 신뢰’를 공격하기는 하지만, 공의회는 어떠한 권리 요청이나 그릇된 확실성의 개념도 배제한다(법령 제16조: DS 1548 이하). 공의회가, 선행의 ‘증여된’ 성격을 언급하였음에도, 인간 존재의 책임성을 표현하고자 공로 개념을 도입한 바 있는 아우구스티노와의 연계 설정을 희망한 것은 분명하다”(LV:E 66).

 

    ─ 우리가 (트리엔트 공의회) 법령 제24조의 ‘원인’이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 개념을 강조하는 의화 교령 16장처럼 더욱 인격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에, 우리는 공로에 대한 가톨릭 교리를 4.7절 둘째 단락의 첫 문장에서 다루어진 것처럼―은총 안의 성장, 하느님께 수락된 의로움 안의 감내, 그리스도와 맺는 더욱 깊은 친교―서술할 수 있다.

 

    ─ “오해를 자아내는 ‘공로’라는 용어가, 성서에 나오는 ‘임금(賃金)’ 또는 보상의 참된 의미와 관련되어 보여지고 생각된다면, 많은 반(反)명제들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LV:E 67).

 

    ─ “루터교 고백문들은 의화된 사람이 받아들인 은총을 잃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 이처럼 고백문들은 은총의 보전과 그 안에서의 성장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 법령 제24조에서 언급하는 의로움은 인간 존재 안에서 결실을 자아내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법령 제24조의 ‘의로움’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을 받아들이심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적합하다. 이 의로움은 언제나 완전하기 때문에, 이것과 비교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의 행업은 ‘결실’이며 ‘표지’일 뿐이다”(VELKD 94,2-14).

 

    ─ “우리는 법령 제26조와 관련하여, 영원한 생명이 상급으로 서술되는 「호교론」(Apology)을 인용하고자 한다. ‘……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약속 때문에 얻게 되는 것이기에 상급임을 인정한다’”(VELKD 94,20-24).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세계 연맹의 공식 공동 성명서

 

 

 

    1.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서 도달된 일치에 바탕을 두고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세계 연맹은 함께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 선언문에 담긴 의화 교리의 이해는 의화 교리의 기초 진리에 대하여 루터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합의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합동 선언문: 이하 ‘선언문’으로 약기, 40항). 이 합의에 바탕을 두고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세계 연맹은 함께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렇게 16세기의 교리적 정죄들은 의화 교리와 상관하는 한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될 수 있다. 이 선언문에 담겨 있는 루터 교회의 가르침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발한 정죄에 해당되지 않는다. 루터교 고백문 안의 정죄들은 이 선언문에 담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적용되지 않는다”(선언문, 41항).

 

 

 

   2. 합동 선언문에 대한 루터교 세계 연맹의 1998년 6월 16일자 결의와 가톨릭 교회의 1998년 6월 25일자 논평과, 그리고 양편에서 각각 제기된 문제들과 관련하여 첨가된 진술(이하 ‘유첨’으로 표기)은 합동 선언문에서 도달된 합의를 앞으로 더욱 구체화시킬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양편의 정죄들은 합동 선언문에 발표된 바와 같이, 대화 상대편의 가르침에 적용되지 않음이 분명하게 된다.

 

 

 

   3. 두 대화 당사자는 의화 교리의 성서적 바탕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심화하는 데 투신할 것이다. 그들은 아울러 ‘합동 선언문’과 ‘유첨’의 진술보다 더 진전된 의화 교리의 공동 이해를 추구할 것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상위성들이 ‘조정되고’ 더 이상 분열시키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는, 다양성 안의 일치, 완전한 교회 친교를 이룩하기 위하여 필요한 명료화 작업으로서, 합동 선언문 자체에서 특별히 언급된 쟁점들(선언문, 43항)에 대하여, 이미 이루어진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지속적인 대화가 각별히 요청된다.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은 의화 메시지를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적합한 언어로 설명하고자,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개인적 관심사와 사회적 관심사 양편과 관련시켜 이해하고자, 공동의 증언 안에서 교회 일치적으로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

 

 

 

   ─ 이 서명 행위로써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세계 연맹은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을 전체적으로 추인한다.

 

 

 

    유 첨

 

 

 

    1. 이하의 설명은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서 의화의 기본 진리와 관련하여 도달된 합의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과거 시대의 상호 정죄들은 합동 선언문에서 발표된 것과 같은 가톨릭 교리들과 루터교 교리들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2. "우리는 함께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오로지 은총에 의해 우리는 하느님께 수락되어, 우리를 선행으로 준비시키고 부르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받게 된다”(선언문, 15항).

 

 

 

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며, 동시에 죄의 구속력(拘束力)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선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함께 고백한다”(선언문, 22항). 의화는 죄의 용서이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선물을 베풀어 주심”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 5,1).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우리는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진정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새로워졌으며, 우리 안의 그분의 역사에 언제나 의지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2고린 5,17). 의화된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죄인들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1요한 1,8-10; 선언문, 28항 참조).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습니다”(야고 3,2). “뜻 아니한 허물이야 누가 다 아오리까. 제가 모르는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소서”(시편 18,13).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에 오직 세리와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13). 이것이 우리 전례들 안에서 다양한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함께 다음과 같은 권유를 듣는다.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로마 6,12). 가톨릭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은 합동 선언문 29-30항에서 표명한 것과 같이 이 주제에 대한 상이한 접근 자세에도 불구하고, 함께 이러한 정도까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을 이해한다.

 

 

 

   나) ‘사욕편정(concupiscence)’ 개념은 가톨릭과 루터교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루터교의 고백 문서들 안에서 ‘사욕편정’은 인간 존재의 자기-추구 욕망으로서, 율법에 비추어 영성적으로 이해할 때 죄로서 간주된다. 가톨릭의 이해에서 사욕은 세례 이후까지도 인간 존재 안에 남아 있는 죄로부터 오고, 죄를 향하도록 압박하는 한 경향이다. 여기에 포함된 상위성에도 불구하고, 루터교 전망에서 욕망은 죄가 공격을 가하는 틈이 된다. 죄의 세력 때문에 전체 인간 존재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경향을 지닌다. 이 경향은, 루터교와 가톨릭 양편의 개념에 따를 때,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원초 계획과 부합하지 않는다”(선언문, 30항). 죄는 인격적 성격을 지니며, 그렇기에 인간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한다. 그것은 낡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의 결여이다.

 

   세례에서 구원의 실재와 죄의 세력에서 오는 위험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죄의 용서와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의 쇄신이 강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화된 사람 또한, “공격을 가하는 죄악의 세력 앞에 끊임없이 내던져져 있으며(로마 6,12-14 참조), 옛 아담의 이기적 욕망 안에서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에 대하여 평생 투쟁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선언문, 28항).

 

 

 

    다) 의화는 “오로지 은총에 의해서만”(선언문, 15-16항),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만 발생하고, 인간은 ‘행업과는 별개로’(로마 3,28; 선언문, 25항 참조) 의화된다. “은총은 신앙이 한 인간 안에서 시작될 때뿐만이 아니라, 신앙으로서 존속하는 한, 신앙을 이룩한다”(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I/II 4, 4 ad 3). 하느님 은총의 역사(役事)는 인간의 활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곧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애쓰도록 부름 받는다(필립 2,12 이하 참조). “성령께서 말씀과 성사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재건과 쇄신의 당신 역사를 시작하시는 즉시,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이 확실하다”(협약 정식, FCSD II,64 이하; BSLK 897,37 이하).

 

 

 

   라) 의화된 사람이 믿음과 바람 그리고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인 은총은 언제나 하느님의 구원과 창조의 역사(役事)에서 주어진다. 그러나 이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 의화된 사람들의 책무이다. 선행을 하도록 권고하는 것은 신앙을 실천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다(BSLK 197,45 참조). 의화된 사람들의 선행은 “그들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하여, 곧 다시 범죄함으로써 소명으로부터 추락하지 않도록 행해져야 한다”(Apol. XX,13; BSLK 316,18-24; 2베드 1,10과 관련하여 FCSD IV, 33; BSLK 948,9-23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합동 선언문 38항과 39항에서 언급된 “은총의 보존”에 대해서 함께 이해할 수 있다. 확실히, “의화된 사람들에게 전제되거나 뒤따르는 것이 무엇이든, 신앙의 자유로운 선물은 의화의 바탕도 아니고 그것을 공로로 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선언문, 25항).

 

 

 

    마) 의화로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게 된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로마 6,5; 8,17; 요한 3,36 참조). 최후 심판 때에, 의화된 사람들도 그들의 행업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마태 16,27; 25,31-46; 로마 2,16; 14,12; 1고린 3,8; 2고린 5,10 등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 찬 선고가 당신의 뜻에 일치하는 우리 삶과 활동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승인하실 것이라는 심판을 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안에서 그릇된 모든 것은 드러날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지 않을 것이다. 협약 정식 또한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신앙인들은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선행들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명백한 명령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저들과 더불어 기뻐하시고, 현세와 미래의 생활에서 그들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FCSD IV,38). 어떠한 상급도 우리가 주장할 권리를 지니지 않는 은총의 상급이다.

 

 

 

   3. 의화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척도이며 시금석이다. 어떠한 가르침도 이 기준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화 교리는 “우리 교회들의 모든 가르침과 실천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께 정향하도록 하는 불가결한 기준이다”(선언문, 18항). 이와 같이 의화 교리는 교회의 근본적인 삼위일체 신앙 고백의 전 맥락 안에서 그 나름의 진리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그분의 새롭게 하시는 선물을 부어 주시는, 곧 그리스도를 한 분 중개자(1디모 2,5-6)로서 그 무엇보다도 신뢰함을 공동의 목표로 한다”(선언문, 18항).

 

 

 

   4. 가톨릭 교회의 논평은 루터교 시노드나 루터교 세계 연맹의 권위를 의문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세계 연맹은 대화를 시작하였으며, 서로를 동등한 권리를 지닌 대화 상대로서(par cum pari) 전진적으로 대해 왔다. 교회 안에서의 권위에 대한 상이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두 대화 당사자는 상대방의 교리 결정 과정을 존중한다.

 

 

 

1. 슈말칼덴 조항, II, 1; Book of Concord, 292.

 

2. “Rector et judex super omnia genera doctrinarum” Weimar Edition of Luther’s Works(WA), 39, I, 205.

 

3. 몇몇 루터교 교회들은 그들의 구속력 있는 고백문들 가운데 오직 “아우크스부르크 고백”(The Augsburg Confession)과 루터의 「소교리서」(Small Catechism)만을 포함시킨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서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의화에 관한 아무런 정죄도 담고 있지 않다.

 

4. Report of the Joint Lutheran-Roman Catholic Study Commission, published in Growth in Agreement(뉴욕; 제네바, 1984년), 168-189면.

 

5. Published by the Lutheran World Federation(제네바, 1994년).

 

6. Lutheran and Catholics in Dialogue VII(미니애폴리스, 1985년).

 

7. 미니애폴리스, 1990년.

 

8. “교리 판결들-교회 분리적?”(Lehrverurteilungen-kirchentrennend?) 문헌에 대한 연합 교회와 루터교 세계 연맹 독일 국가위원회의 아놀즈하이너(Arnoldshainer) 회의의 공동 입장 표명, in: O¨umenische Rundschau 44(1995), 99-102면; 이 결의에 바탕을 둔 의견서들을 포함하고 있는 Lehrverurteilungen im Gespra¨h, Die ersten offiziellen Stellungnahmen aus den evangelischen Kirchen in Deutschland(괴팅겐: Vandenhoeck & Ruprecht, 1993년) 참조.

 

9. ‘교회’라는 단어는 이 선언문에서, 이 용어와 관련된 교회론적 쟁점들을 모두 해결하기를 지향하지 않고, 이 선언문에 참여하는 교회들의 자기 이해를 사유하고자 사용되고 있다.

 

10. “Malta Report”, 26-30항; Justification by Faith, 122-147항 참조. 의화에 관한 미국 대화의 요구에 따라, 비(非)바오로계 신약성서 본문들이 Righteousness in the New Testament, by John Reuermann, with responses by Joseph A. Fitzmeyer and Jerome D. Quinn(필라델피아: 뉴욕, 1982년), 124-180면에 언급되어 있다. 이 연구 결과들은 대화 보고서 Justification by Faith, 139-142면에 요약되어 있다.

 

11. “All Under One Christ”, 14항, in: Growth in Agreement, 241-247면.

 

12. WA 8, 106; American Edition 32, 227 참조.

 

13. DS 1528 참조.

 

14. DS 1530 참조.

 

15. Apology II, 38-45; Book of Concord, 105 이하 참조.

 

16. DS 1515 참조.

 

17. DS 1515 참조.

 

18. DS 1545 참조.

 

19.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Dei Verbum), 5항 참조.

 

20. 위와 같음.

 

21. Condemnations of the Reformation Era,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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