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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713} 성 루도비코-마리아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한시몬 쪽지 캡슐 작성일2002-09-28 조회수1,719 추천수0 신고

(질문)

 

레지오 시작기도문 안에 있는 글입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루도비코-마리아 이분에 성 루도비코-마리아 이분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답변)

 

성 루도비꼬 마리아 그리니옹 드 몽포르(1683-1716)

 

루도비꼬 마리아 그리니옹은 프랑스 몽포르이 어느 가난한 부모밑에서 자랐는데, 18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였다. 18명의 자녀 가운데 3명이 사제, 2명이 수녀가 되었다. 그는 렌느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했고, 17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루도비꼬는 랄러망 신부의 문하생으로서 프랑스 학파의 깊은 영성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고, 그이 스승은 슐피스회 제2대 총장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1700년부터 죽을 때까지 순회 선교사로 활약했는데 서방 교회 10개 교구를 두루 다니던 중, 43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가 지도했던 "지혜의 딸 수녀회"와 "마리아 선교회"는 그의 선종 후에 발전하기 시작했고, 1947년 7월 20일, 비오 1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루도비꼬는 사도 성 바오로와 같은 방법으로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받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사도처럼 악을 근본적으로 물리쳤고, 성령께 자신의 전 생애를 완전히 내맡긴 삶을 살았다. 그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사도 바오로처럼, 영세받은 때부터 동정녀의 손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한다. 마리아와의 신비적인 일치가 그의 영성 생활의 핵심이자, 그의 선교사적 사도직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신심에 불탔던 루도비꼬는 약 16,000마일을 선교 여행하였고, 수많은 마리아 관계 저술을 남겼다. 그가 쓴 164개의 마리아 찬가 원고는 모두 20,000행이 넘는데, 그중에서 널리 애송된 것은 24개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토니우스 토마스 O.P. 신부가 다이제스트했던 "신비로운 장미"의 원본은 성 루도비꼬가 쓴 "지극히 거룩한 로사리오의 놀라운 비밀"이다. 이 저서에서 루도비꼬는 이 대중적인 신심은 로사리오에서 얻는 영적, 사도적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또 그리스도론적 영성의 종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저서 "영원한 지혜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서 마리아 신심을 제시하여 끝맺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생전에 빛을 본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사후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루도비꼬의 마리아 관계 저서는 "마리아의 비밀"이라는 소책이다. 비록 소책에 불과하고, 또 영적 지도 형식을 띤 편지이긴 하지만,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일치 방법을 다룬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다른 저서는 저 유명한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올바른 신심"이다. 50개국 이상에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 책은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에 완전히 잠기는 영생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몽포르 신부는 자신의 상상이 아니라 복음서에 확고한 기반을 둔 신심을 발전시켰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의 숨은 생활이전적으로 마리아께 의존되어 있었다는 견지에서 우리들도 마리아께 의존해야 하는 모델을 찾아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드는 세례가 우리를 마리아의 자녀로 만든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또한 그의 봉헌 행위는 이러한 자녀 관계를 인정하고 사는 것으로 알아 들었다.

 

그리고 몽포르 신부가 영혼의 영적 자세를 설명했던 네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께 마음을 열어야 한다. (2) 마음으로 생명의 모델과 일치한다. (3) 마리아 안에서 모성적 사랑을 알아본다. (4) 마리아께 대한 봉사에 전적으로 위탁하고,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봉사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한때 많은 반대를 받았고, 급기야는 설교권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마리아의 세기를 여신 예언자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

 

1716년 4월 28일, 루도비꼬 마리아 신부는 쌩 로랑-쉬르-세부르의 한 선교지에서 갑작스런 병으로 선종하셨습니다.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에는 성모상을 잡고... "비록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몽포르의 이 신부님은 무려 15,000마일을 맨발로 다니시면서 일곱 개 교구를 복음화시키셨고, 가장 반항적인 사람들을 복종시켜 냉담자들의 가슴에 신앙의 불을 지르면서 백 개 이상의 본당을 변화시켰습니다.

 

신부님은 마음을 움직이는 이 선물을 전하기 위하여 많은 순례를 하셨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기도를 잘 들어 주셨다"고 디어리 몬시뇰은 추모하셨습니다. 그리고 1947년 7월 20일 비오 12세 성하께서는 그분을 성인 반열에 올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모든 사도직 임무 뒤에 있는 가장 큰 힘과 예수님을 위해 영혼들을 이끌고 정복하셨던 비결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었다."

 

과연 그랬습니다. 신부님은 수도회(마리아의 동료 선교회, 지혜의 딸들 선교회)의 창설자일 뿐 아니라 위대한 선교사, 아니 선교사 이상의 공경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을 가지는 모든 비밀스런 방법들을 알고 있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시라고 생각하셨고, 마리아 신심의 뿌리를 아주 깊이 탐구하셨으며, 그 신심의 범위를 크게 넓히심으로써 마리아의 세기를 여셨던 예언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마리아 신심의 목적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며, 마리아는 오직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 중심의 성모 신심을 강조하셨고, 성모님께 대한 완전한 내적 복종을 요구하시면서 우리가 마리아에 의해 온전히 형성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의 거룩한 노예", "성모님께 봉헌"등은 성인이 강조한 성모님께로의 완전한 복종을 의미합니다.

 

사도적 선교사로서의 이 성인은 1673년 1월 31일, 프랑스의 브리따뉴 지방의 몽포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나시고, 1700년 6월 5일 사제로 서품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제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못했습니다. 프와티엘 교구에서는 선교 활동을 금지당하기도 했는데 이 때 그분은 실망하지 않고 그 길로 로마까지 걸어가서 교황 클레멘스 11세로부터 "사도적 선교사"라는 칭호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교회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얀세니즘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성모님 공경을 강조하셨지만, 그분 스스로는 높은 경지의 기도와 고행을 하셨고, 그것이 오히려 동료들에게 불편한 느낌을 주어 여러 교구와 본당에서의 소외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선교활동이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분은 온갖 십자가를 오히려 큰 축복과 승리의 표시로 보았고, "하느님의 지혜를 받고 보관하는 가장 놀라운 비결은 복되신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라고 믿었던 신념이었습니다. 그분은 마리아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몽포르의 신부님은 수많은 찬미가와 운문으로 된 기도문을 만드셨는데, 오늘날까지 프랑스 교회가 애창하는 곡들이 상당수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가장 큰 업적은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책의 집필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구분은 이렇게 단언하십니다. "우리를 마리아께 전적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모님은 우리를 보다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

 

몽포르이 성 루도비꼬 마리아는 참으로 예언자이십니다. 그분은 마지막 때에 마리아의 보호 아래 마리아의 사도들이 사투를 벌일 종말적인 악과의 싸움을 보셨고, 그 승리를 예견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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