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영이 가난한 사람들"[Re : 745]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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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호경 | 작성일2002-11-16 | 조회수2,793 | 추천수0 | 신고 |
+ 찬미 예수님 !!!
1. 첫 번째 나눔
현재 신약성서의 그리스어원문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Nestle-Aland판에서 마태오 복음서 5장 3절의 첫 부분을 보면 "Μακαριοι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네우마티)입니다. 이를 그리스어 문구대로 직역하면 "행복하여라(혹은 복되어라) 영이(혹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서에서의 번역을 보면, 먼저 <공동번역성서>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이고, <200주년 기념성서>에서는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의 <새번역성서>에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번역에 있어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어 "프네우마티"를 "靈" 으로 직역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물론 이 구절을 번역이 아니라 해설을하는데 있어서는 그리스어 "프토코이"를 "가난한"(poor)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간구하는"(beg)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들에게 우선 제기되는 문제는 "영" 혹은 "마음"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2. 두 번째 나눔
사실 "靈"과 "가난한 사람들"은 단독으로는 매우 흔한 낱말들이나, 신·구약을 통틀어 함께 붙여 사용한 경우는 여기밖에 없다고 합니다. 성서에서의 구절이 그만큼 없기 때문에 공통적인 해설을 찾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문구의 뜻에 대한 해설이나 이해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해설서에 나와있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설들을 간단히 요약하여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해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제 몫이 아닙니다. 저에게 그럴 자격이나 앎도 없음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1) 1947년에 발견된 쿰란 공동체의 여러 문헌에서 뜻밖에도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문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들 공동체는 소위 말하는 "빈자(貧者)의 영성"에 취했던 까닭에 자기네 공동체 스스로를 "영의 가난한 이들, 은총의 가난한 이들, 당신 구원의 가난한 이들, 가난한 이들"로 자처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쿰란 공동체의 다른 문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들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겸손한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2)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실제로는 사유재산을 적게든 혹은 많게든 소유는 하고 있지만, "물욕을 버린 사람"을 뜻한다는 해설이 있습니다.
3) 가톨릭 수도원에서 내세우는 해설로는 사유재산마저도 포기하고 청빈서원을 발한 "수도자"야말로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주장입니다.
4) 예수회의 영성 수련 혹은 불가(佛家)의 선(禪)수행에서 나온 발상으로, "영으로 가난함"은 "영의 부추김을 받아 자발적으로 가난함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청빈"을 뜻한다는 해설입니다. 즉 가난을 체험하고 감수한다기보다는 가난을 자기의 숙명으로 여기는 경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마태오 복음서의 전체의 문맥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이라는 평가입니다.
5) 여기서 "靈"은 성령이나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인간의 한 중심, 더 나아가서는 그 인간 전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물질적, 영적 시련을 받으면서도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을 뜻한다는 주장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소위 "아나윔"(가난한 자)과 같은 뜻의 해설입니다.
6) 교부들인 떼르뚤리아노와 치프리아노의 해설로,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실제로 "금전적으로 가난한 사람, 금전적으로는 부자이지만 청빈의 정신을 가진 사람, 실제로 가지고 있고 또 손에 넣을 수 있는 금전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입니다.
7) 복음적 입장에서 본다면 "영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이 "실제로도 가난하고, 더불어 마음까지도 청빈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질투로 마음을 채우고, 금전과 명예에 대해 욕심을 부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둑질과 살인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부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만족해 하며, 인내하고,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과 박해를 참는 사람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님은 축복을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나눔
사실 번역에 있어서의 단어의 선택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현재적 뉘앙스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근사하다"는 말의 원래의 뜻은 "비슷하다, 유사하다"라는 의미이지만 지금은 "멋지다"라는 의미가 더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번역이 물론 의미상으로는 혹은 신학적으로는 위의 여러 해설들에 맞추어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언어 정서상으로는 모순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금전적으로는 가난할 지언정 마음만은 부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님께서 실어주신 그러한 번역("성령을 간구하는 이")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님께서 실어주신 번역이 맞고, 다른 번역은 완전히 잘못된 번역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님께서 실어주신 그 번역도 틀린 번역일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그리스어 원문의 직역은 "영이(혹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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