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부활에 대한 말씀중에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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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호경 | 작성일2004-07-08 | 조회수1,502 | 추천수0 | 신고 |
+ 찬미 예수님 !!!
1. 우선 질문하신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로 알아두셔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질문해 주신 루가 복음서의 구절은 예수님과 사두가이파의 부활에 대한 논쟁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은 공관 복음서에 모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2) 당시 사두가이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정착되었습니다. 물론 부활에 대한 개념은 그 이전인 이사야서나 다니엘서에 잠간 내비치기는 하였지만(이사 16,29; 다니 12,1-2), 사두가이파는 모세오경만을 자기네의 경전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내용도 사두가이파에게는 의미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3) 사두가이파와는 달리 일반 유다인들이나 바리사이파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부활을 믿었지만, 유다교와는 그 개념에 있어서 약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부활의 세계는 현세의 생활보다 훨씬 복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나, 그 삶의 질적인 면에서는 현세의 삶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리스도인들의 부활 세계관은 다릅니다. 곧 부활의 세계는 현세의 삶의 연장이 아니며, 하느님의 능력으로 창조된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서 현세의 삶의 모습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개념입니다(1고린 15,44; 필립 3,21). 즉 부활의 세계는 현세의 물질적 조견과 지상적 조건을 따르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영적인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부활에 대한 개념은 일부 랍비들의 사상이나 탈무드의 미쉬나, 그리고 유다교 묵시문학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4) 신약 시대의 유다인들은 앞서 죽은 선조들은 이미 하늘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있으며(루가 16,22-31) 장차 부활해서는 더욱 행복하게 되리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마태 8,11-12; 루가 13,28-29).
2.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표현
1) 이 표현의 원래의 뜻은 히브리인들의 대표적인 선조 3인을 연속으로 내세우며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부름으로써, 하느님은 죽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섬기는 주님이시며, 세세대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주님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이 표현은 출애굽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로서(출애 3,6),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대목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당연히 부활에 대한 개념은 전혀 들어있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탈출기의 이 구절을 관계가 전혀 없을 것 같은 부활에 대한 논쟁이야기에서 인용하신 까닭은 앞의 전제 2)번에서 보듯이 사두가이파들이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구약성서에서 처음으로 부활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기는 하나 사두가이들이 알지못하는 이사야서나 다니엘서를 인용하지 않고, 그들이 알 수 있는 출애굽기의 이 표현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3) 이 표현과 뒤이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라는 표현, 즉 부활에 대한 개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보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에게 혼돈을 주고 있습니다. 님께서 아시고자 하는 것 역시 바로 이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나눔
1) 먼저 앞의 전제 4)번을 다시 한 번 상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신약성서의 내용이라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신조를 반영하고 있는 책이라는 점 또한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문맥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참조하고, 또한 다음 구절인 루가복음 20장 38절의 구절과 같은 문맥으로 연결하여 이해하시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입니다. -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표현과 뒤이어 나오 는 부활을 표현하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라는 표현이 서로 연관된 표 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신조, 곧 죽은 조상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있으며, 장차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더욱 복된 삶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곧 이미 죽은 자들이 언젠가는 다시 모두 살아난다는 믿음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 그래서 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이미 죽은 대표적인 그들의 조상들의 이름을 열거하 고 하느님께서 그들의 하느님이심을, 그래서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섬기고 있는 하느 님과 죽은 선조들이 섬겼던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 다. - 이것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신조였고, 이 신조 때문에 구약성서 본 래의 뜻으로 보면 두 문구가 원래는 관련이 없었지만, 여기 신약성서에서는 관련이 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2) 그렇게 하고 여기 루가 복음서 20장 37-38절의 내용을 다시 풀이해본다면, 하느님은 당신을 섬긴 선조들을 죽은 채로 저승에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 능력으로 다시 살려내시어 거느리시는 신이므로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먼저 죽음을 맞았을지라도 지금 살아있는 자들과 같이 결국 모두 살아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표현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마르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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