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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바리사이파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허선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13 조회수475 추천수1 신고

 1. 기원과 명칭

바리사이인이란 이름은 페루쉼, 즉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바리사이인의 기원은 에즈라 이전으로 돌아간다. 성전과 종교 의식을 빼앗긴 유배 중에 유다인 종교의 중심이 되고 생활의 틀을 마련해준 것은 율법이었고 그 후에도 율법은 유다교의 생명이 되었다. 유배 후 유다인 생활의 근본 요소가 된 것은 성전이 아니라 율법이었고, 따라서 모세오경이 성전에 맞섰고 율법 학자가 새 계급이 되어 모세오경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종교 의식을 맡아 보았다. 이로 인해 세습 성직자들의 힘이 약화되었고 헬리니즘 문화가 유다인 생활을 침범한 후로는 성전 의식이 정지되어 갔으나 율법만은 유다인의 충성심의 규합점이 되었다.

바리사이 운동은 유다인의 신앙을 헬레니즘적인 외세에 대항한 마카베오 전쟁 때에 하시딤(율법에 충성을 다하는 경건한 사람들)들에 의해 시작된다. 이들은 정치적인 목표를 안중에 두지 않고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가득 찼으므로(1마카 7,13) 올바른 예배와 율법을 따르는 생활이 회복되었을 때 그들은 정치적인 권력 쟁취를 일삼았던 하스몬 왕가에서 분리되었다. 그들과 왕가 사이에는 간격이 벌어졌고 알렉산더 얀네우스 치하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일어나 많은 바리사이인이 처형당하였다.

처음의 바리사이파는 평신도 서기관이였으며 차차 성직자도 가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혁은 성직자 계급 및 그 지지자들(사두가이파)과 국내의 평신도 신분 및 그 신봉자들(바리사이파) 사이에 2세기 동안의 악전고투를 유발하였다.

2. 특성과 교리

(1)주요 특성

바리사이인들은 알렉산더 얀네우스 이후 폭력을 사용하여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경건한 생활, 기도, 금식을 통해서 하느님이 인도하실 미래의 전환을 준비하였다.

첫째,  그들은 율법을 엄격히 지켰는데, 특히 제의적인 정결 규정과 십일조 계명을 엄격히 지킬 의무가 있었다. 이외에도 부가적인 경건 행위, 즉 회개하고 이스라엘과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지켰다. 바리사이인 공동체는 계명을 더 잘 지키기 위해 공동 식사에 모이기도 하였다.

둘째,  바리사이인들은 율법 존중주의 및 의식주의와 함께 옛부터의 율법 존중의 규약이 가지는 좁은 견해에 도전하고 이를 바로잡는 예언서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근대주의, 진보주의자들이었다.

(2)교리와 신앙

바리사이인들의 교리와 신앙을 논하는 근거는 요셉푸스나, 신약, 솔로몬의 시편 등에서 볼 수 있다. 교리상 솔로몬 시편은 기원전 1세기경의 바리사이적이고 반사두가이적인 문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에 속한다.

첫째,  바리사이인은 역사가 하느님에 의해 통제되고 하느님의 목적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봤다. 그러나 구전 전승을 인정함으로 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도 인정을 했었다. 이에 반해 사두기이는 모세 오경과 더불어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의 자유 의지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부활 신앙인데 바리사이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으며 이승에서의 소행에 따라 내세에서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 다고 했다.(마르 6,16 :루가 9,9 : 다니 12,1-3).

셋째,  천사론을 보면 바리사이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천사론을 가지고 있다.(사도 23, 8).

넷째,  그들은 부활 신앙을 통해서 메시아 희망을 보존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정결하고 거룩하게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한다면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로 나타나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것으로 기대하였다(솔로몬 시편 17, 23-18,9).

바리사이인들은 메시아 시대를 준비하면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지키기에 그들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율법에 울타리를 쳤다. 예수는 바리사이인들이 의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율법의 외적인 준수만을 생각하고 마음의 정결을 모르는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바리사이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산헤드린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사도 34-40장 :23 6-8). 로마인들의 지배에 대한 백성의 증오가 무력 폭동이 일어날 만큼 고조되었을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그 불행을 더 이상 저지할 수 없었고 많은 바리사이가 그 폭동에 가담해 전사하기도 했지만 재난을 견디어 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운동은 70년 이후 회당의 정신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이 대표하는 교리는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유다이즘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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