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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유영봉 몬시뇰 님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3 조회수1,374 추천수0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

- 유영봉 몬시뇰-

 

묵상 길잡이: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 탄생과 생애와 죽음이 예수의 전형(前型)이라 할 수 있다. 요한은 자신의 백성을 만들지 않고 모든 이를 예수께로 인도했다. 참으로 모든 신앙인이 가야 할 모범이시다.

 

1.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예수 탄생의 전주곡이다
세레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리고 오래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일출을 알리는 새벽빛처럼 오신 분이다. 오랜 침묵의 기다림,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며 참고 기다려 온 밤의 끝자락에서 동트는 해와 같이 오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열강들의 쉴 새 없는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참으로 고달프게 살아왔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할 그 때에도 로마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며 메시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예언자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마태3,4)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3,2)외치자 백성들의 시선은 일제히 요한에게로 쏠렸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그분이 오시는가 보다"하며 긴긴 기다림의 한(恨)이 한꺼번에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요한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다.


2. 요한은 자신의 백성을 만들지 않았다.

가뭄에 단비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눈이 번쩍 뜨일 사
 
건이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 강으로 요
 
한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마태3,5-6)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요
 
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다.(마태3,3,13이하) 그만큼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
 
다.

이스라엘 역사에 가끔 등장했던 가짜 메시아들은 "나를 따르라"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
 
기를 메시아로 알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 나보다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르1,7-8)고 선언하였다.

남의 입에 들어간 것도 빼앗아 먹으려고 혈안이 된 듯한 세상에서, 자기를 메시아로 여기며 모여드는 백성들
 
을 그대로 예수님께로 돌려보내기란 분명 쉽고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
 
으로 만들지 않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일'',사목자들
 
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
 
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세례자 요한을 격찬하셨다.


3. 예언자는 죽음으로 말한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죽음(마르6,14-29참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예수님이 그렇게 극찬한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시숙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사는 여자 헤로디아의 욕심과 원한의 희생물로 어이없이 죽고 만다. 딸의 춤사위를 보고 기분이 좋아 딸에게 내 뱉은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마르6,22-23)는 한마디의 허풍 가득한 맹세. 이 기회를 놓칠세라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시켜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가져다 주십시오."(마르6,23)하고 청한다. 참으로 기쁨을 나누는 생일날에, 초청한 귀빈들 앞에서, 그것도 어린 딸을 시켜 청할 수는 없는 끔찍하고 사악한 발상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그 헌신짝 같은 맹세를 지켜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고 만다. 어찌 하느님의 예언자가 이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종으로 열심하게 살았다면, 죽음을 맞을 그 순간에는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가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 대 예언자가 이렇게 개죽음을 하다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가끔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묵상해 봐야 한다. 예언자 중의 대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하며 인간들뿐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도 버림받은 것 같은 극도의 고독 중에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은 결코 평화와 위로 가득한 가운데 숨을 거두시지 않았다. 링컨도, 마르틴 루터 킹도, 마하트마 간디도 모두 괴한이 쏜 총탄에 맞아 비명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한다. 예언자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세상에 외친다. 그러나 예언자의 가장 힘있는 외침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서 울려 퍼진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외치다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할 때 진정한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고, 그 정의를 외치다 죽음을 당했기에 참 예언자가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사명을 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못지 않게 ''무엇을 위해 죽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축일에 깨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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