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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서의 세계 : ‘성명철학’---임승필 신부님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1-01-24 조회수910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성명철학’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시편 91,14).
 
임승필
 
 
우리 나라에서는 이른바 ‘성명철학’이 성행한다. 이것은 성명을 분석해서 그 사람에게 닥칠 운명이나 길흉을 미리 판단하는 점술을 뜻한다. 이름을 짓거나 고칠 때에 적용하는 이 점술은 본디 원의미의 철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것에 빗대어 ‘성명철학’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명칭의 이면에는 점술을 정당화시키려는 뜻도 숨겨져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달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기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면 성서의 사람들은 이름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지녔는가? 이제 성서에 나타나는 ‘성명철학’을 살펴보기로 한다.
 
성명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사자를 가리키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짓는 구실을 한다. 물론 사람의 수가 불어나면서 이름만 가지고는 여의치 않아, 출신지라든가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까지 동원되기도 하지만, 성명의 기본 기능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서고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이름이 이보다 훨씬 깊고 넓은 기능과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이름은 그냥 그 사람에게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본질의 일부를 이룬다. 여기에서부터 여러 가지 결과가 나온다.
 
이름이 그 사람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이름이 남아있는 한 그 사람도 계속 존재한다. 죽은 이도 후손들의 이름 속에 계속 존재한다. 반대로, 이름이 없어진다는 것은 사람까지 없어짐을 뜻한다. 죄인에게 내리는 가장 큰 벌은, 하느님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서”) 지워버리시는 것이다(신명 29,19; 시편 69,29). 이름을 제거함은 곧 그 사람을 지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림을 뜻한다. 이러한 연유로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큰 욕이 될 수밖에 없다(욥 30,8).
 
이름이 사람이나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이름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나 사물을 속속들이 앎을 뜻한다. 그래서 이름을 알면 상대방을 지배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시는 분’이라는 뜻을 내포한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일이, 큰 뜻을 지닌 계시로 부각된다. 물론 인간이 하느님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분을 지배하거나 조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름을 알려주셨다 함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와 본질의 일부를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당신을 이용하여도 좋다는 허락과 같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하나의 담보로 쓸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면, 그분께서는 그 이름이 뜻하는 당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신다는 것이다(“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해방하여 영예롭게 하리라” : 시편 91,15). 결국,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분을 믿음을 뜻한다(시편 20,8). 그분의 존재를 알고, 그러한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며, 종교 의식으로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시편 105,1).
 
이렇게 이름은 당사자의 존재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그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는 분신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누구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그 사람을 대표하거나 대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권위와 권능에 동참하는 것이다. 조그만 다윗은 ‘주님의 이름으로’ 거인 골리앗에게 맞서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아귀에 넣어주실 것이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1사무 17,45-46).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관련하여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표현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곧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다(1사무 20,42), 축복하다(시편 129,8), 저주하다(2열왕 2,24), 예언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키다(마태 7,22),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다(사도 2,38), 기도하다(요한 14,13) 등이다. 또한, 하느님의 이름이 그분을 대신하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이름을 경외하고(시편 86,11) 찬송하고(시편 18,50) 사랑하며(시편 6,5), 또 그 이름에 희망을 걸게 된다(시편 52,11).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저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하고 고백한다(1열왕 8,27). 그러나 성전은 동시에 하느님의 이름이 머무르는 곳이다(29절). 하느님께서는 성전 안에 계시지 못할 정도로 크신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당신의 이름이 그 안에 머무르도록 하신다. 당신의 분신인 당신의 이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셔주신다. 당신의 이름으로써, 성전을 당신과 만나는 특권적 장소로 인정하시고 성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므로 그 사람과 똑같은 권리와 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누구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소유가 됨을 뜻한다. 여자가 어떤 남자의 이름이 자기에게 불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함을 뜻한다(이사 4,1). 또한, 하느님의 이름을 자기 손에 쓴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자기의 신앙, 자기가 그분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고백함을 뜻한다(이사 44,5).
 
창세 2,18에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비롯하여 동물들까지 창조하신 다음, 사람에게 그것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다. 이름을 지음은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한 행사는 아랫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상급자가 하급자의 이름을 바꾸는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이름은 그 사람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름이 바뀜은 그 사람의 존재가 바뀜을 뜻한다. 감옥에 갇힌 노예였다가 일약 대국의 재상이 된 요셉은, 파라오에게서 새 이름을 얻는다(창세 42,45 그리고 2열왕 23,34; 24,17; 다니 1,6-7도 참조).
 
개명의 의미가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바꾸실 때이다. “이제 너는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 17,5). 이름이 바뀜으로써 아브람이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창세 17,15-16도 참조). 이는 새로운 창조나 마찬가지이다. 세례성사 때에 새 이름을 받는 것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임승필 요셉/ 신부 ‧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199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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