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 (마태오 13:24-30)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는 대목이 나오지만(4:26-29),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를 빼버리고 오늘의 복음을 끼워 넣었는데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에만 나온다. 우리에게는 둘 다 아주 유익한 말씀이다.
초기의 교회에서는 ‘밀밭 가운데 있는 잡초’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털어놓았다.(2코린토 11:26)
우화 속에 나오는 잡초는 밀과 닮은 독 보리였다.
악(惡)은 항상 선(善)처럼 보이려고 한다.
악이 악처럼 보인다면 우리의 삶은 놀랄 정도로 투명해지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미지에 신경을 쓴다.
본질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지만 생각하는 시대이다.가면을 쓰고 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악(善惡)을 구별하라고 당부하고 계신다. 옛날의 한 작가는 우리들이 영적(靈的)으로 잠자고 있을 때 악마가 밀밭에 가라지를 뿌렸다고 말했다.그러나 우리들은 진리와 사랑은 몰라도 눈치는 빨라 사태를 자기 중심적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그리하여 우리는 밀과 가라지의 의미를 알아차린 후 철석같이 자신이 밀이라고 믿는다. 교회에 가라지가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도 ‘거짓 형제들’이 교회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증거이다.
그러나 이 ‘거짓 형제들’이 가면 무도회(?)를 벌이고 있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교회가 ‘밀밭’이 되지 못하고 ‘가라지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밀인 사람은 수확 때까지 참게 하고 잡초인 사람은 밀로 바뀌게 합시다.
사람과 곡식이나 잡초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즉 밭에서 곡식이었던 것은 곡식이고 잡초였던 것은 잡초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밭 즉 교회에서는 때때로 곡식이 잡초로 바뀌고 잡초가 곡식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내일 그들이 무엇이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도나 오쉐아(Donagh O’Shea)신부님)
동양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쓴 미국의 작가 제임스 미치너(James Michener)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한 박식한 호주 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예견하고 세계지도를 펴서 전쟁이 일어나면 피신할 곳을 찾았다. 그는 태평양에서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섬을 선택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1주일 전에 그는 안전한 피난처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 섬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세상에 안전한 피난처란 없다.
우리가 어디를 가도 악(惡)의 어두움이 우리에게 비춘다.
악이 스며들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밖에 없다.
어두움을 탓하든지 촛불을 밝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