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엇을 보고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1) - 이기주의자들에게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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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1-11 | 조회수963 | 추천수3 | 신고 |
안젤로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님을 설득하거나 제 글에 대한 변호는 아닙니다. 오직 진리 그 자체 인 가톨릭에 대한 글입니다. 님이 반대하든 긍정하든 오늘도 내일도 해는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고 언젠가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심판받게 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 니다. 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또 종교에 대해서 극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째는 인본주의자들이고 두 번째는 죄인들 세 번째는 이기주의자들 네 번째는 지식인들 다섯 번째는 현대인들 여섯 번째는 감각론자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의 말씀은 사색가 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견없이 제 글을 읽게 된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 세상 사람들 도 그 십자가를 향하여 일곱가지 말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상칠언에 특별한 뜻이 있 듯이 십자가를 향해서 던진 일곱 가지의 말에도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님의 의견을 가진 분들 - 여기서는 세 번째 부류인 개인적 구원만을 요구하는 이기주의자들로 표현하겠습니다 - 에 대한 적절한 말씀이 있어 그것으로 제 이야기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우에도 그에 대한 확고부동한 진리가 우리 가톨릭 안에는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학설 논리로도 대적할 수 없는 진리의 기둥이 바로 가톨릭이기 때문입니다. 어 떠한 회의론이나 주의나 주장에도 모두 다 철저하고 확실하게 객관적이고도 역사적인 부동의 사실만을 가지고 답변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는 제가 관여할 바도 아니고 관여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다만 진리를 알고자 하는 신자분들과 가톨릭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비신자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해서 아래 제가 글을 올린 것을 다시 한번 말해두고자 합 니다. 무슨 종교 전쟁이나 하는 것처럼 그리고 끝없는 교리 논쟁으로 여기신다면 그건 님의 자유입니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님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 속에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종교 간의 분쟁이나 끝없는 헐뜯기 쯤으로 몰아세워 폄하해서 생각하 는 편견을 버리고서 제 글을 보신다면 그런 이야기는 말이 안 되는 것을 아시게 될 것 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본인 스스로 교리를 가지고 개신교인과 다투는(?) - 님 의 의견을 빌리자면 -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비방 모략 중상한다는 것은 제가 님보다는 훨씬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 유를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19년간을 개신교 신자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학 4년간을 무신론자로서 그리고 종교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 일관한 회의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혹되거나 그것을 진리인양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을 이 아래 올라와 있는 글들에서 필자는 확인할 수 있었기에 붓을 들게 된 것일뿐 개신교를 비방하거나 모략하기 위한 것 은 아니라고 아래 제 글에서 수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제 주관이 아닌 역사적인 사 료들과 자료들로 제 이야기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든 아니든 그것은 제 소관사항은 아니니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소를 물가로 인도할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분열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 신자된 도리라고 여겼기에 글을 썼던 것일뿐 필자 자신이 잘못된 역사적 인식과 오류를 진리로 생각하는 그릇된 선입 견을 가진 사람들과의 여러번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대부분은 아니 거의 전부는 당신 의 이야기는 듣기에는 참으로 흥미롭소 하지만 그래도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는 식 의 논리를 익히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어보기만 한다면 아무 소득도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 실제로 한번 나름대로 교리에 대해 연구해보고 나서 그리고 교리에서만이 아닌 눈에 보이는 결과를 놓고서 비교해 보신다면 그런 이야기는 님의 공허한 주장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를 비난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한국과 일본에는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져 보는 것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개신교와의 교리 논쟁에 휘말리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쩐지 그들과 같은 부류인 것으로 여겨 질까봐 그리고 아주 자세한 교리 지식과 성서에 해박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들에게 또는 비신자들에게 주관에서가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자료들 - 역사적 사료, 문헌, 기록, 개신교 측 사학자 평론가,신학자의 글을 인용한다 하더라도 쇠귀에 경읽기 식으로 자신의 주관을 버리고 정말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경우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해서 믿어야 할까요? 물론 선택을 하지 않고 무신론자로 남을 수도 있겠지 요. 신앙을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니까요. 그럼 다시 한 가지 더 질문을 하지요. 한 번 이야기 해볼까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먼저 나와 ’보고서’ 태어났습 니까?, 혹은 태어나는 줄을 ’알기나’ 하였습니까? 태어날때만 그렇까요?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늙는다는 것은 알지만 솔직히 늙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나는 늙고 있다는 것을 님은 느끼십니까? 우리는 시간이 지나서 거울 속의 자신을 비춰보고서야 늙었다는 것을 깨달을 뿐입니다. 그럼 우리가 먹은 음식물이 장에서 소화되어 간을 거쳐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온 몸에 영양을 공급하고 머리카락이 자라고 손톱이 자라고 근육이 형성되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죽어서 어딜가는 지에 대해서도 가 보고서 돌아와서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실이 없어도 우리는 천국과 지옥 연옥의 존재를 믿습니다. 때문입니다. 님도 그렇고 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시대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절에 관장(官長)이 순교자 김 루치아에게 "너희가 하느님을 공경한다 하지만, 대체 하느님을 누가 보았단 말이냐?" 할 때에, 김 루치아의 "시골 백성이 어찌 나라님을 제 눈으로 보 고서야 믿사오리까? 나라 일이 제대로 되어감을 보면 나라님 계신 것을 어찌 알 수 없으 리까?" 라는 반문에 유식하다는 관장의 입이 막히고 말았던 것입니다.우리는 그저 우주 를 창조하신 그분의 진리 안에서 그분의 법칙 안에서 살아갈 뿐 그것을 초월할 수는 없 습니다. 습니다.
수는 없다.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교 안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 마찬가
지로 여러 교파 종파로 나뉘어 있으나 그 중 오직 참된 진리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
뿐이다." 말입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조사한 자료를 보면 위대한 과학자, 예술가의 90퍼 센트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중의 90퍼센트 이상이 가톨릭 신자였습니 다. 이것에 대해 또 뭐라 떠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위인들의 면면을 보건대, 그리고 그들이 남겨놓은 글에서 그들은 한결같이 가톨릭을 옹호하고 가톨릭의 위대성을, 진리의 보금자리임을 역설했음을 또 뭐라고 비난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시면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었다. 그러나 이제와서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단 한 사람의 부하도 없다. 그러나
저 성당의 십자고상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역사를 통해서 그를 위해서는 전
세계 어디에서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자가 그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가를
또 지금도 그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자가 그 얼마나 되는가를..." 그많은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는지를 그리고 안된 이야기지만 우리 나라의 오천년 역사와 서양의 이천년 남짓한 역사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나라가 왜 뚜렷한 민족 문화의 전당을 이룩하지 못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민족 정신을 한데 모아줄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인 뚜렷한 종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마찬가지로 안된 이야기지만 우리 민족의 얼을 이끌어 줄 뚜렷한 정신적인 바탕이 없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가 얼마나 일본에 문화적 정신적으로 농락당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 까지 여기서 말할 여유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한 가지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의 예로써 우리 민족이 얼마나 정신 사상 면에서 허술하고 빈곤하게 지내왔는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러던 가운데 16세기 초에 영국왕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를 성립시켜 가톨릭으로부터 떨 어져 나간 뒤에 아일랜드는 영국의 침공으로 근 4백년간 영국의 압제 속에서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토록 오랜 기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의 민족 정신은 살아남았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인에 대한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정 궁금하시면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파 앤드 어웨 이’를 보시면 영국의 압제 속에서 아일랜드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이 지배할 당시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면 토지와 돈과 권력이 함께 주어졌는데도 편의적으로 자의적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님께 한 번 되묻고 싶습니다. 오는 우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을 님이 알고나 하는 말입니까?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아래 제 글을 찬찬히 읽어 보시고 역사 공부를 더 하고 나서 말씀을 하시던지요. 다.
돌보는 신부님, 수녀님 이야기가 어디 소설 속의 이야기인 줄 아십니까? 오늘도 나병 환 자를 돌보다 자신도 나병에 걸려 숨져간 성자 데미안 신부의 뒤를 잇는 신부, 수녀님들을 전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어디 말씀해 보시지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나병 환 자와 같이 생활하는 개신교인이나 목사 이야기가 있습니까? 한평생을 신앙을 온 몸으로 실천한 성인의 이야기는 가톨릭 안에서 화제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 기는 가톨릭 안에서 언제나 있어왔고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사실이 기 때문입니다. 실을 제시하던지 아니면 님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보다 더 뛰어난 업적의 소유자 라면 가능하겠지요. 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던 동서고금의 순교자들보다 그리고 세계적인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 들보다 님이 훨씬 더 위대하지 않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말하는 하느님은 언제나 사랑 그 자체이신 한없이 ’자애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소개하는 것으로 저의 길고도 험난한(?) 글의 여정을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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