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그리스도가 현대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 가상칠언 다섯번째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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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1-29 | 조회수999 | 추천수3 | 신고 |
예수 그리스도의 가상칠언(架上七言) - 다섯 번째 말씀
- 현대인에게 -
다섯 번째의 말씀은 종교에 대해서 독특한 생각을 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하 신 말씀입니다. 현대인은 종교를 자기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선이냐 악 이냐 하는 극단적인 문제를 갖지 않는 타협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른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너무 열려서 절대진리나 절대선 앞에서 그 마음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미지근한 사 람들’ 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표현으로 ’넓은 사람들’ 입니다.
현대인은 세상 기준에 의하면 ’좋은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교회에서 결혼한 자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례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부활절이나 성탄 절, 종교 행사에는 즐거이 참석하고 때로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서도 흥미있 게 논쟁을 합니다. 그들은 신문광고를 보면서 일 년에 몇 권씩 책도 사 읽습니 다. 때로는 자선행위와 사회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는 돈은 자기의 소득세와 연결짓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낼 여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교 회에 보내기는 싫어합니다. 가끔 영화관에 가는 것도 허락하고 학교에서의 서 클 활동도 허락하고 정치적인 견해에도 관용을 가집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웃과 큰 충돌을 피하면서 자기가 ’옳은 사람들’ 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해서는 하나의 감상적(感傷的)인 것으로 또는 생활의 필요한 방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들이 갖는 타인에 대한 예모(禮貌)도 정중합니 다. 그들은 낭비나 방탕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저속한 욕망이나 행동 도 삼가고 스스로 ’좋은 사람들’ 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절대진리 앞에서는 회의적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 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종교 같은 것은 가끔 조소의 대상 이 됩니다. 그들은 자기네의 객관성을 주장하고 어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현대문 명 앞에 청강생일 뿐 어떤 분야에 대해서든지 책임을 지는 전문학생은 아닙니 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 다.
그러나 그들은 ’진보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에 대하여는 지나치게 날카롭습 니다. 그들은 ’역사적인 예수’와 ’하느님 아들로서의 예수’를 구별하려고 하며 교회의 모순이 해결되면 내일이라도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부동산 거래에 대한 계약은 하루 만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교에 대해서는 귀찮고 싫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피곤한 몸을 쉬고 싶어하고 교회에 가 는 것을 싫어합니다.
십자가를 보는 현대인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그 옛날 십자가를 향해서 다섯 번째로 외쳤던 그들의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 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관심이 없었던 단순한 구경꾼이었습니다. 그들은 십 자가를 보고서 익살스러운 태도를 취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네 번째의 말씀에 대해서도 익살스러운 해석을 내립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을 예수님은 히브리말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마태 27, 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스스로 ’현대인’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에 대한 조소와 익살로 ’엘리’라는 말 대신에 ’엘로이’라는 말로,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말 대신에 ’엘리야’라고 비꼬아 해 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진의를 일부러 왜곡해서 "이 자가 엘리야를 부 르네.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주나 두고 봅시다." (마태 27, 47-49)하고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누구이며 종교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현대인이 종교나 신앙에 대해서 너무나 주관적으로만 생각해서 오류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엘리야로 생각하고, 종교를 사회봉사단체로, 묵상을 꿈꾸는 것 으로, 금욕을 병적인 것으로, 고해성사를 정신분석학으로, 교계제도를 정치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어설픈 지식인, 그리고 현대인은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을 부를 때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그 옛날 현대인들이 말했듯이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주나 봅시다."(마태 27, 49)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이여! 종교를 너무 경솔히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조급히 서두르지 마십시오. 당신은 언제나 행동보다 이론이 앞서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배신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혼란으로 더욱 괴로워하고 있 습니다. 그들은 구경꾼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엘리야로 잘못 알았습니다. 오 늘도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 대적인 인간구원의 심오한 진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게 다가 구원과 하느님, 교회에 대해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겸손하게 교회 안에 들어올 때에만 모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밖에서 보는 교회의 유리창은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교회 안에서 밖을 볼 때 에는 절경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주님이 당신을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듯이 오늘도 당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완벽한 인격체는 자기를 조롱하는 수준의 사람들과는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소나 조롱은 자기 열등의식의 표현이며 좁은 마음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끝내 침묵으로만 일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의 갈증을 느끼면서 의미심장한 답변을 하십니다. 주님은 거의 세 시간 동안이나 가시관을 쓰시고 맨머리로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에서 생 명이 솟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은 진정 갈증을 느끼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그분은, 바다의 거센 풍파를 잔잔하게 하셨고 별들을 제 궤도에 따라 배치하시고 천체를 우주 질서에 따라 움직이게 하시는 전능하 신 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 을 것입니다." (요한 6, 35)
그리고 초막절 마지막 날에 성전에서 "누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시오." (요한 7, 37) 하고 외치신 그분이 지금은 하느님께도 아니고 자신을 죽이는사형 집행자들에게도 아니고 그분의 어머니께도 아니고 우리에게, 보통사람들에게 당 신이 마실 것을 청합니다. "목마르다!"
주님은 진정 갈증을 느끼십니다. 이 갈증은 육체적인 갈증이 아닙니다. 영혼 의 갈증, 사랑의 갈증입니다. 이러한 갈증이없다면 아무도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내게 마시게 해주었다." (마태 25,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영혼 구원을 위한 사랑의 갈증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던 구경꾼들은 아무런 감동 없이 얼음처럼 냉랭한 모 습이었지만 주님은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얕은 시냇물을 따라 육정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태양을 향해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을 때에 그분은 우리 속으로 뛰어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현대인이여! 잠에서 깨어나라. 너희의 목도 타야 한다. 불이 타야 한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종교의 사랑은 타산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술 처럼 좋아하고 죽음을 물처럼 마셔야 합니다. 종교는 사랑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경이 변함에 따라, 그리고 상대방의 변 화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히 변치 않는 그것이다. 사랑은 비록 시간 속에 있다 하더라도 변하 지 않고 마지막 심판날까지 견디어 가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 제자로 삼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천둥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성은 세상을 울리는 천둥과 같았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그분은 분별 없이 칼을 휘두르던 성급한 베드로도 선택하셨습니 다.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주님과 같이 죽는 것은 부당하 다고 생각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주님은 또한 정열적인 막달라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의 마음은 주지 않고 육적인 것만을 주려고 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강한 손으 로 참회하는 은총을 주시어 드디어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앙에는 결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네 소행을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내겠다 (묵시 3, 15-16).
이 말씀은 종교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에게 하신 경고입니다. 실상 무관심한 자 보다 전면적으로 반기를 드는 사람이 더 쉽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 열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열을 상징하 는 불은 아래로 향하지 않고 위를 향하여 타고 있습니다. 정열은 결국 우리를 선으로 인도합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어떠한 것에도 지지를 하지 않는 무관심한 상태로서는 찾을 것도, 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감옥에는 숨어 있는 성인들이 있고, 하느님의 일에는 숨어 있는 악인들이 있 습니다. 그들 두 부류는 모두가 무엇에 대한 갈증을 느낍니다. 사탄을 위한 열정이거나 하느님을 위한 열정이거나간에 적극성을 띠고 있습 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느 한쪽으로 바꾸어 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 프란치스코와 레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열렬한 이상에서 그들의 사상을 설파했습니다. 레닌은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개혁을 믿 었고,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의 투쟁에 의한 사회개혁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양쪽 다 그 출발점이 적극적이었고 정열적이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 입니다.
"하늘나라는 힘에 눌리고 있습니다. 힘쓰는 자들이 그것을 강탈합니다." (마태 11, 12)
두 사람이 다 투쟁했지만 그 방향은 달랐습니다. 증오와 사랑은 똑같은 열망 에서 솟아나옵니다. 똑같은 눈물로써 웃음과 슬픔을 맛보지 않습니까! 다만 차 이점은 그들이 살아가는 목적과 방법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 다. 종교는 반드시 증오의 대상이 되든지 아니면 사랑의 대상이 되든지 둘 중 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는 어떤 종류로든지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소극적일 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어떤 일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북극의 빙산과 같습니다. 그런데 빙산 자체로만은 녹을 수 없습니다. 남쪽 난류가 있 는 곳으로 떠내려가야만 그 얼음덩이가 녹을 수 있습니다. 변화에는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현대인이여! 그 옛날 십자가의 구경꾼들처럼 무관심한 자세를 버리고 당신 의 고정관념을 한번 깨보십시오. 당신은 진정 초월적인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 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종교를 흥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 떠한 흥정이나 타협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아직까지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타협을 시도한 적은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많은 종교백화점(宗敎百貨店)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백화 점(宗敎百貨店)은 끝내는 파탄이 나버리고 맙니다. 가끔 어떤 종교상(宗敎商)에 서는 진리와 적당히 타협하고 흥정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절대진리 를 받아들이는 그 자유까지 박탈당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절대진리는 당신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고 당신을 납득시킬 뿐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생한 자유를 주 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런데 이 대문을 여는 열쇠 는 하느님 쪽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은 어떤 허위를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 라 진리를 보증하고 입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분석도 위험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 자신의 허구성을 벗겨나갑시다. 자신의 착각을 벗겨나갑시 다. 현대인은 실생활에 별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지식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지식이 사랑을 통해 서 더욱 빛나고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알기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연구를 통해 밖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은 사 랑을 통해 안으로부터 얻어진 지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알게 될 때에는 그것을 나에게로 끌어당기지만, 무엇을 사랑할 때에는 내가 그곳으로 끌려들어갑니다.
당신은 진정 당신의 보잘것없는 그 지식을 기초로 해서라도 하느님을 사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의 지식은 더욱 높이 도약하여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 가르침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혹은 내가 내 나름대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 7, 17).
현대인은 종교를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 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위해서는 강한 의지의 결단이 필요합니 다. ’무신론적인 중독증’ 에는 사랑만이 가장 효과 있는 약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한번 개발해보십시오. 이웃을 이기적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헌신적으로 진정으로 한번 사랑해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서 당신은 하느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병으로 신음하는 환자를 방문하고 빈민가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소유물을 그들과 같이 나누고 나서 그들이 무 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신앙으로 고통을 평화스럽게 감수하는 이들과 신앙 없이 고통에 반항하는 이 들의 차이점을 유심히 관찰해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이 두 사람 사이에 큰 차이 점을 만들어놓으셨듯이 우리 안에서도 사랑을 통해 큰 차이를 만들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진정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마음과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할 때 당신들은 책에서 배울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당신들은 엘리야가 당신들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궁 핍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희망를 안고 오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사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내게 마시게 해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고, 헐벗었 을 때에는 내게 입혀주었다. 병들었을 때에 나를 찾아왔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내게로 와주었다. (마턔 25, 35-36).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목마르다." 이것은 "수고하고 짐을 진 여 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 (마태 11, 28)라고 말씀하시기 위함이었고, 그러기에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 위해서 자신이 무언가 부족함을 표현하 셨습니다. "내게 마실 것을 달라."고 우물가에 있는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하고 당신에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당신이 그에게 청하 였을 것이고 그는 당신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입니다. (요한 4, 10).
주님은 우리를 목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너무나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손해 를 보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심장 도 뛸 수 없고 우리 입술도 말라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가끔 세상 재물이 우리 에게 샘을 주리라고 믿지만 이튿날이 되면 그 샘물은 말라버리고 맙니다. 그러 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속임수와 같고 희미한 빛만을 가져다 줄 뿐입 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불행한지를 일러주십니다. 불행의 원인들은 ’적당주의’, ’미지근한 마음’, ’무관심한 자세’ 등입니다.
당신들에게는 초월적인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정열도 없습니다. 당 신들은 갈증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알고 그를 믿는 우리도 당 신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당신들처럼 미지근한 삶 속 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의 사탄은 우리보다 더 크고 더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로메테 우스가 천국에서 불을 훔쳤듯이 사탄은 우리의 제단에서 성령의 불을 훔쳐 지 금 무신론자들의 사원에서 그 불을 태우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현대인입니다. 우리도 마땅히 사랑하여야 할 그 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살라버리는 불이신데 우리는 보잘것없는 타 고 남은 불기운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는데 우리는 그저 연막을 던져올릴 뿐입니다.
우리는 갈바리오로 올라가지만 십자가에 죽지 않고 내려옵니다.
아, 슬프도다! 슬프도다! 우리는 골고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손으로 내려옵니다.
십자가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목마르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 초와 쓸개를 내밉니다. 만일 십자가가 뜻하는 바가 있다면 우리 의 인간적인 선(善)의 부족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보려 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도 그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
너는 나를 생명이라고 하면서도 그 생명을 갈망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지혜롭다고 하면서도 나를 따르지 않는다.
너는 나를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부요하다고 하면서도 나에게 그 부를 청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영원불멸적인 존재라고 하면서도 나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자비롭다고 하면서도 너를 나에게 맡기지 않는다.
너는 나를 고상한 존재라고 하면서도 나를 섬기지 않는다.
너는 나를 위대한 분이라고 하면서도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의로운 분이라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꾸짖더라도 나를 비난하지 말라.
참고로 위의 글은 미국이 낳은 저명한 설교가 풀턴 쉰 대주교님의 저서
’Seven Words to the Cross’ 中에서 발췌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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