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가톨리시즘은 참되다 ; 지성인은 로마로 - 왜? | 카테고리 | 천주교 | ||
---|---|---|---|---|
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2-09 | 조회수725 | 추천수2 | 신고 |
지성인은 로마로 - 왜? (2)
아놀드 런과 G. K. 체스터턴의 극적인 일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이 종교 진리를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드디어 1845년 10월 9일 로마의 문을 두드렸을 때, 영국의 수상(首相) 벤자민 디스레일 리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영국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앞으로 반세기 동안은 뒤흔들리리라." 이 예언된 기간은 너무도 짧은 듯싶다. 최근에 영국에서 일어난 사정을 보면 그렇다고 긍정해야 될 것 같다.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 옛 신앙의 문으로 들어섰을 때 영국 국민은 모 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마틴달(C. C. Martindale) 은 뉴먼이 세운 빛나는 천재 의 전통을 되살려, 옥스퍼드의 학생 시절에 모든 학과에서 실제로 일등만 차지 했다.
이것은 내가 알기에는 도무지 유례(類例)가 없는 일이다. 그 또한 역사적 그리 스도교를 찾아 로마로 돌아섰을 때는 영국의 지성들은 모두 혼이 나갔다. 영국 성공회의 주교의 아들이며 영국에서 가장 유능한 풍자가의 한 사람인 녹스(Ron ald Knox)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버리고 낯선 로마와의 일치에서 평화 와 행복을 찾았을 때도 지성인들은 어처구니없다고 하기보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성인은 로마로 기울어지고야 마는가?" 이것이 당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영국 설교계에서 가장 웅변을 떨친 이 중의 하나요, 동시에 가장 촉망받던 목 사 오차드(William E. Orchard) 박사는 최근까지 킹스웨이 교회의 주임 목사였 는데 지금은 가톨릭의 신부이다. 그는 몇 해 동안이나 안개 속을 헤매면서 보다 더 밝은 빛을 찾으며 그리스도의 역사적 교회에 속하여 있다는 확신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의 최근의 저서 ’신앙에서 신앙으로’는 결국 로마에서 끝맺은 그의 영적 여행담이다. 뛰어난 성공회의 학자 존슨(Vermon Johnson) 박사도 이즈음 같 은 길을 걸어 드디어 별 수 없이 어부 베드로의 배를 타고야 말았다.
아놀드 런, 칼을 버리다
그러나 로마에의 길은 런(Arnold Lunn)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환하게 터졌다. 전 영국은 물론, 영어를 쓰는 모든 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냐하면 옛 신앙 에 대한 가장 유능하고 가장 맹렬한 반대자였던 그가 드디어는 칼을 내동댕이 치고 뉴먼에서 비롯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계속되고 있는 로마에의 행렬 에 한몫 거들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로마의 자력(磁力)은 무엇인가? 그다지도 뛰어난 영국의 최고 지성인들을 그 다지도 많이, 더구나 도저히 저항할 수 없게 끌어당겨, 지금까지 살아온 길과 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하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놀라움과 비애를 자아 낸 그 이상한 매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마 런과 체스터턴의 사정을 들으면 이 신비에 대한 다소간의 빛을 받게 될 것이다. 아마 이 말을 들으면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절대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빈틈없는 추론(推論)과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신조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미 열두권의 책을 쓴 런은 뛰어난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그 중 한 책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주연자 노릇을 했다. 이 책 ’로마의 개종자’를 읽은 사람이면 이 책을 쓴 저자 자신이 불과 10년이 채 못 되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던 개종자들의 뒤를 따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즈 음의 저서 ’이제야 알았다’에서 불가지론에서 가톨릭으로 옮긴 그 자신의 영성 적 오딧세이를 감명깊게 실토하고 있다.
인지 학장의 예언
런은 1888년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감리교 선교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성공회 신부이며 미들턴 대학 학장(學長)인 캐논 무어의 딸이었다. 어린 런은 아침에는 성공회로, 저녁 에는 감리 교회로 끌려 다녔다. 그는 이 두 교회에 끌려 다니긴 하였지만 어느 것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두 다리를 하나씩 걸치고 있다는 비극이 그의 가 족 안에 교파가 있기 때문임을 깨달은 그는, ’하나’야말로 참교회의 가장 중요 한 보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는 옥스퍼드의 해로우 및 발리울 대학에서 공부하였는데, 관심을 가진 과목 에 대해서는 찬란한 지성을 빛냈지만, 필수 과목에 대해서는 그다지 열성을 보 이지 않았다. 그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뛰어난 현대주의자들의 책을 탐독했 고, 윌리엄 제임스의 실증론에 몹시 마음이 쏠렸다. 현대주의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정통 그리스도교는 유지되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가톨릭을 ’지성과 역사 를 희생해서 신앙과 감정을 높이는 자들’ 이라 멸시했다. 그런데 뉴먼(Newman) 이나 만닝(Manning)이나 녹스(Knox) 등 영국의 두드러진 지성들이 성공회식 교 양과 분위기에 얽매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로마의 교회로 들어갈 수 가 있었는지 의심이 든 것은 바로 이 생각 때문이었다.
역사의 사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초대 교부들의 저서들과 가톨릭의 철학적 바탕에 대한 토미즘의 설명 -개종자들의 마음을 잡아당겨 굴복할 때까지 휴식을 허락치 않는 신조- 을 연구한 그에게 역사적 그리스도교란 시대에 뒤떨어 진 것이라는 확신에 넘친 태도를 멋적게 여길 만한 틈바구니가 생겼다. 후에 그는 ’지성으로부터의 도피’를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이성과 객관적 증거 를 주장하는 토미즘과 오늘날 개신교의 주관주의와 경신(輕信)을 비교 논평했다.
그의 아버지가 인지(Inge) 학장에게 그 책을 한 권 선사했는데 학장이 이렇게 예언했다. "내 말을 유의하십시오. 댁의 아드님은 결국 미치광이 교황주의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냉철하고 맑은 빛
1930년 런은 옥스퍼드의 녹스 신부와 가톨릭에 관한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 서신들을 한데 엮어 ’어려운 일’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를 읽어보면 런 은 가톨릭에 대해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공격을 다했고, 녹스 신부는 번번이 이를 시원하게 물리쳤다. 편지 왕래가 잦아짐에 따라 그는 안절부절하게 됐다.
그는 그 당시 아내에게 "여보, 녹스 신부에게 대단히 훌륭한 편지를 막 써 놓은 참이요" 라고 말햇다. 그러나 아내는 쌀쌀하게 대꾸했다. "당신 자신에게나 훌륭 한 편지를 쓰세요. 개신교에 머물러 있고 싶다면 말이죠."
런의 아내는 인지 학장과 같은 대단한 에언자였다. 런은 자기가 반박한 모든 것의 답변을 듣자 이성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일찍이 자기 자신이 비웃었 던 로마에의 개종자의 길을 내디뎠다. 그전에 그는 구경삼아 미사에 한두번 참 여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교회의 전례에 아무런 매력도, 감정도 느끼지 못했 었다. 녹스 신부가 그를 맞아들일 때 그는 일찍이 뉴먼이 만닝이나 또 바로 이 신부 -성공회 주교의 아들로서 방금 로마의 문을 열어주고 있는- 가 스스로 원 해서 포로가 된 이 신앙에 머리를 숙인 것이다.
"냉철하고 맑은 이성의 빛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것만 있으면 교회로 가는 길을 떠나기에 요긴한 길잡이를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힘을 북돋아주는 신앙의 따뜻한 맛같은 것은 사치품이다."
체스터턴은 한때 "가톨릭 신자가 될 바에야 차라리 식인종(食人種)이 되겠다." 고 말한 적이 있지만 런도 또한 그러했었다. 직관을 무시하는 한편, 논리적 추 리의 재능이 뛰어나고 객관적 증거라면 반색을 하는 지성인인 런은 그전의 체스 터턴과 마찬가지로 편견과 오해의 자갈길을 지나 가톨릭의 문턱에 머뭇거리는데 그치지 않고 곧장 제대 난간까지 돌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로지 날카로운 이 성의 힘만으로 교회에 달음질 쳐 들어간 사나이, 바로 그가 아놀드 런이다.
야릇한 내적 감정
현대주의가 외적(外的) 사실은 피하고 개인의 내적(內的) 직관에만 호소하는데 비해, 가톨릭의 호교론자들이 객관적 증거만 내세우는 사실은, 감정은 멸시하고 지성으로써 종교 진리를 찾던 런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 주었다. 이 점에 있어 그 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와 더불어 구식이었다. 곧 토마스는 주관적 증거 -경험의 주체는 자기가 경험하였다고 우기지만 그 외의 사람은 아무도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그러한 주관적 내적 증거- 만 내세우는 현대식 태도를 배척하고 지성의 조명을 받은 외적 증거를 내세움으로써 논증한다는 유별난 습성을 갖고 있었다.
런은 자기 혼자만 우기는 직관적 감정 대신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신앙을 효과적 으로 견지하는 중세로부터의 전통을 가톨릭만이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성을 피하고 주관주의라는 어두운 굴 속에 - 어디가 어디고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도록 - 처박혀 있다는 점에서만 일치되고 있는 그 숱한 열교(裂敎)를 상대로 오직 가톨릭만이 고립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 이다.
얽히고 설키고 뒤죽박죽이 된 현 시대에 만능약(萬能藥)이랍시고 숱하게 활개를 펴는 새로운 도덕률이라는 것은 모두 직관이라는 모래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런은 이렇게 관찰했다.
"이런 현대식 예언자들은 모두 야릇한 감정에만 호소한다. 그들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다는 괴상한 감정이다. 예를 들면 헉슬리(Julian Huxley) 교수 는 고상한 음악을 듣거나 가톨릭 성당에 우연히 들어섰을 때 이런 야릇한 내적 감정을 느꼈다 한다. 그는 이러한 내감(內感)을 어떤 객관적 실재(實在)의 사실 (事實)에 상응한 무엇으로 느낀다. 그래서 그는 책을 써서, 올바른 내감(內感)을 느끼는 경우에는 종교로부터 신이나 계시 따위를 추방해 버리더라도 거기에는 가치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고 증명, 아니 주장했다. 순수한 내감론자 는 증명이라는 것을 할 수조차 없으니까."
그 중에는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윤리 규범의 가장 소문 높은 문학적 사구려 장사꾼인 웰즈(H. G. Wells)에 대한 런의 분석은 멋지다. 그는 웰즈를 내감병 (內感病)의 고전(古典) 표본이라 이름 지었다. 이 철학적 소설가는 - 차라리 소설가적 철학자라는 편이 나을 성싶지만 - 객관적 진리와는 일체 손을 끊고 봄철에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불면 날아가 버릴 비현실의 세계를 자기의 내감 으로 짜냈다.
그의 저서 ’볼 수 없는 왕인 하느님’은 주로 내감론자라고 불리는 현대식 예언 자들이 흥미 있게 읽는 책이다. 런에 의하면 이 책은 이즈음의 내감론 병리학을 벌거숭이로 날씬하게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재미있다고 한다.
하느님을 그린다
웰즈는 세계가 자기에게 최신식 하느님을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상 상해서 이 괴상한 책을 쓰면서 지성이나 사실에 대하여는 오만상을 찌푸리고이 상 야릇한 내감만 마구 쏟아 냈다. 런은 웰즈가 새 시대의 기호에 맞는 하느님 을 창작해 낸 그 별난 성질을 별명 지어 이러한 비유를 들었다.
어떤 어머니가 작은 딸이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너는 뭘 그리고 있니?"
"하느님을 그려요."
"어떻게 그리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딸은 "이제는 다 알게 돼요"하고는 계속해서 그렸다.
런은 "이제는 다 알게 된다"는 것이 웰즈의 슬로건이라고 말한다. 이 런의 분 석을 웰즈가 확인했다는 것은 다음 글로 보아 명백하다.
"현대의 종교는 신(神)에 대한 지식이나 이의 설명이나 온전히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제는 신과 만났다. 이제는 신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고 서술한다."
성 토마스는 신을 증명했지만 웰즈는 신을 서술한다. 그는 내감의 샘을 뚫어 그의 최신식 신에 관한 독단적 주장의 물줄기를 끌어낸다. 첫 장부터 끝까지 논 의 같은 것은 그림자조차 없고 논리적 추리와는 담을 쌓은 듯하다. 여러분이 이 런 신기한 임신법(姙娠法)에서 어떤 종류의 신이 태어나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 에 끌린다면 여기에 보여드리기로 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 새 시대의 신은 우리의 과거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돌보는 신이다. 그를 어떤 모습으로 나타낸다면, 용기 있고 슬기롭지만 아직 그 힘이 완숙되지 못한 아름다운 젊은이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웰즈에게 어떻게 신이 이와 같이 젊고 미숙한지 알 수 있느냐고 묻는 다면, 그는 서슴없이 아주 점잖게 큰 기침을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감(內感) 이 이렇게 말하오."
런은 이를 주해한다. "내감이 우리에게 흠숭하라는 신이 웰즈를 아주 닮았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사람이란 원래 신을 만들어 내는 데 자기 모습을 닮게 하는 버릇이 있다. 웰즈식, 헉슬리식 문학의 몸뚱아리에 주관주의라는 암(癌)이 온통 좀먹어 들고 있음을 날카롭게 꿰뚫은 런은 드디어 이들과 한패가 되기를 거절하고야 말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같이 그르칠 수 없다.
교회의 진리 탐구는 그리스도에서 비롯해서 그리스도에서 마쳤다, "너희는 나 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는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얻은 이상 나머지는 쉬웠다. "예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일단 확신한 바에야 참교회를 찾기 위해 멀리 헤맬 필요가 없었다. 그 교회는 하느님의 것이니만큼 온갖 그 외의 것과 생판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분의 강생(降生) 처럼 각별한 것이다."
런은 교회에 들어온 지 몇 주일 되지 않았을 때 종교 문제를 전공하는 학자 들의 모임에서 개종담을 강연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삼단 논법으로 추리해 나갔다.
그리스도는 틀릴 수 없었다. 참교회는 그리스도의 무류성(無謬性)을 가르칠 것 이다. 가톨릭 외의 어느 교파도 실제로 그리스도의 무류성을 가르치지도 않으며 그리스도의 교리 중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는 신자를 벌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 강연이 끝나자 토론석상에서 어떤 영국 교회의 고위 성직자이며 극단적인 현대주의자가 런의 논리를 반대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신으로서는 틀릴 수 없었 으나 사람으로서는 틀릴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곧 그리스도는 참다운 신인 동 시에 참사람이다. 참사람이라 함은 순수한 인간 종(種)의 대표여야 한다. 그런 데 잘못을 범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만큼 그리스도도 사람으로서는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런은 이 현대주의자에게 그리스도가 신으로서 계시한 진리와 인간으로 서 범한 과오를 분간할 규준(規準)을 제시해 달라고 했다. 이 대답에서 런은 다 음의 결론을 얻었다. 곧 영국 성공회의 반스(E. W. Barnes)박사의 뜻에 합하는 그리스도는 신으로서 계시한 것이고, 교황의 뜻에 합하는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서 잘못을 말한 것이라고.
런은 이 현대주의자 비평가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까마득한 옛날의 갈릴래아 인에게 이런 열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에는 댁에서 반대하 는 기적이 참으로 많으니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그의 대꾸는 이러했다. "그리 스도교는 내게 유별난 만족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런은 "새 도덕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이와 거의 같은 말로 간통까지도 꾸며댑니다. 이에 대해서, 자 기 혼자만 경험한 내적 만족감으로는 증명되지 않고 오직 지성으로써만 증명되는 외적 객관적 도덕 규범에 의지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들을 개과천선(改過遷善)하게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라고 따졌다. 자기들의 우스꽝스러운 내부 감각 -일체의 추리와 토론을 부정하는 주관주의의 암(癌)- 만 내세우는 자들과 토론한다는 것은 얼마나 맥빠지는 일인가.
로마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서 어떤 것을 빼야만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겠습 니다."라고 말한 어느 현대주의자의 재미있으면서도 큰 도움이 되는 사건이 있다.
그는 어느 날 런에게 "이제 로마의 매력에 대해서 설교하려 합니다."라며 전화 를 걸었다.
런은 "로마의 매력이 어떤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라고 물었다.
"예, 권위와 일치와 위대한 전통이지요."
"그렇지요. 그렇고 말고요. 그렇지만 아마 틀림없이 로마의 주요한 매력, 즉 가 톨릭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충실히 지켜 왔다는 사실에 관해서 무얼 좀 말씀하시겠지요?"
그 친구는 발끈해서 대답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속 시원하게 통틀어 말하려니 하고 기대하시지는 마십시오."
이에 관해서 런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럴 겁니다. 하지만 어느 개신교 신 자라도 그것을 통틀어 다 알고서는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런은 영적 방랑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벨록(Hilaire Belloc)이 로마에의 첫걸음 을 내디뎠을 때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어느 도시나 그러하듯 절름발이, 앉은뱅이, 장님, 악인 등이 가득 찬 도시가
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는 이 세상에 둘이 아니다.
오직 하나뿐이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 하나는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된다. 이
는 개성(個性)이 있고 힘이 있다. 이는 인식된다. 알게 되면 가장 열렬히 사랑
하거나 미움을 받는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이다. 이 집안에서는 인간 정신을 위
한 지붕도 있고 난로도 있지만 밖은 그믐밤이다."
마지막 3부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