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현대인의 그리스도관 (1)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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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2-23 | 조회수714 | 추천수3 | 신고 |
- 현대인의 그리스도관 (1) -
이상의 설명에 의하여 신인(神人)의 현의(玄義)가 명확해졌다고 본다. 이 신 앙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자신에 의한 증언과 그것을 보증하는 기적에 근거 를 둔다. 이것에 의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가 정밀하게 정의된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예수의 비밀 -만인이 인정하며 고금 을 통하여 유일 무이한 영적 체험- 에 대하여 현대 학자나 예술가의 각종 각 색의 이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이들의 여러 설은 흔히 경건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허무 한 구실에 그치는 것"이 많다. 와쓰지 데쓰로가 지은 책 ’원시 그리스도교의 문화사적 의의’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금세기의 많은 사람은 최근 극작 가처럼 "나는 실재의 존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실재에 대하여 특 히 겁쟁이이다."라고 말하면서 "요컨대 나는 내가 본 그리스도를 강조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가르친 하늘 나라는 어떠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교리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러한 논의는 종교가나 철학자에게 일임하여도 된다. 나는 단지 여기에 사랑의 그림 두루마리를 펼쳐 보이고 싶 다. 사랑의 군상을 그리고 싶다. 모든 이치를 빼놓더라도 사랑의 결정만은 뺄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죽은 것은 사실이다." (사토 고요의 "희 곡 ’그리스도’에 대한 주장"). 이와 같은 기분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救 贖)사업이라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대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가 이른바 "내가 본 그리스도"를 가지고 시종 일관하고 있다. 현실의 그리스도와 그 메시지에 대해서는 전연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교회 의 신조는 초대 신자들의 정열적 상상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들은 신약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에 의한 가르침을 원치 않는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곧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음대로 만드는 진리(?)인 것이다. 구세주는 자기 자신이다. 우선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그리스도"라는 대립을 만들어 놓고 각자 마음대로 그 속에 자기에게 가장 편리한 설명을 붙 이고 있다. 어느 때는 역사의 이름으로 또 경우에 따라서는 고등비평(高等批 評)을 내세우고 4복음을 마음대로 자구(字句)를 고친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한 자가 유다가 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육체를 사랑한 막달라의 마 리아가 이를 부활시키기도 한다.
내가 여기서 그리스도 연극의 작자의 주장을 인용한 것은 결코 그것을 중대 시했기 때문도 아니요 더욱이 그것을 의논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예술가는 마음대로, 좋을 대로 그리스도를 취급하라. 다만 그리스도는 과거 속에 매장 되어 사라진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있으므로 살아 있는 현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본인의 주장이 어떠하든 간에 이들에 대한 예술적 비판은 자연히 정하여지게 됨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기 때문 에 그들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소제로 하였다 해도 예술적 가치가 생길 리 없다. 마치 현대인의 그리스도관은 이를 만드는 자가 가진 것 이상은 아무 것도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살아 있는 현실이 있으므로 이를 무시한 부자연은 전연 상상의 소산을 다룰 때보다도 더 나빠질 따름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소재로 하여 희곡을 쓰는 것 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라고 힐난한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은 참 할 일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나는 물론 일부러 찾아가서 그 리스도 연극을 볼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한가한 한 선교사가 읽 어 보라고 준 사토 교요 씨의 주장을 읽어 보고 재미있었기에 여기 인용한 것 이다. 그것도 사토 씨가 그렇게 말한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말이 현대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를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었기에 대단히 재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의 주장이 붓 끝으로 요령 좋게 정리되어 있는 것 외에는 도덕적 깊 이도 없는 섶풀이고 고집스러우며 독선적인 취미 본위로 일관되어 있는 와쓰 지 씨의 저서보다는 훨씬 기분이 좋은 것이다. 사토 씨는 "올바른 사람을 보고 싶다. 올바른 사람을 쓰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사람을 소개하고 싶 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학자적 양심 앞에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 는 와쓰지 씨의 저서에 비교하면 훨씬 양심적인 느낌이 든다. 참으로 올바른 사람을 보고자 하는 일념에 철저할 때 사토 씨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이 세상에 부활한 하느님을 보여준 것은 히스테릭한 여자의 병적 상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르낭의 소설이 진실이었다면 막달라의 마리아 쪽 이 그리스도보다 훨씬 위대한 종교적 천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르낭의 유일한 실책은 막달라의 마리아 전(傳)을 쓰는 대신 예수 전(傳)을 썼다는 것이다.
현대인도 자기에게 편리한 그리스도를 보려는 헛수고를 버리고 마음으로부 터 겸손하게 배운 사실 그대로의 그리스도에게 배알(拜謁)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이마루스로부터 출발해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고등비 평(高等批評)의 변천을 조용히 생각하여 본다면 이 점에 대하여 좋은 교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생을 그리스도 연구에 바친 고등비평(高等批評) 학자들을 보면 서로가 각기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래도 그 속에 끼 어 자랑스런 소양을 가지고 일가견을 세워 보자고 한다면 모르지만 그대의 설도 내일은 후진 연구가에 의해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여야 한 다.
어쨋든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거나 구원을 받는 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필경 그대의 머리 속에서 생기는 진리라면 그리스도를 추대할 것 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연극의 출연자 사와다 쇼지로 씨처럼 "나는 원래 그리스도교는 알지 못하며 불교도 모른다. 따라서 극락도 천국도 모른다. 그 러나 단지 하나 지옥만은 알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극락을 알며 천국을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새삼 그리스도를 연구할 필요를 느끼 지 않는다. 단지 나 자신 어떻게 하여 연극에서 그리스도 역을 잘할 것인가 하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이야말로 모든 것을 끌어가는 빛이 아니겠 는가."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간단하며 정직하지 않겠는가.
근대주의와 고등비평(高等批評)
그러므로 스스로 가톨릭 신자라고 자칭한 근대주의자가 이른바 "신앙의 그 리스도"와 "역사의 그리스도"를 대립시켰을 때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는 단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이 역사적 인물을 신격화한 것은 초대 교회 신자 들의 정열적 명상에 의한 조작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리스도교 전부를 아무런 객관적 현실에 기초를 가지지 않는 종교적 상상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여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배척된 것은 당연한 운명인 것이다.
그들의 그 심리적 해석 때문에 스스로 근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칼케돈 공의 회에서 선언한 동일한 하느님이요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분할하는 점에서 이하 기술하고자 하는 고대의 이단자와 그 양상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란 복음서에 관한 그들의 주관적 해석인 이상, 사실은 역사와 신 앙의 대립이 아니라 정통 신앙과 근대인의 주관적 해석 -이것은 요컨대 적어 도 무의식적으로 자기 철학적 개념에 색칠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의 충 돌이다. 내가 여기서 주관적 해석이라고 한 것에 불만이라면 근대주의자가 말하는 역사란 어떠한 것인가를 연구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역 사다." 라는 일치점이 없는 것은 프로테스탄트라면 누구나 가지고 다니는 성 서의 하느님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오늘날 부정적인 고등 비평의 원조는 라이마루스가 아니라 루터 그 사람이 다. 루터는 물론 신앙의 입장을 취하였음에 틀림없으나 계시인 하느님 말씀 의 내용을 정하는 규범을 주관 속에 둔 점에서 훌륭한 라이마루스의 선구자 이다. 루터가 성령이라고 말한 것을 라이마루스는 이성이라고 말한 언어의 차이일 뿐이다. 실제로 루터의 성령이나 라이마루스의 이성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도 인간의 편의에 따라 사용할 수 있 는 쌍날칼이다. 루터는 이것을 휘둘러 멋지게 그리스도교를 양단하였고 그 후계자들은 양단된 것을 다시 여러 개로 잘라 버렸다. 라이마루스와 후진 고 등 비평가들은 그 잘라 버린 것들을 다시 분쇄하여 버리려고 달려들고 있다.
인류의 법정에 선 그리스도
이리하여 2,000년 전 옛날 예루살렘의 빌라도 법정에서 보았던 같은 광경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또한 인류의 법정에 서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세운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자기가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언하고 있다. 무사주의자(無事主義者) 빌라도의 도배(徒輩)들은 민중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거리낌 없이 바라빠 대신에 죄없 는 그리스도를 적의 손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는다.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진리가 무엇인가." 결국 자기만 좋으 면 어찌 되어도 좋지 않은가. 진리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있어도 인간 이 알 수 있는가. 누가 단언할 수 있건 초연하게 취미 본위의 문학자는 말한다.
모세의 율법 대신 과학과 역사를 내세우는 학자와 위선자인 바리사이파 사 람과 사이비(似而非) 중과 신주(神主)들은 민중을 선동하여 그리스도를 죽이 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다. 그 구실까지 지금도 옛날과 똑같다. 그리스도는 거짓 예언자로서 백성을 현혹하여 국체(國體)를 손상시키며 그 제자는 비국 민(非國民)이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를 믿는 제자들은 역시 지금도 옛날 같이 겁쟁이들로서 여차하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소리를 죽이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리스도를 무시하며 인생의 행로를 걸어갈 수는 없다. 그는 너무나 의연하게 만인 앞에 서 있다. 무샤 고지, 와쓰지, 사토 고 요 등(당대 일본의 작가, 사상가들)도 아무 말 없이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지 이 귀찮은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 그들은 아마도 매듭 지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작은 저울에 걸어 달았다고 생각하 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몇 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찌 생각 이나 했으랴. 그리스도의 무게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자기들의 작은 머리 무 게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리려고 하다 자기를 그린 것이 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다음의 성서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오로지 자신의 주관적 견지에서만 판단하려고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 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 러나게 할 것입니다.’" (루가 2, 34-35)라고 기록된 대로이다.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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