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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대인의 그리스도관 (2)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2-23 조회수930 추천수4 신고

 

- 현대인의 그리스도관 (2) -

 

 

 

귄터의 이설(異說)

 

이들 현대인의 편견의 기본이 되고 있는 것은, 진리란 주관으로터 주관을 만들

어 내는 것이라고 하는 근세 철학의 근본 오류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문제에 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상의 진리를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대로 받아들여 진

리는 객관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톨릭의

입장과는 정반대되는 생각이다. 이러한 경향에 연루된 근대에 잘못된 그리스도

관의 적합한 예을 우리는 독일의 철학자 귄터(Gunther)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오류를 따라 페르소나(位格)란 자기 의식을 가진 것으로 해

석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의식(意識)과 하느님으로서의  의식(意識)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는 필연 두 개의 페르소나(位格)로 분할되고 만다. 가톨

릭 신자였던 귄터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지위를 보전할 필요상 이 신인(神人)

양 의식(意識)을 이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유일의 Subsistantia를 가지고 연

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Subsistantia란 결국  페르소나를 존재의 면에서

볼 때 딴 말에 지나지 않으므로 페르소나가 들어있다면 Subsistantia도 하나

로서는 채울 수가 없다. 그의 설명은 2=1이라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페르소나는 의식(意識)이 아니다. 의식은 페르소나의 속성이므로 페르소나 그

자체를 구성하고 있지 않은 것은 잠자는 사람이 인격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

에 비추어도 명백하다. 심리학자는 그 후 잠재 의식이라는 편리한 문자를 만들

어 내었다. 잠자고 있어도 잠재 의식은 있다고 한다. 잠재 의식이란 의식 없는

의식이라니까 처음부터 할 말은 없다. 우리가 말하는 페르소나, 즉 자아의 뿌리

는 훨씬 깊고 형이상(形而上)의 세계에 파고들고 있다. 이른바 의식은 페르소나

의 형이하(形而下)에 나타난 지엽(枝葉)에 지나지 않는다.

 

 신(新)칸트파는 또 의식 일반이라는 편리한 문자를 발명하였다. 어디까지나

주관주의의 입장에 집착하려고  하니까 이러한 무리도 필요하게 된다. 의식   

일반이라는 것은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체험의 경지에 들어갈

때는 이미 의식 일반이 아니라 모든 의식이 거기에 있듯이 개별적인 것이다.

그것은 보통 체험이 아닌 순수 체험이라고 한다. 그래도 체험하는 사람이 없

이 체험이 공중을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역시 체험은 개별적인 점인 것

만은 틀림없다. 말은 진부하여도 자기의 본체는 페르소나(位格)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에게는 물론 하느님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두 가지 의식이 있다.

그러나 귄터가 생각한 것과 같이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의 페르소나(位格)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페르소나(位格)는 어디까지나 하

나이다.

 

 

네스토리우스 이단(異端)

 

 더욱더 옛날로 거슬러올라가면 그리스도의 유일한 페르소나를 분리하려고 했

던 자로 유명한 네스토리우스가 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는데 429년

경 하느님의 아들은 의인의  마음에 하느님이 거처하고 있듯이, 혹은 성전에

하느님이 계시는 것처럼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에 거처하고 있으므로 그

에게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는 부부 일심 동체와 같이 도덕적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는 두 개의  페르소나(位格)가 있다. 성전과 거기

에 모신 하느님은 동일 인물이 아니고 의인과 그 마음에 거처한 하느님도 또

한 각각 다르므로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더라도 신인(神人) 예수 그

리스도의 어머니는 아니다. 마리아를 일컬어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마음에 하느님이 거처한 의인을 가리켜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설(異說)은 430년경의 에페소 공의회에서 배

척되었다.

 

 

정통 신앙은 그리스도 문제 해결의 열쇠

 

 이러한 경과로 신성과 인성이 오직 하나인 하느님 아들의 페르소나에 갖추어

져 있다는 정통 교회의 신조는 더욱더 명확히 정의되어 갔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현의(玄義)였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불가

사의로 남아있다. 오랜 기간의 논쟁이 겨우 이 신앙의 내용에 개념적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밝힌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스콜라 철학 이외의 입장

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결국 신자에게

는 경건한 예배의 목표가 되지만 비신자에게는 걸림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정통 신앙만이  다른 모든 그리스도에 관한 억설(臆說) 이상으로 신인

(神人)의 언행과 사업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이 신앙의 진의는 묻지 않더라도 적어도 세계적 가치 전도(顚倒) 운동

이란 놀랄 사건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억설이다.

 

 이 입장에 서면 하느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 30)라는 말씀도 인간으로서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니"(요한

14, 28)라는 선언도 모순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와아들로서 의지는 성부의 그

것과 영원히 동일하여도 사람으로서의 의지는 괴로움 자체를 거쳐 처음 성부에

게 복종하는 것이다. 하느님으로서 완전 무결하였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서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루가

2, 52) 되신 것이다.

 

 예수의 인성을 통한 일체 언행은 그 책임의 주체인 하느님의 페르소나이므로

무한한 공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그 무한한 공덕으로 인하여

구원되는 것이다. 그의 인간으로서의 행위는 하느님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며 빵과 포도주를 자기의 살과 피로 변화시킬 수

있어도 사람으로서는 복음서를 일관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현의

(玄義)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체의 언행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부정적 고등비평(高等批評)이 지리멸렬(支離滅裂)한 것은 결코 학식의 부족이

나 연구의 불충분이 화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를 이해할 수 있는 유

일한 견지에서 이것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문제에 만족한

여러 가지 해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방정식을 풀어야 할 미지수의 옳은 값

은 단지 하나인데도 억지로 이것에 다른 값을 주어 풀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

리 고심참담(故心慘憺)하여도 결국 헛수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조각 내어 자기들의 작은 머리나 마음에 알맞도록 만든

다. 떠들썩하게 잡아낸 것을 보면 그리스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기의 환상

이다. 그들은 모두가 그들에게 걸맞는 보답을 받은 것이다.

 

 고등비평(高等批評)의 출발점이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견지라고 생각하는 것

은 풋내기의 생각으로 그리스도의 문제는 모든 도덕 문제와 같이 이와 부딪치

면 절대로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없다. 어느 쪽인가를 취사 선택하여야 한다.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나 교회의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라는 말을 이따금

입 밖에 내는 사람이 얼마나 천박한가를 가장 명백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대

는 연인(戀人)에게 무관심할 수가 있는가. 그리스도는 실로 전 인류와 그 모든

사람을 죽기까지 사랑한 연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빼고서는 그리스도는

이미 그리스도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신인(神人) 그리스도는 영적 생활의 이상(理想)

 

 이 그리스도의 비밀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대하여 무한한 의의를 가진 것

이다. 인간의 귀의(歸依) 신심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표적을 주는 것으로

신인(神人)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인간은 교만

(驕慢)과 깊은 아집(我執)에도 불구하고 숭배와 봉사의 대상을 찾고 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지 않는 한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완전

무결한 무엇인가를 추구해마지 않는 요구에서 또한 행복을 희구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의 불안에서 아직도 알지 못하는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올림포스

의 산봉우리도 아니요, 또는 시나이 산정의 우뢰와 번개 속도 아니요, 모든 것에서

역사적으로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우리를 위하여 육화로써 태어나 성장하고 고통을

받아 죽고 그리고 부활하여 은총과 성체로써 주야로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것, 이

것 이상으로 절실하게 살아 있는 하느님을 생생히 우리에게 계시할 길이 있겠는가.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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