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 '그레고리오 개혁' 영권의 우위확립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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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8-29 | 조회수531 | 추천수1 | 신고 |
[6] ’그레고리오 개혁’ 영권의 우위확립
■ ’그레고리오 개혁’ 영권(靈權)의 우위 확립
교황직은 그레고리오 대교황 때(590-604) 세계적 지배자로 부각되었으나 그 후로는 11세기 초까지 침체와 쇠퇴를 면하지 못했다. 그간 니콜라오 1세(858-867)를 제외하면 별로 뛰어난 교황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카롤링 왕조가 멸망하지 교황직은 강력한 황제들의 후견을 받지 못함으로써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교황직은 로마 귀족들의 파벌 싸움의 노리개가 되어, 점차 그 보편성을 잃고 일개의 평범한 교구로 전락했다. 후세의 역사가는 이 시기를 ’암흑의 세기’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카롤링거 왕조가 멸망한 880년부터 교회가 자율을 되찾으려고 자각하기 시작하는 1046년까지 계속되었다. 여교황 요한나도 실은 이런 암흑세기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전설이다.
그 사이에 교황직보다 황제직이 먼저 재기했다. 즉 962년 오토대제의 등장으로 신성 로마제국이 탄생하고 잇달아 뛰어난 황제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교황과 주교들이 하는 일에 마구 간섭했다.
이러한 속권의 우세는 1046년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점은 동시에 전환점을 의미하였으니, 이때부터 영권이 우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1046년부터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주와 자유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먼저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수도원과 수도생활을 주교나 제후들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으니, 클뤼니 수도회가 이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수도회에서 일어나 교회 개혁운동은 곧 교황청으로 파급되어, 이른바 그레고리오 개혁을 낳게 했다. 그레고리오 개혁이란 성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의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교황이 되기전 클뤼니 수도회의 수도자로 있을 때부터 이 운동을 주로 했었다. 그에게는 국왕도 단순한 평신도였고 그래서 교회에 순종해야 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개혁은 교회를 세속의 권세가들의 간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레고리오는 교황이 된 후 그의 유명한 ’교황령’에서 이러한 원칙을 이론화했다. ’교황령’에 의하면 교황은 그리스도교 세계 최고의 권위자이다.
그는 모든 주교들의 권리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또한 영적인 최고권의 소유자로서 제왕들보다 높고, 따라서 종교적 원리적 견지에서 필요한 때엔 제왕을 파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는 도리어 영권을 구속하려 했다. 그는 왕인 동시에 사제임을 부인했다. 속권과 영권을 둘러싸고 이와 같이 대립된 견해는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그것은 속인에 의한 성직서임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소위 임직권(任職權) 논쟁에서 구체화되었으며 카노사에서 결판을 내리게 되었다.
성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밀라노 주교 선거에 간섭하려 하자, 임직권을 엄금하고 그것을 어길 경우 파문도 불사할 것을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그러한 선언에 개의하지 않을뿐더러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다. 교황은 하인리히에게 파문으로 응수했다. 어떻게 판결이 날것인가. 온 세계가 숨을 죽였다.
상황은 하인리히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독일 제후들은 하인리히편을 들지 않았고, 만일 1년 이내에 교황으로부터 파문의 해제를 받지 못하면 새 왕을 선출할 것을 선고했다.
하인리히는 하는 수 없이 교황을 찾아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로마로 가려면 알프스를 넘어야 했고, 거기서는 하인리히를 반대하는 제후들이 있어서, 알프스를 쉽게 넘을 수가 없었다. 부득이 하인리히는 가족을 이끌고 에페닌 산맥의 북쪽에 있는 카노사 성으로 갔다. 그 때가 1077년 1월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여기서 하인리히 황제는 참회자로서 참회복을 입고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사죄를 간청하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처음에 사죄를 거부했다. 그러나 하인리히의 대부인 클뤄니 수도원장과 카노사를 포함한 변경의 태수 부인의 간청으로 독일 제후들의 분쟁에 있어서 교황의 판결을 수락한다는 조건하에 하인리히를 파문으로부터 풀어 주었다.
하인리히는 패배했다. 그레고리오가 강자임이 드러났다. 속권이 영권에 굴복함으로써 서구 세계의 헤게모니가 황제에게서 교황한테로 넘어갔다. 독일 왕권은 소위 ’카노사의 굴욕’으로 앞으로 재가가 거의 불가능한 정도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이처럼 카노사의 사건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후 모든 제왕들에게 굴욕적인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1872년 문화투쟁의 주인공인 비스마르크는 독일의회에서 교황과의 문제가 나오자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고 선고함으로써 의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과 하인리히 4세 황제와의 관계는 곧 다시 악화되었다. 그레고리오는 다시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하인리히는 대립교황을 세움으로써 그레고리오에게 응수할뿐더러, 직접 로마 공격에 나섰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부득이 이탈리아 남쪽으로 피신했다. 그는 거기서 1085년 5월에 사망했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이로 인해 나는 귀양살이에서 죽는다"는 마지막 말은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하다. 이 말은 시편(44)에 나오는 말이다. 그레고리오는 시편의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너를 기쁨의 기름으로 발랐다’는 말을 ’이로 말미암아 나는 귀양살이에서 죽는다’는 말로 바꾸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말을 패배자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즉 하느님이 의로운 그레고리오에게 그의 공적으로 보답하기를 거절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그 해석을 다르게 하고 있다. 즉 그 말은 오히려 그레고리오의 순교자적 고백을 나타낸 것으로서, 세상이 하느님의 사자인 그레고리오의 순교자적 고백을 나타낸 것으로서, 세상이 하느님의 사자인 그레고리오를 유배시킴으로써, 세상이 하느님이 주신 구원을 배척했음을 입증하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죽음은 패배 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승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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