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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 프랑스와 로마의 갈등에서 나온 '대립교황'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29 조회수481 추천수1 신고

 

[9] 프랑스와 로마의 갈등에서 나온 ’대립교황’

 

■ 프랑스와 로마의 갈등에서 나온 ’대립교황’

 

’아냐니’에서의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굴욕은 동시에 중세 전성기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서구에 국제사회는 새로이 대두하는 근대국가적 국민의식, 개인주의

유명론, 인문주의, 세속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그때까지 서구사회를 지탱시켜 온

종교적 문화적 통일기반을 잃음으로써 붕괴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교황직의 세계

지배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교황직은 이후 점점 프랑스의 영향을 받게 되고, 마침내는 교황과 교황청이

프랑스 땅에 정착하는데까지 이르고, 그것이 70여년간이 계속된다. 이것이

이른바 아비뇽에서의 교황직의 유폐(幽閉)이다(1309-1378).

 

프랑스 왕권의 압력으로 프랑스인 추기경이 증가되고, 그 결과 프랑스 교황이

선출되었다. 그가 클레멘스 5세(1305-13140였다. 그는 로마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리용’에서 착좌식을 갖고 1309년 아비뇽에 거처했다.

 

아비뇽시기의 교황직은 교황직의 위신에 말할 수 없는 손해를 입혔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때와 같이 교황직이 누렸던 신뢰를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교황직을 위협하는 아주 중대한 위기를 조성하였다. 서구 대이교와

공의회 지상주의(또는 공의회 수위설)가 바로 그 직접적인 결과이다.

 

아비뇽 교황 그레고리오 11세(1370-1378)는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의 조언을

받고 1377년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1년만에 사망했다. 로마인들은 이번만은

꼭 이탈리아 사람이거나 로마 사람을 교황으로 당선시키려 했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우르바노 6세이다. 그러나 열 달도

못되어 추기경들은 따로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선출했다. 프랑스인 교황은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리하여 2명의 교황이 생기게 되었다.

 

교황의 2중 선거로 인한 교회내의 혼란과 당황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누가 합법적인 교황인지 분간할 수 없어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인들조차도 각기 다른 교황을 지지했다. 교황과 교황청만이 서로

갈라져 두 개가 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교구장과 교구청, 본당신부와

본당이 양편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대결하였다.

 

또 두 교황은 각기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파면하기 때문에 실제로 교회

전체가 파문된 상태였다. 그것은 4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서구

대이교(1378-1417)로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대이교의 위기를 극복하고 일치를 되찾기 위해 당시 세 가지 방안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양복, 즉 교황의 자진사임이고, 하나는 합의, 즉

찬결(贊決)에 대한 교황의 복종이고, 하나는 공의회를 통한 해결이었다.

 

누구나 양보 아니면 합의로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교황들은 계속 자신의

합법성만을 주장했으므로 불행히도 공의회를 통한 방법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공의회가 교황보다 높다는 공의회 지상주의가 한때 득세하게 된다.

 

1409년 로마계 교황과 아비뇽계 교황의 추기경들은 피사에게 공의회를 열고, 두

교황을 폐위시키는 동시에 새로 교황을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계 교황도

아비뇽계 교황도 공의회의 결정에 굴복하지 않으니 교황 하나를 더 만드는

결과밖에 되지 않았고 이리하여 교황은 3명으로 불어났다.

 

부득이 또 공의회가 열렸다. 1414년 콘스탄츠에 소집된 공의회는 이듬해 먼저

피사계 교황 요한 23세의 폐위를 선언하였고, 이어 로마계 교황에게 자진 사임을

설득시켰고, 끝으로 아비뇽계 교황을 폐위시켰다. 다음 새 교황선거에 드러나

1417년 마르티노 5세를 만장일치로 선출하였다. 이로서 40년간의 교회의 분열이

극복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치가 회복되었다.

 

공의회를 통해 교회제도상의 대위기가 극복되기에 이르니, 공의회

지상주의자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게 되었다. 실제로 그들은 그 후에도 계속 큰

영향을 미쳤고, 1431년 바젤 공의회에서 교황과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교황은

부득이 공의회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후에도 공의회 수위설의 영향은 오래 계속되었다. 교황들은 공의회 수위설이

다시 대두될까 두려워 공의회의 소집을 꺼렸다. 공의회 지상주의자들은 교황을

거슬러 공의회에 공소하려 했고, 그것이 무엇보다도 교황들에게 불안과 충격을

주었다. 이런 불안으로 말미암아 16세기에 종교개혁을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가

제때에 열리지 못했다. 또 그후 트리엔트 공의회도 좀더 일찍 개최되었더라면,

종교개혁의 역사는 아마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서구

대이교와 공의회 지상주의는 16세기 신앙분열을 준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지금까지 21회의 공의회를 가졌다. 그중 처음 1천년간 8차의 공의회는

동방에서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들은 로마황제에 의해 소집되었고, 또 그

결의사항도 황제에 의해 재가되고 국법으로 선포되었다. 따라서 이 기간 중의

공의회에 교황은 별로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교황이 직접 공의회를 소집하고

사회하고 또 그 결의를 인준하고 공포하게 된 것은 중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공의회에 대해서는 최근의 새 교회법에도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들이 공의회란 고유한 제목으로서가 아니라 교황의 사목권과 관련되어 그

안에 삽입되어 있다. 이 규정에 의하면 공의회의 주인은 교황이다.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공의회를 주재하여, 그 주제와 심의

순서 등을 결정할 권한을 소유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의회의 모든

결의가 교황에 의해서 재가되고 그에 의해 선포되어야 법적 효력을

갖는다(336-341조). 그러므로 공의회도 실제로는 교황직의 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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