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1] 한국교회와 로마 교황청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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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8-29 | 조회수689 | 추천수2 | 신고 |
[21] 한국교회와 로마 교황청
■ 한국교회와 로마 교황청
103위의 현지 시성이 그 결실을 말한다.
- 머리말 -
가톨릭 교회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주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들을 우리는 지역교회 또는 부분교회로 부르고, 사도단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의 후계자, 즉 교황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를 우리는 전체교회 또는 보편교회로 부른다. 부분교회는 각지 독립된 교회이지만 모든 부분교회는 로마교회의 주교인 교황과 부분교회의 주교들과의 친교와 일치에서 한의 보편교회, 즉 가톨릭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로마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주교들과 신자들과의 일치를 위한 원천이며 기초가 된다. 교회 건물의 주춧돌인 이 로마교회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교회 건물의 부분인 부분교회는 생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지역교회가 로마교회와의 결합에서 비로소 생존하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그 결합이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지역교회의 생명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와 로마 교황성좌와의 관계의 역사에서 이러한 진리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얻게 된다.
로마 교황청과 한국교회와의 관계는 1831년에 조선교구 설정에서 정식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구의 설정 없이는 아직 주교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식으로 보편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미 그 이전부터 로마 교황청과 직접 간접으로 일련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가 조선교구 설정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수는 있을지라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1962년의 교계제도의 설정에서 비로소 정식관계가 실현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조선교구는 대목구로서 아직 포교지였고, 따라서 그 교구장도 교황을 대리하여 교구를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지역교회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와 교황청이 관계한 역사를 첫째 조선 포교지로서의 관계, 둘째 조선대목구로서의 관계, 셋째 고유한 지역교회인 한국교회로서의 관계, 다음으로 여기에 한국과 바티칸과의 외교관계를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부분에서는 한국교회가 아직 단순한 포교지에 불과했던 시기의 관계를 다루게 될 것이고, 둘째 부분에서는 조선 대목구의 설정에서부터 교계제도 설정 이전 시기의 관계를, 셋째 부분에서는 교계제도의 설정에서부터 오늘에 이르는 관계를 다루게 될 것이다.
이상이 주로 한국교회측에서 본 교황청과의 관계사라면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사에 있어서 한국교회측으로부터의 자극보다는 때로는 교황들의 정책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복된 느낌이 없지 않겠으나,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황정책이란 관점에서 교황청과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차제에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한국과 교황청과의 관계도 아울러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여기서는 대한민국과 바티칸 시국과의 외교관계의 역사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와 교황청, 한국과 바티칸 시국과의 관계의 역사는 필자가 알기에 지금까지 종합적으로 연구된 것은 없고, 다만 한국 교회사 안에서 단편적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 원인은 관심의 부족과 아울러 특히 자료의 빈곤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방면에 관한 자료는 교황청보(敎皇廳報, Acta Apostolicale Sedis)를 위시하여 거의가 다 교황청에서 발행한 자료들이기 때문에 이런 자료의 수집도 어려웠겠으나 또한 라틴어 아니면 이탈리아어로 된 것이어서 자료 해독의 어려움도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 한국교회사의 더욱 완전한 종합을 위하여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우선 개설적으로나마 정리해 본 것이고, 따라서 이후 연구가 계속되어 필자의 부족한 연구가 보완되기를 바란다. 다행히 교황의 방한을 지내면서 이 방면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 바라건대 기초적인 연구에 불고하지만 한국교회와 교황청에 대한 상호의 인식을 높이고 나아가서 상화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데 조금이라도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
■ 조선 포교지(布敎地)로서의 관계
조선에 교황의 이름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610년대이고, 한편 교황청에 조선 나라가 알려진 것은 1660년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인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M. Ricci. 이마두)의 <천주실의>를 소개하는 가운데서 교황에 대해 ’그 풍속에 군을 교화황이라 하고 혼취(婚娶)하지 않으며, 습사(襲祠)함이 없고 현자(賢者)를 택립(擇立)한다’고 간단히 소개하였다.
한편 로마 교황청은 1660년에 중국에 남경 대목구를 설정하면서 그 안에 조선지역까지 포함시킴으로서 처음으로 조선지역의 포교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것은 당시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한 조선 전도의 노력에 대해 포교성성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그것을 권장하는 뜻에 이루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명(明)나라의 각로(閣老)인 서광계는 마테오 리치의 영향을 받고 천주교로 개종했었는데, 1620년경 금군(金軍)에 패한 조선에 조위사를 파견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 전도를 계획했었다. 이 계획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을지라도, 이때 그는 조위사와 함께 예수회 선교사를 조선에 입국시킬 계획이었다.
이어 1644년에 조선 전도가 또 한 번 실현될 뻔했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는 귀국하는 길에 북경에서 예수회의 아담 샬(A. Schall)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왕세자는 조선전도를 위해 예수회원 1명을 동반하기를 원했으나 마카오의 예수회 책임자로부터 거절당하고 말았다.
예수회측의 거절은 도리어 중국의 프란치스코회원에게 조선 포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프란치스코 회원인 카발레라는 마카오의 예수회원들이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을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조선에 입국할 결심을 했다. 이리하여 그는 1650년과 1657년 두 번에 걸쳐 해로로 조선에 잠입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조선포교에 대한 카발레라 신부의 관심은 그후 프란치스코회 원인 북경주교에게 이어졌다. 베르나르도 델라 키에자 북경주교는 북경교구가 거리상으로 남경교구보다 조선에 더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지역에 대한 재치권을 로마에 요청하였고, 로마는 1702년 조선에 대한 재치권을 허락하였다. 이로써 1660년 남경주교에게 주어졌던 조선에 대한 관할권이 북경주교에게로 넘어갔다. 그후 베르나르도 북경주교의 사망과 더불어 조선은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과 인접된 관계로 인해 북경교구는 90년 후 조선과 다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간 조선에는 평신도로만 구성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순전히 한역저(漢譯著)인 서학서(西學書)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일으키고 천주를 찬미하는 신앙공동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서학서들은 대부분 북경의 선교사들이 저술한 것으로 북경을 통해 조선에 도입되었다.
조선에 교회가 창설된 다음 해, 즉 1785년 초에 북경교구에 부임한 구베아(A. de Gouvea)주교는 북경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에 복음이 기묘하게 전래하고 발전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그후 북경을 왕래하는 조선교회의 밀사들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교회의 장래를 위해 교황청의 어떠한 배려가 시급함을 느끼고, 1790년 10월 6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두 통의 서한을 보냈는데, 우선 첫째 서한에서 조선에 선교사의 도움없이 교회가 기적적으로 탄생한 사실과 그후 조선 교우들의 요청으로 선교사 1명을 파견하기로 결심한 경위를 말한 다음,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이상이 새로 탄생하는 조선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양떼에 관하여 내가 전하께 말씀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전하의 보호와 후원을 얻어 장차 다스려야 할 양떼입니다. 전하께서 이 반가운 소식을 교황 성하께 품하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성하께서 포교지들에 대해 기울이시는 극진하신 열과 성으로 미루어 일찍이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일이 없었고, 인간적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던 이 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사실을 크게 반가워하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매년 이곳의 그리스도교에 관해서 더 자세한 소식을 전하께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좌가 자세한 내막을 알고서 확고하고 유효적절한 배려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둘째번 서한에서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의 관할 문제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앞으로 조선 포교지가 뿌리를 내리고 풍성한 결실을 맺으려면, 포교지 자체와 그곳에 파견될 선교사들을 다스리고 통솔해야 할 조선교회의 책임자가 필요함을 역설한 다음, 이를 위해 북경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선교단을 생각할 수 있으나, 북경교구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북경교구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조선교회의 관할을 위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지었다.
안토넬리(Antonelli)의 포교성성 장관은 구베아 주교의 서한을 받고, 이내 조선교회에 관한 소식을 교황 비오 6세에게 전했고, 한편 교황은 이에 대해 구베아 주교에게 안토넬리 추기경을 통해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안토넬리 추기경은 내게 보낸 1792년 서한에서 그리스도교가 조선왕국에 세워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교황 비오 6세께서 느끼신 기쁨을 내게 알리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이 대단히 행복된 사건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를 아주 즐겨서 읽으셨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으며 이렇게 먼 지방에서 이러한 첫 수확을 바칠 수 있게된 것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이어 성하께서는 가장 자부적인 애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명한 용사들인 이 새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온갖 영적 선을 베푸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몸은 그 땅에 있지 않을지라도 영신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비상한 사랑으로 포옹하시고, 전심으로 그들에게 교황 강복을 내리셨습니다."
동시에 포교성성에서는 조선교회를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가를 심의하였고, 그 결과 조선교회를 돌보고 보호할 임무는 구베아 북경 주교에게 위임하기로 하는 동시에, 조선교회에 500은화의 원조를 보내기로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 선교사 1명을 파견하였고, 또한 조선교회에 관해 자주 포교성성에 보고함으로써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파견한 선교사는 6년만에 순교하였고, 이어 그 자신도 1808년에 사망하였다.
1801년의 대박해로 유일한 선교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지도자들을 잃음으로써 재기불능으로 생각되었던 조선교회는 10년만에 재기하여 북경주교의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고 선교사 파견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811년 10월 24일(양력12월9일)자로 된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조선교우들은 북경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보다 더욱 간절하게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진술하면서 영적 구원을 청하고 있다. "목자를 잃은 이 나라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할 수 있는대로 빨리 선교사를 보내시어 구세주 예수의 은혜와 공로가 전파되고, 저희들의 영혼이 도움과 구원을 받고,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어디서나 항상 찬양되게 하소서."
다음 조선교우들은 선교사의 입국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가장 적절한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이때 교회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시련을 겪고 있었고, 교황은 나폴레옹에 의해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 비오 7세는 조선교우들의 눈물겨운 호소문을 읽으며 그들을 도와줄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생각할 때 말할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이었고, 그저 기도나 드리고 하느님에게 하느님에게 호소하고 의뢰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교성성은 조선 포교지에 대한 도움이 긴급함을 인식하고, 그 해결안을 심의한 끝에 조선교회를 다시 북경주교에게 위임하고 그에게 서한을 보내어 가능한한 빨리 조선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촉구하기로 하였다.
한편 수자 사라이바 북경주교는 조선 교우들의 서한을 발송할 때, 함께 보낸 1815년 12월 29일자 서한에 이어, 조선교회 사정에 관해 1817년 2통의 서한을 포교성성에 보냈다. 여기서 그는 특히 조선에 2명의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한 기쁜 소식을 알렸다. 또한 포교성성에서도 회의를 거듭하면서 조선교회에 대한 시급한 구원책을 모색하였다. 동시에 조선교회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추기경들을 위해 조선교회를 간략히 소개하는 글까지 작성하였다. 비록 포교성성이 조선 포교지에 관해 회의를 거듭했을지라도 결과는 대동소이하였다. 즉 선교사의 파견을 가장 긴급한 사항으로 간주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북경주교에게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북경주교가 주선한 2명의 선교사가 모두 조선 입국에 실패했을 때, 조선 포교지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포교지 교구로서의 관계
그러는 동안 조선교우들은 교황에게 또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그들은 종래처럼 단순한 선교사의 파견만이 아니라, 선교사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도록 조선에서의 선교사 체류의 보장까지 아울러 요청하였다.
당시 포교성성 극동 경리부장 움피에레스 신부는 교황에게 보낸 조선교우들의 서한을 라틴어 역문과 함께 로마로 보내면서 조선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분리시키고, 또 조선교회를 돌볼 고유한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의견서를 덧붙였다.
이미 1824년 포교성성에서도 여러 수도회에 서한을 보내어 조선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할 계획이었으므로 포교성성은 곧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1827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서한을 보내고, 그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 때의 포교성성 장관은 카펠라리 (Cappellari, 후의 그레고리오 16세 교황) 추기경이었다. 파리 외방전교회와의 교섭은 파리 외방전교회측의 사정으로 3년을 끌었으나 마침 그 회원인 샴(태국) 교구의 부뤼기에르 보좌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게 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1831년 포교성성 장관에서 교황으로 당선된 그레고리오 16세는 누구보다도 조선 포교지 문제의 시급한 해결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해 9월에 교황 친서를 통해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 대 목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원 부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대목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조선교회의 사목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게 된 취지를 "주의 모든 양떼의 책임을 맡고 있는 본인은 교황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는 양들을 특별히 더 부지런히 보살펴, 그 양들이 참 우리 안에 들어 있어 천상 양식을 먹으러 오라고 불리우고, 거기까지 복되이 인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하였고,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 "당신이 지원했을 때 본인은 조선교우들이 궁핍한 사정을 고려했습니다"고 하며, 왜 그의 청을 받아 들이고 또 그를 초대 대목으로 택했는가를 밝히고 있다.
조선 대목구의 설정으로 조선교회는 비로소 사도적인 로마교회와 결합되어, 보편교회에 참여하고 보편교회와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부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파견되기로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교우들은 감격한 나머지 교황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내고, 주교를 위시하여 모든 선교사들을 기꺼이 영접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 대목구의 설정에 이어 조선 대목에게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를 선정할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박해로 대목직이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였고, 1836년에는 유구를 조선 대목구에 예속 시켰고, 1838년에는 조선국경에 인접한 요동에 대목구를 설정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는 등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841년에는 조선 교회의 주보를 성모무염시태로 변경해 달라는 조선 대목의 요청을 기꺼이 허락하였다.
조선교회는 대목구의 설정으로 대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기반을 굳건히 할 수 있었으나 박해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1839년과 1846년의 박해로 3명의 선교사와 최초의 방인 신부 김대건을 위시하여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제3대 대목인 페레올 주교는 입국하자, 이들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을 목적으로 곧 순교자들의 전기를 작성하여 1847년 로마로 보냈다. 이 기록을 접수한 교황청은 이례적으로 조선 순교자들을 대우하게 되었다. 즉 교황 비오 9세는 박해하에 있는 조선교회의 사정을 고려하여 시복에 필요한 최초의 심리를, 그 기록으로 대신하도록 허락함에 따라 조선 순교자들이 시복수속이 정식으로 접수되었고, 그 결과 1857년 9월 24일에 조선 순교자 82명이 가경자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교황 비오 9세는 1866년 다시 조선교회가 박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교우들을 위로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교황은 그 무서운 시련에서 드러나듯 하느님의 섭리를 설명하고 또 정의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언약된 보상을 상기시키며, 새로운 싸움을 위해 조선교우들을 격려하였다. 교황의 이러한 말은 조선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영광의 칭호가 될 뿐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조선교회가 부활하리라는 보증이 되었다.
또한 비오 9세 교황은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역사를 두 권의 책으로 펴낸 파리 외방전교회 달레(Dallet)신부에게 하서를 보내고, 저자의 그러한 문화적 공헌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와 문화적 업적이 드러나고, 또한 시련과 고문 속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마침내는 피로써 증거한 수많은 순교자의 무리가 알려지게 된 것을 치하하면서, 외국인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나라에 관한 것인만큼 그의 저서는 더욱 귀중한 것이라고 하였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의 의해 가경자가 된 조선 순교자들은 마침내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즉 조선 순교자 중 79명이 7월 5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시복식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시복식을 마친 후, 교황은 서울 대목구 대목 뮈텔(Mutel)주교를 위시하여 한국대표단에게 세 번이나 알현을 허락하였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본인은 조선 성교회의 모든 거룩한 사업과 모든 성직자와 모든 교우들에게 진심으로 강복하며 또한 그 심중에 원하는 좋은 사정에도 강복합니다. 이제 세계의 외롭던 한 구석이 치명록에 오르게 됨은 성교회의 영광이요, 본인과 여러분들의 동일한 즐거움입니다"고 하며 전교회의 순교록에 참여하게 된 한국교회의 영광을 치하하여 마지 않았다.
한국교회의 주교로서 교황을 알현한 것은 리델(Ridel)주교에서 비롯된다. 조선의 제6대 대목으로 임명된 리데 주교는 로마를 방문하고, 교황 비오 9세를 알현하였고, 이어 로마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진 후, 때마침 개최중인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참석하였다. 그후 제8대 대목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도 부임하는 길에 로마에 들려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한국교회에 대해 자세한 질문을 하며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뮈텔 주교에게 1921년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교황 탑전시종의 영예를 주었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명예 대주교로 승격됨으로써 한국교회의 최초의 대주교가 되었다.
조선 대목구는 비오 10세 교황 때, 즉 1911년에 비로소 대목구의 분할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가 분할 독립되었고, 조선 대목구는 서울 대목구로 개칭되었다. 이후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까지 무려 11개의 대목구 또는 지목구가 증설되었는데, 이것은 많은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한국신자들의 깊은 신앙, 선교사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인하여 신자가 급증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역대 교황들의 배려와 깊은 관심의 표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1932년 비오 11세에 의해 한국에서 최초로 한국인 성직자에게 맡겨진 전주 지목구가 설정되었고, 1942년 비오 12세에 의해 서울 대목에서 한국인 주교가 처음으로 임명된 것은 특기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1931년 한국교회가 조선 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경축하고, 또 그 기회에 최초의 한국공의회를 개최할 때, 비오 11세 교황은 무니(Mooney) 대주교를 교황사절로 파견하여 한국교회의 발전을 축하하는 동시에, 한국 공의회의 의장직을 맡아보게 하였다.
조선교회는 1850년부터 교황청 포교 후원사업 기구인 전교회 및 성영회 등과 인연을 맺고 조선에서의 복음의 전파와 불쌍한 어린이들의 구호를 위해 해마다 막대한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전교회는 파리 외방전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교회를 담당할 때부터 이미 간접적으로 원조를 받고 있었으나, 조선교회가 전교회로부터 직접 보조금을 받고 또 조선교우들이 전 교회에 가입한 것은 1850년대부터인 것 같다. 한편 선교사들은 전교 회원들의 너그러운 원조에 보답하고 동시에 그들이 조선교회에 대해 관심을 더욱 갖도록 <전교회지>에 자주 기고하였다.
조선교회는 1855년경부터 성영회의 사업기금으로 미신자 고아나 기아를 신자 가정에 맡겨 양육하게 하였다. 이래, 그 수가 점차 증가하여 1859년에 조선교회에서 돌보는 어린이는 43명이나 되었다. 성영회 사업은 조선교우들의 박애심을 키우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 교계제도 설정 이후의 관계
1962년은 한국교회와 교황청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해에 한국에 정식 교구제도인 교계제도가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3월 10일 교황서한을 통해 한국에 교계제도를 설정함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 3개의 교회 관구가 설정되었다. 첫째는 종래의 서울 대목구가 서울 관구로 되었는데 이 관구는 종래의 평양, 함흥, 춘천, 대전, 인천 대목구들을 속교구로 갖게 되었다. 둘째는 종래의 대구 대목구가 대구 관구로 되었는데, 이 관구는 종래의 청주, 부산 대목구들을 속교구로 갖게 되었다. 셋째는 종래의 광주 대목구가 광주 관구로 되었는데, 이 관구는 종래의 전주 대목구를 속교구로 갖게 되었다.이에 따라 종래의 명의주교들이 모두 정주주교들로 승격되었다. 서울, 대구, 광주 관구에서는 정주 대주교가 되었고, 기타 교구에서는 정주 주교들이 되었다.
교황 서한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교계제도를 설정하게 한 근본 동기는 한국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에 있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1950년대 후반기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도의 성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교황성좌로부터 자립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을 것이다.
교계제도가 설정됨으로써 한국교회는 130여년간의 포교지 교구에서 벗어나 모두 정식교구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한국 주교들은 교황을 대리해서가 아니라 직접 신권에 의해,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교구관할의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제도를 갖춘 완전한 지역교회로서, 자립능력을 갖춘 성숙된 교회로서, 전 교회에 관한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고, 전 교회를 통치하는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벌써 1962년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한국 주교단이 정식으로 초대되었다는 사시에서 나타났다. 이 공의회에서 향후 5년간 한국주교들은 현대교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교황과 함께 의논하게 되었다. 공의회가 끝난 후에도 한국주교단은 거의 격년으로 로마에서 개최되는 세계 주교 시노두스에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교회법의 개혁, 교리교육, 신앙, 혼종혼의 문제 등 당면한 교회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1969년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1명의 추기경이 탄생되었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교회의 최고 통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공의회가 끝난 후에도 공의회의 결의와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마련된 교황청 안의 여러 위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현대세계에 적극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한국주교회의 안에는 교황청 기구와 직접 간접으로 상관되는 여러 위원회가 있는 바, 그 중에는 ’한국 천주교 정의 평화 위원회’를 위시하여,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일치 위원회’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 위원회’ ’남녀 선교수도회 장상연합회’ 등이 있다.
이 밖에도 교황청과 관련된 기구로서 전교회, 어린이 전교회, 베드로 사도회의 한국 지부가 있다.
1968년 10월 6일 1925년에 이어 다시 한국순교자에 대한 시복식이 거행됨으로써 역시 한국교회에 대한 역대 교황들의 관심사 중에서 한국 순교자에 대한 깊은 신심과 깊은 신앙의 전통이 가장 매력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1925년의 시복식에 비기면 이때의 시복식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교황과 세계교회의 관심이 더할 수 없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1925년 불과 3명의 한국대표가 참가한데 비해 이번에는 136명의 순례단을 위시하여, 유럽의 교포를 합쳐 500여명이 시복식에 참가했고, 또한 10만명이 넘는 신자들이 시복식을 함께 지켜보았다.
한국교회와 한국순교자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관심은 특히 교황 바울로 6세에게서 역력하게 나타났다. 교황 바울로 6세는 이날 오후 베드로 대성전으로 들어와 새 복자들에게 경의를 표한 후 강론을 통해 24위의 한국순교사를 연구하여 한국가톨릭의 훌륭한 모범을 본받으라고 촉구하면서, 한국은 비록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는 나라라고 하며 특별한 애정을 표시하였다. 시복식에 참여했던 한 한국인 성직자는 한마디로 바티칸 10월 6일은 완전히 한국의 날이었고, 한국의 영광만이 크게 두드러진 날이었다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이어 다음날 10월 7일에는 새로 임명된 마산 교구장 장병화 주교의 성성식이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의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이날 교황 바울로 6세는 한국순례단에게 허락한 1시간 20분간의 유례없이 긴 알현에서 "순교자는 여러분의 영광인 동시에 전체 교회의 영광입니다. 한국교회와 한국국민에게 인사를 드리며 한국민의 화목과 번영과 평화를 기원합니다."고 하며 다시금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 대한민국과 교황청
대한민국과 바티칸 시국과는 1963년 말, 공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비로소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그 전까지는 교황청에서 한국에 교황사절을 파견한데 불과했고, 교황사절은 원래 국가를 대상으로 파견된 외교관이 아니라, 그 지방의 교회에 파견된 사절에 불과하다. 교황 바울로 6세는 교황사절과 교황대사의 고유한 임무에 언급하여, 지역교회를 위해 파견되는 사람들을 교황사절이라 부르고, 이러한 사절에게 교회에 대한 임무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임무가 주어지면 교황공사 또는 교황대사로 불린다고 하면서 교황사절과 교황대사의 임무가 전혀 다른 것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교황사절에서 교황대사로 승격되는 것이 상례이고, 따라서 교황사절의 파견을 외교관계 수립의 전단계로 볼 수 있고, 또 보아야할 것이므로 대한민국과 교황청 관계에 있어서도 먼저 교황사절의 파견에서부터 언급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교황사절이 파견된 것은 1919년이었다. 아때 교황청은 주일본 교황사절관을 설치하고 일본 교황사절로 하여금 한국교회의 교황사절까지 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교황청은 처음으로 한국교회에 고유한 교황사절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때가 1947년 7월이었다. 이때 메리놀 회원 패트릭 번(Byrne) 몬시뇰이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그는 교황사절의 권한을 갖고 있었으나 명칭은 아직 교황사절이 아니라 교황사절 서리(Apostolic Visitor)에 불과했다. 1949년 4월 7일 교황 비오 12세의 친서를 통해 서울의 상주 교황사절관이 설치되었고, 동시에 번 교황사절 서리도 교황사절로 승격되고 또한 주교로 승격되었다. 이어 6.25 동란으로 번 주교는 공산군에게 납치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교황사절 푸르스텐베르크(Furstenberg) 대주교가 한국 교황사절을 겸임하였다. 1953년 부터는 당시 춘천 지목구의 지목인 토마스 퀸란(Quinlan)몬시뇰이 교황사절을 겸임하였다.
이어 1957년에는 람베르티니(Lambertini)대주교가 제4대 교황사절로, 1960년에는 주피(Zupi)대주교가 제5대 교황사절로, 1962년에는 델 주디체(Dil Giudice)대주교가 제6대 교황사절로 임명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과 교황청은 공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교황 바울로 6세는 동년 12월 11일 대한민국에 교황공사관(Internuntiatura Apostolica)을 설치함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교황사절인 델 주디체 대주교가 초대 교황청 공사로 승격되었고,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주 스위스 이한빈 대사로 하여금 초대 주 교황청 공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한빈 공사는 1964년 4월 20일 교황 바울로 6세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당시 김용식씨는 1963년 7월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여 교황 바울로 6세를 예방했는데 이것이 바티칸과의 공사급 수교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66년에 양국은 공사급 외교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다. 교황 바울로 6세는 1966년 9월 5일자로 대한민국에 교황대사관을 설치함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서울의 델 주디체 교황공사는 교황대사로 승격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정일영 당시 주 스위스 대사로 하여금 교황청대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는 1967년 1월 30일 교황 바울로 6세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현재의 몬테리시(Monterisi) 교황대사는 제5대 교황대사로서 1982년 12월 24일에 한국 교황대사로 부임하였다. 그간 델 주리체 초대 교황대사에 이어 1967년에는 로톨리(Rotoli)대주교가 제2대 교황대사로, 1973년에는 도세나(Dossena) 대주교가 제3대 교황대사로, 1978년에는 안젤로니(Angeloni)대주교가 제4대 교황대사로 부임했었다.
■ 교황정책과 한국교회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를 주로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고찰하엿다. 즉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기원, 놀라운 발전, 수많은 순교자들, 특히 교황에게 보낸 서한 등이 교황청에 어떠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보았다. 이제는 입장을 바꾸어 교황청의 입장에서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고찰하려 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사를 이해하는데 보다 근본적이요, 결정적인 고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황청과 지역교회와의 관게는 역대 교황이 처해있던 상황, 포교지에 대한 관심과 정책 여하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아래 역대 교황의 고유한 정책이 어떠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교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알렐산델 7세(1655-1667) 제사 금지를 완화하는 등 중국포교에 관심을 보인 교황이었다. 따라서 그가 조선지역을 1660년 남경 대목구에 예속시켜 조선포교를 성취시키려 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클레멘스 11세(1700-1724) 이 교황은 다시 제사를 금지시킴으로써 중국포교에 큰 장애를 초래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포교를 위한 노력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교황 때, 즉 1702년 조선지역을 조선에 인접한 북경주교에게 위임하여 조선에 포교를 시도하려 한 것은 그의 세계포교 정책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비오 6세(1775-1799) 이 교황 때에 즉 1792년에 조선교회가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되고 또한 구베아 주교의주선으로 조선교회에 최초의 선교사가 파견될 수 있었다. 만일 이 교황이 좀더 자유의 몸이었다면 조선교회를 좀더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절대주의, 계몽주의, 특히 프랑스 혁명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로 인해 아주 깊은 고뇌 속에서 살아야 하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정부의 명으로 로마에서 체포되어 이탈리아 각지로 끌려다니던 끝에 일생을 마쳤다. 그는 하느님이 십자가의 고뇌에서 교회를 탄생시키고, 그 영광을 굴욕에서 그 벌을 오류의 암흑에서, 그 발전을 적의 공격에서 이룩하기를 기원했었다. 아마 그는 조선교회의 오묘한 기원과 발전에서 그러한 교회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북경주교로부터 조선교회의 오묘한 탄생과 발전소식을 듣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던 것이다.
비오 7세(1800-1823) 이 때의 조선교회는 성직자 영입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고 또한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조속한 선교사의 파견을 간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선교사조차도 얻지 못한, 조선교회로서는 가장 어두운 시기로 거의 절망에 가까운 시기였다. 그것은 이때의 교황이 포교지나 조선교회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었다하더라도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정복자의 횡포로 다년간 포로생활을 해야 했던 교황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교우들의 애절한 서한을 받고서도 교황은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에게 조선교회를 부탁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 이 교황과 더불어 조선교회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레고리오 16세는 유달리 세계포교에 관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는 1832년 전세계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세계교회의 중심인 성 베드로좌에 더욱 굳게 결합되도록 호소하였다. 그의 교황 재위기간 중 70개의 교구와 대목구가 설정되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세계포교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레고리오 16세는 교황위에 오르기 전에 1826년부터 포교성성장관으로 활약하였고, 그래서 조선교회는 이때부터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즉 포교성성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조선교회를 맡도록 교섭을 시작함으로써 조선교회의 문제의 해결을 직접 모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파리 외방전교회와의 교섭은 지연되었고, 그러는 동안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2월 2일 교황위에 올랐다. 교황위에 오르자 그는 포교성성에 조선교회 문제의 해결을 지시하였고 그 결과 그는 그해 9월 9일 교황 친서를 통해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조선포교지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그 후에도 조선대목구에 유구 지역을 포함시키고, 또 만주교구를 창설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는 등 조선교회를 위해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은 그레고리오 16세의 넓게 세계포교, 좁게는 조선포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의 표명이었다.
다음 비오 9세(1846-1878), 레오 13세(1878-1903), 비오 10세(1903-1914), 베네딕토 15세(1914-1922)교황들의 시기에는 이들 교황의 정책과 관련하여 한국교회에 특별히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비오 11세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또다시 새로운 전환기를 맡게 되었다.
비오 11세(1922-1939) 그는 현대의 위대한 교황의 한 분일뿐더러, 특히 포교 교황으로써 유명하였다. 실제로 그의 재위기간 중 세계선교에 큰 비약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에도 많은 번영을 가져왔다.
비오 11세의 선교정책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현지화였다. 즉 교회를 현지문화에 적응시키고 또한 가능한한 현지인으로 하여금 교회를 다스리게 하려 하였다. 이런 정책의 일환에서 그는 그의 재위 기간중 전세계의 교구수를 거의 배가시켰다. 한국에서도 이 기간동안 5개의 교구, 즉 평양(1927), 연길(1928), 전주(1937), 광주(1937), 춘천(1939) 교구가 증설되었다. 이러한 교구의 증설과 관련하여 미국의 메리놀회, 아일란드의 골롬바노회 등 새 선교단체가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1926년 처음으로 6명의 중국인 주교가 로마에서 성성되었고, 1937년 동경대교구가 현지인 교구장의 손으로 넘어간 것과 관련하여 한국에도 1937년 전주교구가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임됨으로써 처음으로 방인교구의 탄생을 보았다. 또한 1935년 한국 최초의 방인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교황청의 인가를 얻은 것도 이러한 교황정책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최초의 공의회가 개최된 것도 모두 이 교황 때인데(1924년) 7년 후인 1931년에는 한국에서도 최초의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교황정책을 따라, 특히 가톨릭 액션과 전교회의 육성이 강조되었다. 가톨릭 액션교황으로도 널리 알려진 비오 11세는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전 사회를 새롭게 하려는 최대의 희망을 갖고 가톨릭 액션을 거의 모든 나라에 도입시켰다. 또 그는 세계 포교의 후원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1922년에는 전교회를 1926년에는 성영회를 로마로 옮기고 교황청 직속 후원사업으로 승격시켰던 것이다.
또한 비오 11세는 1929년 유명한 라테란 조약을 위시하여 현대국가와 교회와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아직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나라에는 교황사절을 파견하여 지역 교회들을 교황성좌와 더욱 긴밀히 연결시켰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1919년 일본에 처음으로 교황사절이 파견되는 동시에 한국교회의 교황사절도 겸임하였다. 3년 후에는 중국에도 교황사절관이 설치되었다. 또한 비오 11세는 1935년 제사 금지를 완화시킴으로써 유교문화권 국가들에 있어서 복음전파의 가장 큰 장해물의 하나였던 제사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끝으로 비오 11세는 전 교회의 신앙쇄신의 일환으로 종교생활의 심화를 도모하려는 뜻에서 재위기간 중 무려 500명의 복자와 32명의 성인을 탄생시켰다. 한국교회의 순교자 중 79명도 이러한 교황정책의 일환에서 1925년 복좌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비오 12세(1939-1958) 이 때에는 예수 성심과 성모께 대한 특별신심에서 한국교회에서도 이러한 신심이 크게 고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 23세(1958-1963) 교회사에서 전환점이 된 이 교황의 시기는 또한 한국 교회사에서도 전환점을 이룩하게 되었다. ’아조르나멘코’ 즉 현대세계에의 적응은 그의 최고의 목표였다. 이 적응은 포교지에서도 긴급하였으니 현지인에 의한 교계제도가 시급히 실현되어야 하였고, 또한 포교지에서의 유럽 우월주의가 제거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교황정책의 일환에서 1962년 한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바오로 6세(1963-1978) 그는 이미 그의 전임자에서 시작된 추기경단의 국제화를 더욱 확대하고 그 수를 대폭 증원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에서 한국교회도 1명의 추기경을 얻게 되었다.
평화의 봉사를 위한 교황청의 외교활동의 강화, 바오로 6세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하였고 그래서 그의 재위기간 중 주 바티칸 외교사절의 수가 배가되었다. 이러한 교황정책으로 말미암아 1963년에 바티칸과 공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맺는말
이상으로 우리는 교황청과 한국 또는 한국교회와의 관계사를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다음은 교황정책의 입장에서 고찰하였다.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에 있어서 1962년의 교계제도의 설정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계제도의 설정에서 비로소 한국교회는 사도전승의 교황성좌와 완전히 결합되어 신앙의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완전하고 고유한 지역교회로서 전교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역교회와 교황성좌와의 이상적인 관계는 일치성과 다양성을 조화시키는 데에 있다. 일치성이 지나치면 획일성이 될 위험이 있고, 다양성이 지나치면 이교가 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조화의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지역교회의 성숙성에 매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번 공의회는 이 점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지역교회들은 그 독특한 생명력과 성숙성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 교회들은 믿는 백성과 일치된 그 자체의 교계제도와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완전히 영위할 수 있는 적절한 방도를 충분히 갖춘 뒤에 비로소 전 교회의 공익을 위해 공헌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교계제도의 설정 이후 교회제도면에서 완전한 지역교회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명실상부한 지역교회가 되었느냐는 또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문제는 오늘의 한국교회와 교황청과의 관계에 비추어 적지 않은 의문을 일으키게 한다.
첫째로 그것은 인류복음화성성(이전의 포교성성) 관계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아직도 한국교회는 필자가 아는 한에서 거의 이 성성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아마 한국교회가 아직 재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과연 한국 교회는 아직도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반성해야 할 첫째 점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한국교회의 성숙성의 문제는 한국주교회의서도 드러난다. 지난번 공의회에서 주교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 주교회의를 협의체밖에 인정하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는 교황성좌와의 견고한 결합을 유지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주교들이 지역교회의 실정을 감안하여 원만한 협의를 통해 지역교회의 문제들을 해결시키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주교회의가 그 지역교회 자체의 문제(특히 한국교회에서와 같이 교구간의 인적 물적 교류같은 것)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아마 영원히 미결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도 교구간의 협조문제와 같은 지역교회 문제에 직접 간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교회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각 교구가 합심하여 봉사할 수 있을 때 전교회의 공익을 위한 봉사도 가능할 것이다.
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에 대한 교황의 방한은 분명히 한국교회를 교황성좌에 더욱 결합시키는 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교회는 그것을 보다 자율적이고 고유한 지역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황이 한국어로 미사를 집전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갖고도 왜 자주적인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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