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답변] 아래 개신교 신자의 글에 대해 - 무엇이 공존인가요?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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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11-19 | 조회수2,627 | 추천수10 | 신고 |
아래 임진숙 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님의 글 중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다 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가톨릭 신자들도 동 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님이 이야기하신 중세의 싸움을 거론하셨던 것과는 어째 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곳이 어떻게 해서 님이 그런 식으로 종교 싸움터로 인식하게 되었을까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님은 프로테스탄트이니까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본래 인간의 마음 속에 깊숙이 뿌리 박고 있 는 진실을 거부하는 근본적인 본성 즉 남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바라지 도 않거니와, 남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도 피하는 그 본성에서 벗어나 냉정한 진실 위에서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말해둡니다.
님은 자신이 믿는 종교인 프로테스탄티즘의 근본 원리에 대해 연구해 보신 적 이 있습니까?
자신이 믿는다는 종교에 대해 적어도 한번쯤 도대체 내가 믿는 교(敎)가 무 엇을 바탕으로 성립되었으며 그 구성원들에게 가르치는 근본 가르침 - 교의 (敎義) 에 대해 심도있게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신앙이 무엇인 지 종교가 무엇인지 모르고 허울 좋은 껍데기뿐인 신앙을 자신의 이기심하 나로 부둥켜 안고 지내는 이기주의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늘 한 대상의 두가지 면 중 한가지 면만을 신앙의 대상 으로 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것은 제가 예전에 프로테스탄트였기에 잘 알기도 하지만 얼마전 늘 한쪽 면에만 치우쳐서 성서 해석을 무슨 법 조문 으로 생각하는 -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 인성을 부정하는 도 체틱한 점과 모든 성서 구절을 법률 조문 처럼 해석하는 태도하며 성서의 모든 것을 지킬 것처럼 하다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괴상한 신앙심 등을 가진 - 개신교 근본주의에 대한 저의 글을 읽고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신 학적 관점이 거의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의 경향이라고 친절하게도 상세히 알려주신 고마운(?) 개신교 신자분 (아마도 이 분은 제가 개신교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거나 저의 글을 끝까지 안 읽어본 듯 합니다. 저 는 분명히 개신교 근본주의는 개신교의 한 경향이나 한국에 있어서는 근본 주의가 개신교의 여러 경향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닌 대다수 개신교 신자가 이에 물들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는 위험성도 물론 지적 한 바 있습니다.) 의 글을 통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왜 그른지 그리고 그 많은 개신교와 오 직 하나뿐인 성교회 가톨릭의 서로 다른 교리가 다 옳은지 이것이 도대체 다 옳다면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에 대한 관심이 대부분 없습니 다. 그들과 교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결론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왜 교리에 관심을 두느냐?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전설이나 꾸며낸 것 에 지나지 않는데 왜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려 드느냐? 오직 한 가 지 믿고 따라야 할 것은 성서 밖에 없다. 뭐 이런 식입니다. 교리가 사람이 임의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이기에 사실 이들과는 더 이상의 이야기 가 무의미합니다. 그들이 유독 핏대를 올리며 강조하는 그럼 그 성서는 어디 서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개신교인들이 바알 우상 받들 듯이 떠받드는 성 서가 하느님이 어느날 인간들에게 이것은 나의 말을 적어놓은 신령한 책이 니 여기에 쓰여있는 구절구절 그대로 실행토록 하여라 하시면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책 뭉치를 던져줬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서를 대하는 프로테스탄트와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이 인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계시하신 즉 하느님의 영감이 인간의 지적 활 동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유대 민족의 역사 기록이자 하느님이 친히 자신의 뜻을 우리 인간을 통해 펼쳐 보이신 대역사라고 보는 가톨릭의 관점이 어디 서 일치한단 말입니까?
평행선을 보고서 왜 둘은 안 만나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평행선의 성질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 에는 안 만난다는 것만 중요하게 보일 뿐입니다. 왜 가톨릭과 개신교가 바라 보는 하느님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공존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말로만 공존을 외치면 그게 공존인지 압니다. 말로만 역사를 외치 면 역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책을 펴 놓고 물론 가톨릭 역사가가 쓴 책 말고 가장 모범적인 개신교 국가의 개신교 역사 자료를 검토해보십시오.
가톨릭 신자가 쓰지 않고 가장 권위 있는 역사 자료로는 영국의 브리태니 커 백과 사전이 단연 꼽힐 것입니다. 그 책의 그리스도교 편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약 30여가지의 각종 그리스도교 종파가 각 종파의 창립 자와 창립시기, 창립 준거별로 죽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보게 되면 그토록 가톨릭이 정통 그리스도교가 아닌 무언가 잘못 된 아니 이상한 이단 종파 중의 하나일거라고 생각해왔던 개신교나 그 외의 타종교인이라면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영국은 국교가 성공회입니다. 더구나 영국 국왕은 성공회 신자가 아니면 국 왕에 즉위조차 할 수 없는 강압적 종교 차별 법률이 분명히 존재하는 나라에 서 작성된 개신교인이 쓴 역사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가톨 릭은 그 창립자가 예수 그리스도이며 창립시기는 서기 33년으로 창립 준거 는 신약 성서로 나와 있습니다.
그 외의 타 종파들인 장로교 신파, 장로교 구파 ,성공회 고교회파, 성공회 저교회파,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유니테리언 교회, 퀘이커 교회, 제 7일 안식일 예수 재림일 교회,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등 이름도 외기 힘든 각 종 종파들은 모두 다 창립자, 창립시기, 창립준거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며 서기 33년 경에 성립하지도 않았으며 그 준거가 신약성서에 있지도 않음을 간략히 표로 만들어 정리해 두었습니다.
이것을 보고도 뭐라고 하시렵니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들은 차라리 당신들에 비하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은 귀와 눈이 멀쩡히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이 있기 는 합니다. 단 그것을 엉뚱한데 사용함으로 뻔한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가장 하여 먼저 자신을 속이고 그리고 다른 이들도 속이고 그리고 이성을 희생시 켜 감정과 정서를 한껏 고양시켜 자신의 위대함을 빛내줄 종교를 위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가차없는 희생과 주관적 아집을 버릴 것을 명령하는 그런 종교, 자신의 모든 이기심과 허영심, 교만함과 독선의 껍질을 깨부수기를 명하는 종교, 네가 직접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 너를 때려눕히리라는 종교 를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가톨릭을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 는 이유입니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이기심을 충족시켜 줍니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허영심 을 채워줍니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대리 만족을 유도합니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상대성을 논합니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우월성을 논합니다. 모든 종 교가 인간의 고집과 독선이 만들어낸 이 세상을 혐오하도록 합니다. 모든 종 교가 그들이 추구하는 진리란 마음에 드는 한 가지만을 신봉하면 된다고 가 르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 그런 종교와 전혀 다른 한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는 모든 것 위에 존재하시는 한분이신 하느님을 논합니다. 그분은 오 직 한분이시며 세 위격이라는 도저히 이해 안되는 신비를 말합니다. 그분의 아들은 또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이러한 양면적인 이야기를 우리 에게 합니다. 또 그 아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수난하시고 무 덤에 묻히셨다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을 고백합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그 사 랑에 우리도 보답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분이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 도주의 형상안에 언제나 우리에게 보여주심을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몸과 피 를 받아모심을 이야기합니다. 상징인 동시에 실재요. 실재인 동시에 상징임 을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이 두가지를 다 믿으라고. 거기엔 너의 주관은 필요없다고 내가 신인 동시에 인간이므로 이 모든 것의 양면성 뒤엔 나의 본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고.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나에 대한 배반이라고.
가톨릭이 가르치는 진리는 언제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늘 한쪽 면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것은 카이사르의 얼굴을 새겨놓은 동판에 지나지 않습니 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닫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특별히 자신과 베드로를 위해 세금을 바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값어치 있는 것은 그 값을 치러야 함을 그 대가를 지불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 시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본성안에 융합된 양면성에 바 탕한 우리의 신앙이 전 우주적 진리라는 확신에 가득차 있는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에게는 곱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교리라는 이름으로 주장하는 진리란 하나의 또 다른 인간이 주 장하는 학설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는 많은 점에서 공동 신조를 가질 수 있으나 불행하게도 양자의 신앙 동기에서 는 전연 그 모양을 달리 합니다.
전자가 자신도 타인도 틀림없는 하느님의 위엄 앞에 엎드려 그 신조를 구체 적 교도권을 통하여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 교도권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 정되고 성령으로 지도받는 것을 승인하므로) 후자의 신앙은 그 형식이나 내 용은 여하튼 간에 결국은 자신을 직접 비판하는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냐하면 그 신조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고 가톨릭 신자처럼 그리스도가 명하 는 바대로 주어진 그대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자신만의 신조를 스스로 발견해야만 프로테스탄트인 것입니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신조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하여 그것에 도달하 였는가 하는 과정,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것을 믿는가 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진리가 이러이러하다고 권위를 가지고 자신에게 제시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는 레싱처럼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만일 오른손에 모든 진리를 들고 그 왼손에는 단 하나의 끊임없 는 진리욕, 더욱이 영원히 헤맬 것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나에게 선택하라고 하신다면 나는 하느님께 무릎꿇고 왼손을 잡고 말할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시여, 이것을 주소서. 진리 그 자체는 실로 당신만의 것이니까요."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상에 오시게 된 것을 그들은 어 느 사이에 잊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그 자신에게 프로테스탄티 즘의 사이비 겸손 - 숨어 있는 교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숭배의 대상이 전능한 하느님이라고 입으로는 떠들지만 전능한 하느님이 왜 어째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약속하시지 않고 자신의 아 들을 이 땅에 하필 동정녀 마리아를 택해 보내셔서 전 인류의 구원을 하시 기로 작정하셨는지 그들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이해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전능함이 구원을 위해서 어째서 그런 인간적인 제약 조건 을 수반하는 과정을 겪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좋 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실제로 전능하지도 신비한 존재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들의 기대감 을 채워주는 그런 존재로 과대 망상을 하며, 그 기대감을 채워 주지 못하는 구절을 성서에서 발견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견강부회, 아전인수격의 성서 구절 해석으로 일관하다가 그 얄팍한 신앙심마저 잃어버리고는 자매님 이 이야기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무교회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선구자였던 우치무라 칸조와 그 의 후학인 故 함석헌 옹과 김교신 목사의 뒤를 따르던 많은 이들 가운데 강경 보수주의자들(님의 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우 보수주의자들)은 가톨릭에 귀 의했으나 늘상 기존의 권위에 반항으로 일관했던 순수한 프로테스탄트(反抗 者)들은 모두 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 다.
마르크스주의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자매님의 글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의 반대를 받는 사람은 네오 마르크스주의자라고요?
참 이거야 저보고 웃으라고 해주신 이야기인지는 모르나 어디서 그런 이야기 가 나오는 겁니까?
왜 역사적 진실 앞에서 그렇게 엉뚱한 이야기만 하시나요? 마르크스가 개신 교 목사의 아들인 것은 아십니까? 그의 누이 동생이 폐병으로 누워 있을 때 마르크스가 단식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께 누이 동생을 살려 달라고 기도한 보 람도 없이 누이가 죽음을 맞이하자 개신교 신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모든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며 그 아편으로 인해 사회의 부가 일부 특권층에만 돌아 가는 현상을 타파하는 계급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주장에 따 라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레닌과 그의 후계자 스탈린 같은 이는 언제나 입 버릇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하던 말이 자본주의자들의 일개 사단 병력을 쳐 부수는 것보다 가톨릭 사제 한 명을 죽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한 사실을 모르십니까?
가톨릭이야말로 독재자들에게는 눈엣 가시요, 새로운 인조 사상의 주창자들에 게는 크롬웰의 오줌관에 박힌 모래알보다도 더욱 성가시고 이를 박해하고 쓰 러뜨리지 않으면 자기 존재에 위험을 느낄 정도로 살아있는 세력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프로테스탄트라도 자신의 교파가 그리스도의 참교회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개신교인들은 자 신들이 만난 가톨릭인들을 처음에는 그들의 사이비 겸손과 미사여구로 대하 다가 어느 순간이 지나면 "나는 네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해. 한 번 교회에 같이 가보면 너도 분명히 하느님을 만나게 될거야." 하면서 같이 갈 것을 권유(?)합니다. 사실 이건 권유가 아니라 폭력의 행사라는 게 옳은 표현이 될 것입니다.
종교 개혁 당시의 일시적인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들어 전체를 매도하는 루 터파들처럼 그들의 후예들인 프로테스탄트들은 그 옛날의 악폐를 철저히 청 산하고 다시금 예전의 가톨릭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지금의 교회를 외면합니 다. 그들에겐 가톨릭이란 단어는 교황이 제멋대로 신자들을 조종하는 근본주 의자들의 알베르타라는 인형극을 생각나게 하는 모양입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얄팍한 그들의 머리 속에서 그저 성경 구절 몇 개만 보 고서 그것을 자신들의 머리로 이해하면 모든 것이 만사 형통이라고 그저 그 감정을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말하면 된다고 떠듭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인들에게 늘상 당해 오고 있습니다. 왜 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반복되는 Mind Control 내지는 세뇌 공작같은 주술적 행위를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기에 그들의 사랑없는 이상한 행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랑이란 연인과 부모와의 사랑이나 친구들의 우정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 니다. 다른 이를 배려하는 작은 마음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나와 다 른 피부색을 가진, 나와 다른 불리한 신체 조건을 지닌, 나와 성장 환경이 다 른 많은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들에 대해 갖는 우월감을 그들은 겸손이라 부릅니다. 겸손이라는 사이비 교만을 감춘 미사여구의 뒤편에 그들은 차디찬 비수를 준비해 놓고 있습니 다.
자신들의 감정을 한껏 고조시켜 다른 이들도 나의 이러한 자기 기만적인 마약 중독 증상에 비견될 만한 정신적 환각 증상을 불러일으키거나 내지는 그들의 행위를 우상 숭배자들 마냥 따라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라고 잘못 생각하는 그들의 전도 행위에 한두번씩 당해 보지 않은 가톨릭 신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가톨릭 동호회 안의 공간에서까지 와서 가톨릭에 대한 저들의 우월감을 비치며 그들만의 사이비 겸손을 가장한 교 만함을 맘껏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아량을 베풀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이 갖지 못한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악마가 천사에게 다가와서 이 세상은 악의 기운이 넘쳐난다고 자랑을 합니다. 사람들이 참과 거짓의 분별을 포기하고 아량과 관용의 정신을 정의와 진리 가 오류와 타협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것을 화합과 공존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할 때 우리로부터 천사는 떠나갈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제 악 마의 속삭임만이 들려올 뿐입니다. 나는 네가 그렇게 의로운 사람인 줄 진작 에 알았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떠들어 대는 종교 사이의 공존에 대해 안 된 이야기지만 님은 도대 체 우리 가톨릭 신자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 자신이 가톨릭에 귀의한 이후 지금까지 도대체 신부님의 강론 시간에 들은 이야기 가운데 타 종교에 대한 내용은 단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제가 대학교까지 있어 왔던 각종 개신교 교파에서는 한 두명이 아닌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타종교 -가톨릭, 불교- 에 대한 목사들의 비방과 비난은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반교황주의자로 자라왔기에 더욱 극렬한 가톨릭 반대자가 되었으리 라 생각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가톨릭 혼자서만 유일하게 이 세상의 각 개신교 종파의 지독한 반대를 받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개신교의 무언의 열등 의식의 표출이고 프로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잠재된 무의식의 표출이 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진리에 대한 잡다한 오류의 발악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가톨 릭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끊임없는 의문을 해결하려는 지적 탐구가 오늘날 가톨릭 신자로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평범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개신교인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성당과 절에 방화를 하고 불상을 파손시 켰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개신교인들이 북한산을 비롯한 야산에 올라가 자 연을 파괴하는 신성 모독을 범했는지 그러고도 그것이 공존이라고 이야기하 는 것이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박박 우겨댄다면 그야말로 당신들 은 아직도 어둠과 진리를 구분 못하는 가련한 영혼들입니다.
이 방에 들어오는 개신교인들이 그야말로 십인십색 백인백색의 성서 해석 을 들고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서를 같이 읽고 공부하자고 회유하는 것은 150 년전 김 대건 신부님께 개신교 성서를 들이밀던 그 상해의 개신교 목사 들이랑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무슨 의미로 전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까?
님이 주장하는 공존이 님에겐 어떤 의미인지 모르나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이해하기로는 105년 전인 1894년 3월 26일 ’진고개 사건’이라고 서울 주요 일간지에 대서 특필된 명동 대성당 신축 현장에 개신교 신자 다섯 명이 무 기를 들고 공사를 방해하러 공사 현장에 침입했던 일이나 얼마 전에 있었던 약현 성당의 방화 사건이나 전국의 사찰들에 방화하고 불상을 훼손하는 행 위나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개신교인들의 모습이 공존이라고 하기엔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군요.
그게 개신교인들이 말하는 공존이란 말입니까? 가톨릭 신앙을 가진 것이 자랑스럽고 가톨릭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톨릭 동호회에 가입한 가톨릭 신 자들에게 개신교인들이 뭐라고 하건 성서를 같이 보자고 하건 자신들의 교 회에 송금을 하라고 하건 간에 성서 구절에 대해 자신의 교회의 목사의 말 을 들어보라고 하건 간에 그것에 대해 가톨릭 신자들이 받는 마음의 상처가 있건 없건 간에 그에 대하여는 단지 공존의 차원에서 참고 넘어가라는 말로 들리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저에겐 님을 비롯한 개신교인들이 참으로 비겁하게 보입니다.
왜 그렇게도 마음이 열려 있지 않지요? 님을 비롯한 개신교인들은 마음 속 깊숙이 가톨릭 신앙이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늘 두려움과 불안감이 있습니다. 그건 님을 비롯한 개신교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진리를 향한 무언의 외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침을 애써 외면하고 자신을 기만하곤 하지만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저 보다 님이 자신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바와 다른 개신교와의 차이가 늘상 진 리가 아닌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어떻게든 종교적 감정 의 고취로 모면하려고 하는 것을 잘 압니다. 또한 그것이 비단 자매님의 처 지만이 아님을 가톨릭 신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수 험생들 가운데 불안할수록 공부 아닌 다른 것 예를 들어 비디오를 본다거나 노래방에 간다거나 하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이 바 로 스트레스가 있거나 두려움이 있는 경우 자신의 그 두려움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감정의 고취를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일종의 정신 환각 증상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불안감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수험생의 태도와 늘상 Mind Cure를 외치는 님의 종교 사이에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으며 이것을 두고 종교적 정서의 심화 어쩌고 할 때 우리는 역겨움을 느낍니다.
지금부터 500년전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교회를 이탈 해 나갔습니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머니 교회의 만류하는 손을 뿌리치고 나간 그들에게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하느님 아버지마저도 같이 계시지 않음을 느낄 때 그들을 이끈 것은 성령이 아니라 그들이 경악해 마 지 않는 어둠의 존재였음을 그들은 지금 서서히 깨닫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에 유럽에서는 갈라진 형제들이 서서히 가톨릭의 품 안에 돌아오려는 움직 임이 감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현실은 너무나 암담합니다. 구한말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 들이 천주교는 정교일치를 주장한다고 그래서 정교 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개신교가 나라에 부담이 안 된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고종 황제에게 한 것에서부터 우직하게 교리를 익혀야만 신자가 된다고 하는 전통의 천주교 교리 교육을 고수한 결과 오늘날 각종 의료사업과 학교 사업을 통한 간접 선교를 통한 미국 문물을 수입하는 창구 구실을 해 온 개신교가 일반 대중 에게 많이 번져 나간 것은 생각있는 지성이 전무하다시피한 우리 나라의 현 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여겨져 암울할 따름입니다.
앞에서 자매님이 말한 대로 공존은 참 좋은 뜻입니다. 그러나 그 공존이 참된 공존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공존하려고 하는 대상에 대한 참된 이해와 그를 존중하는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헛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늘상 개신교인들에게 말해 왔지만 가톨릭은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언행을 나서서 하지 않습니다.
"너의 도도한 물결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너는 그 이상은 넘어 올 수 없 다." 고 이렇게 경고 표지판을 붙여 놓았음을 알리고 그 근처엔 가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그 표지판을 보고도 무시하다가 다치는 경우엔 자신들의 잘 못은 인정하지 않고 뜨거운 장작이 나를 쳤다느니 성벽의 뾰족한 울타리가 나를 찔렀다느니 하는 망상에 사로잡힌 이야기를 하다가 그도 안될 것 같으 면 십자군의 십자 포화에 맞았다느니 하면서 또 가톨릭을 걸고 넘어집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머리 속에서 꾸며낸 상상으로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다시 같은 길을 걷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개신교인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제발 사이비 겸손과 미사여구를 동 원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톨릭을 당신들이 정통이니 아니니 판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면 가톨릭의 성인들 의 삶을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도록 한 힘이 대체 무엇에서 나왔을까를 묵상하게 되면 조금은 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개신교 형제들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는 충고의 말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한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따라서 죽어본 뒤에라야 진리와 거짓을 판별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힌 프로테스 탄트 형제들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지성 중의 한명이었으며 그 유명한 가톨릭 호교론 ’팡세’의 저자 파스칼이 한 다음의 말을 한번 새겨듣기 바랍니다.
"생(生)을 마감한 뒤에 가톨릭이 옳다고 믿은 것이 틀렸음을 알게 되는 것보
다 가톨릭이 틀리다고 믿고 있다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는 편이 훨씬 무서울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귀의에 대한 풀턴 쉰 대주교님의 구절로 저의 두서없는 글을
마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 중 략 ..................
"귀의를 시작하는 한 가지 간단한 방법이 있다. 즉, 당신이 하느님께 가면
그분이 무엇을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그분께 무엇을 드릴 것인지를
물어보라. 이 말은 희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차지함
으로써, 그 밖의 모든 것도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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