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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타는 사랑 - 하느님께 다가가게 해주는 이야기 중에서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11-24 조회수930 추천수8 신고

 

                   ♣ 불타는 사랑  ♣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의 사랑은 단순한 친절함을 넘어서게 된다.”

 

   [피터 크리프트, 「신앙의 기초」]

 

 

 

 

 

    브룩시아 왕국은 오랜 세월 동안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동안

   에릭 왕은 브룩시아 군대를 이끌고 적군과 싸우느라 레오너  왕비와

   어린 외아들 루퍼트 왕자를 왕비의 아버지(장인)인 볼드윈 경의 손에

   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볼드윈 경은 왕의 요청에 따라 아예 궁궐

   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루퍼트 왕자의 교육을 더욱 밀접하게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볼드윈 경은 최선을 다해 이러한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교육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 아이의 본능적인 충동과 욕구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성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볼드윈 경은 외손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할 뿐 까다롭고 엄격한

   스승 노릇을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저 자상한 외할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하여 왕자의 모든 응석을 받아 주고, 아무런 불편함이

   없도록 보호해 주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레오너 왕비 역시

   루퍼트의 교육에 관한 한  철저하게 아버지를 따랐다. 엄밀히 말하면

   단순히 따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루퍼트는 태어날 때 발이 조금

   기형적으로 생기는 바람에  걸을 때마다 조금씩  다리를 저는  결점이

   있었다. 왕비는 아들의 이런 결점을 보충해 주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그 결과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왕자는 버릇없는 망나니로 자라나 모든 사람을 짓밟으려  드는 난폭한

   괴물이 되어 갔다.

 

   에릭 왕은 전쟁터에서 잠깐 짬을 내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왕자의

   이런 행동을 보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틈만 나면 장인과  아내에게

   제발 좀더 엄하게 왕자를 키워 달라고 호소하곤 했다.

 

   에릭 왕은 그들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은 사랑과 친절을  혼동하고 있어요. 친절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달래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건 일종의 연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만약 다리가  부러진 말을 죽임으로써 그 고통을 줄여

   준다면, 그것은 친절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연민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열정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더 큰 고통이 초래된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

   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루퍼트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작정

   응석을 받아 주는 것이 아니라 인성을 형성시켜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루퍼트가  성인이 되어도 왕의 책무를 수행할

   능력을 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볼드윈 경과 레오너 왕비는 에릭 왕의 열변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왕이 다시 전쟁터로 떠나고 나면 어린 루퍼트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에릭 왕의 영웅적인 노력 덕분에 브룩시아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왕은 군대를

   해산하고, 왕궁의 가족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동안 루퍼트 왕자는 젊은이로 성장해 있었다.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한 결과가 도처에서 끔찍한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모든 사람의 지탄을 면치 못하는  것들이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에릭   왕이 왕자의   행동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왕자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망나니 같은  기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에릭 왕이  돌아온 지 몇 주 뒤, 평화의 도래를 기념하기 위한 운동

   경기가 벌어졌다. 루퍼트 왕자는 다리가 온전하지 못한 처지였지만 말

   을 탄 채 창으로 승부를 겨루는 시합에 출전하겠다고 우겼다. 그는 체

   계적인 훈련을 견뎌 낼 만한 인내심을 배우지 못한 터라 제대로 창술

   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체  높은 귀족   아스퀴스 백작의 아들과   맞붙어 형편없이

   패하고 만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자는 자신이

   졌다는 사실에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아스퀴스가 관중석으로  돌아가

   갑옷을 벗는 순간, 몰래 그  뒤를 따라갔던 루퍼트 왕자는 칼로  그의

   등을 찔러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말았다.

 

   그런 끔찍한  짓을,  그것도  수많은 목격자들이   지켜 보는  백주에

   저질렀으니, 자연히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다.  게다가  에릭  왕은

   브룩시아 왕국에서는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그것은

   왕인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누누이 천명한 바 있었으므로, 루퍼트

   왕자가 살인  행각에 대한   대가를 피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왕자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공개화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왕궁 앞의 광장에서 형이 집행되기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루퍼트 왕자는 시종 반항적이고

   무뚝뚝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설마 왕자인 자신이 어떤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무리

   짓궂은 장난을 해도 한 번도 벌을 받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선고가 내려지고 실제로  광장에  말뚝이 박히는  것을 보자,  루퍼트

   왕자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고  내재되어  있던  겁쟁이

   기질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그제서야 눈  앞에 닥친 자신의  운명에

   두려움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에릭 왕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왕은,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의가 지켜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루퍼트 왕자의  신분을 감안하여 어떤 예외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모든 문명이  존립의  근거로 삼고  있는 ‘힘보다  정의가

   우선’이라는 원칙이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공공의  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왕으로서 의무감이 에릭 왕의 그런  예외의 조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무기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이제 운명의   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오자, 왕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망나니 같은   아들이었지만,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헌신적이고 불타는 사랑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선고가 내려지던  날,  에릭  왕은 정의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고도

   아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달라고  밤새워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모든 아버지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을  품은 하느님께서

   왕의 기도를 들으셨다. 눈물을 흘리며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던 에릭

   왕은 먼동이 뿌옇게 밝아 올 무렵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그 길로

   몸을 일으켜 문서 보관소를 향해 달려갔다. 미친 듯이  고문서 더미를

   뒤진 끝에, 이윽고 왕은 찾고 있던 문서를 발견했다.

 

   까마득한 옛날에 브룩시아 왕국을 세운 필립 왕은 ‘필립 칙령’ 혹은

   이른바   ‘관용의  법칙’이라는   법령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경우에  한해서,  피고 대신  대리인을 처형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법령이었다. 이 법령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대리인은 피고의 직계 가족이어야  한다는

   점, 또한 피고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이 ‘필립

   칙령’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한 번도 활용된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정식으로 폐기된 적도 없는 법령이었다.

 

   이제 완벽하게 정당하면서도 합법적으로 아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낸  에릭   왕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즉각

   왕립위원회를 소집한  에릭 왕은  ‘필립 칙령’에   의거하여 자신이

   루퍼트 왕자 대신 처형대에 오를 것이라고 선언하여  신하들을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에릭  왕의  이  선언이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신하들뿐  아니라 브룩시아  왕국의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왕의 친구와 조언자들은  왕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들 모두  루퍼트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고 나면  최악의 결과가 초래하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릭  왕은  그들의  모든  탄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왕의 마음은 완고했다. 최고위직의 신하들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왕이 귀를  기울일 만한 인물을 선정해서,  그에게

   왕을  설득하는   임무를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현자이며

   성인다운 프리스크 대주교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프리스크 대주교는   오랫동안 에릭   왕을 면담하면서  왕의  마음을

   돌기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특히 대주교는

   성격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결점이 많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에릭 왕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그  점을  많이   생각해 보았소,   대주교.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하지만  루퍼트 왕자가  지금

   죽어 버린다면, 훗날 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내란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오.  언젠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내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될 테니  말이오. 정말로 그런 상황이  도래한다면

   얼마나 극심한  투쟁과  내분이 벌어질지   대주교도 잘  알지  않소.

   그러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루퍼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는

   것이 덜 위험할  것 같소.   혹시 누가 알겠소,  나의 희생이  루퍼트

   왕자의 눈을 뜨게 해서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 줄지 말이오?”

 

   왕과 대주교의 토론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결국 대주교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왕의 마음을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대주교는 낙담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왜 그토록 끔찍한 행동을 하시려는 겁니까?”

 

   에릭 왕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대주교는 슬프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을 사랑하신다구요! 하지만 이유가 무엇입니까, 폐하? 왕자님은

   폐하께 오로지 고통과 좌절밖에 드린 것이 없지 않습니까.”

 

   왕은 마치 혼자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왜 아들을 사랑하느냐고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데도

   이유가 필요하오?”

 

   에릭 왕은 그렇게 말하며 그윽한 눈길로 대주교의 눈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내 아들은 형편없는 망나니에 범죄자이며,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녀석일 수도 있소.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이 어떤 삶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지금의 내 생각에는 눈곱만큼도 변화가 없을 거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거나 없거나, 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본분이기

   때문이오.”

 

   이렇게 해서  왕과 대주교의  대화는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고 나자   누가 보아도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볼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루퍼트 왕자가 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필립  칙령’이   정한  조건에   저촉되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루퍼트 왕자는 오로지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아버지가  희생되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왕자는  뻔뻔스럽게도  즉각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지정된 날, 지정된 시간이 되자, 에릭 왕은 눈물을 글썽이는

   수많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장으로 걸어나가  말뚝에 묶였다.

   손에 횃불을 든  사형 집행인이  선뜻 짚더미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망설이자, 에릭   왕은  어서   사형을 집행하라고   지시했다.  왕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단호하고 명료했다.  이내 거대한  불길이

   에릭 왕의 몸을 휩싸자, 군중들 사이에서는 애도의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릭 왕이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주님, 내 아들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루퍼트  왕자는   왕궁의  특별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 동안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희생, 그  끝없는 사랑이

   마침내 그의 의식에 조금씩  영향을 미치지 시작한 순간이었다.  에릭

   왕이 남긴  마지막 말을   들은 루퍼트  왕자는 새삼스레   그 위대한

   사랑의 실체를 깨닫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나머지 이야기는 브룩시아 연대기에 적혀 있는 그대로이다. 루퍼트

   왕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으며, 브룩시아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칭송받는 훌륭한 통치자가 되었다.  지상의 그

   어떤 권력으로도 이루지 못한 변화가, 단 한 사람이 피워 올린 사랑의

   불꽃을 통해서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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